[미술관 탐방] 자유를 갈망하는 즉흥의 붓질: 대전 이응노미술관과 고암 이응노
[미술관 탐방] 자유를 갈망하는 즉흥의 붓질: 대전 이응노미술관과 고암 이응노
  • 김명해(화가, 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1.03.3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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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안개가 자욱하게 낀 주말 이른 아침. 포근한 날씨에 보슬비까지 내리니 봄의 문턱으로 들어선 것 같다. 날은 흐리지만 대전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설레기만 하다. 기차나 버스로 지나치기만 했고 한 번도 들린 적 없는 충청권 제1의 도시 ‘대전’과 그 도시에 위치한 이응노미술관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 때문이다.

  이응노미술관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넘어 예술에서 삶의 가치를 탐구한 고암 이응노(1904~1989) 화가의 예술세계를 조명하고 계승ㆍ발전시키기 위하여 대전시에 2007년 5월에 개관한 미술관이다. 미술관은 대전시 서구 둔산대공원 내(內)에 대전문화예술의 전당, 대전시립미술관과 나란히 위치해 있고, 멀리서 바라본 미술관 외형은 단층 구조의 수평ㆍ수직의 구도로 편안하고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단색의 밝은 콘크리트(Concrete)색 구조물에 사방(四方) 큰 창(窓)으로 트여있어, 밖에서도 미술관 안이 살짝 보이며 안에서도 작품을 관람하면서 바깥 풍경을 볼 수 있게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이나 전시장은 창문을 많이 설치하지 않고 실내를 어둡게 한 다음 실내조명으로 작품을 비춰 포인트를 주고 집중하도록 구성한데 반해 여기는 예외이다. 그것은 미술관이라는 건물이 주는 기존의 관념과 이미지를 깨고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단독적인 예술작품으로 진화하기 위해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모티브로 하여 또 다른 작품으로 탄생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응노미술관은 프랑스 출신 세계적인 건축가 로랑 보두엥(Laurent Beaudouin, 1955 ~ )이 설계한 것으로 고암의 작품 〈수(壽)〉 속에 내재된 ‘조형적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 속 드로잉(Drawing)적 요소를 구조로 전환하여 고암의 문자 추상을 건축적으로 해석하고 상징화했다고 한다. 또한 전통 건축 공간요소인 담과 마당은 전시공간과 연계된 다양한 외부공간으로 형성하였는데, 이런 내ㆍ외부공간은 산책하면서 전시를 관람하는 재미와 흥미를 유발시키며, 자연공원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담아내는 공간설정이라 한다.

  특히, 미술관 입구에 심어진 소나무 한 그루는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 서 있고 가로로 길게 트인 직사각형의 높은 담장은 뚫린 공간으로 보이는 산 능선과 하늘이 화폭 안에 그려진 하나의 풍경화인 듯 인상적이다. 한옥의 처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흰색 콘크리트 지붕과 빛과 공기가 막힘없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된 처마의 틈에서 건축물과 자연의 조화를 바라는 건축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틈’은 미술관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며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창과 틈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또한 미술관은 사시사철 변화하는 자연색을 모두 품을 수 있는 투명한 유리 건물로 설계돼 개방적이며 더불어 미술관 천장과 벽면을 이루는 격자 형태의 원목들로 인해 외부의 빛이 미술관 내부에 자연스럽게 투과되면서 특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미술관 전시는 이응노 화가의 미술작품과 자료의 학술적 연구를 토대로 한 소장품 전시와 세계미술사에 고암이 남긴 성과를 널리 알리는 기획전시로 이루어진다. 2021년 전시계획으로 기획전 《이응노의 사계》(1월 19일-4월 11일), 특별전 《문자추상》(4월 27일-7월 11일), 기획전 《이응노 오마주 그룹전》(7월 27일-10월 10일), 기획전 《박인경 개인전》(10월 26일-12월 19일)이 예정되어있다.

  필자가 방문한 날은 《이응노의 사계》전이 전시중이였다. 전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고암의 시대별 대표 풍경화들을 계절 별로 분류하고 그가 남긴 글에 투영된 계절에 대한 기억을 함께 전시하여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고암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의 관심이 자연 세계 그리고 자연에서의 삶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그의 추상작품 대부분은 자연의 풍경과 인간이 소재가 된 것으로 고암 추상의 출발은 자연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고암의 회화는 자연 본질의 사생으로 자연 산천을 벗하며 성장한 그에게 자연은 언제나 그가 그리워한 마음의 고향이자 화상(畵想)이였던 것이다.

  ‘화가 이응노’ 하면 흔히 떠오르는 대표작품들은 1958년 도불 이후 동서양 예술을 넘나들며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인 〈문자추상〉과 〈군상〉 시리즈이다. 〈문자추상〉은 1970년대에 한글서예로 문자추상을 선보이고 문자 기호를 도형화하고 단순하고 간결하며 평면적인 형태로 전환한 작품이고, 〈군상〉 시리즈는 1980년대 군상의 움직임을 묘사한 것으로 필선을 신속하게 흘려 쓴 초서체의 필획과 비슷한 모습의 작업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이응노미술관의 기획전시가 《이응노의 사계》전인 만큼, 이번 탐방은 전시장을 돌면서 고암의 ‘수묵풍경’ 위주의 작품을 감상ㆍ분석해 보고 그의 화업(畵業) 세계를 논해 보고자 한다.

  전시장 초입의 1전시실은 봄 풍경을 대표하는 수묵 풍경 작품들로 배치되어 있다. 고향 집을 그리워하면서 대전교도소 수감 중에 그린 〈풍경, 1968〉, 정양사 절에서 금강산을 바라본 풍경을 그린 〈정양사 만금강, 1950〉, 1945년 일본에서 귀국 후 둥지를 튼 예산의 수덕여관 뒷산인 덕숭산의 웅장한 모습과 다랑이 산밭을 점묘의 터치로 간략하게 표현한 〈덕숭산 전경, 1950〉 등이 전시되어있다.

  2전시실은 여름에 대한 고암의 글과 추상 풍경화 그리고 프랑스 고급벽지 회사인 노빌리스사의 디자인 의뢰를 받아 제작한 연꽃과 파초 그림의 일부인 〈연꽃도안, 1975〉, 거센 광풍에 흔들리는 대나무 숲의 잔상을 그린 풍죽 〈대나무 숲, 1971〉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대나무 숲〉 작품 바로 옆에는 통창 밖으로 보이는 실제 대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전시 기획자의 우연한 의도가 느껴졌다. 고암은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청죽(靑竹)〉이라는 대나무 그림으로 입선하면서 미술계에 등단하게 되고, 1923년부터는 스승인 해강 김규진으로부터 대나무를 잘 그린다 하여 받은 죽사(竹史)라는 호를 사용했다. 미술관 주위에도 유독 많은 대나무가 눈에 띄는데, 이는 고암이 생전에 대나무를 많이 그렸고 성격 또한 대나무처럼 올곧고 의협심이 강했던 점을 고려한 설계인 듯하다.

  1ㆍ2전시실에 전시된 작품들은 1945-1958년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로, 이 시기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전쟁, 갈팡질팡하는 정치와 사회로 얼룩진 암울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추상(抽象)은 한국 화가들의 화두이자 시대정신이었다. 고암 역시 이러한 시대정신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동양화단 주류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며 보수적인 전통회화의 혁신(革新)에 전념했다. 수묵실험을 통해 주변 풍경을 소재로 하여 이를 과감하게 변형하는 한편 대상과 여백과의 강렬한 대비를 추구했다. 수묵의 표현적인 농담 운용과 활달하고 거친 붓질로 화면에 긴장감과 밀도를 부여했으며, 붓의 선적 추상효과와 먹과 물이 어우러진 면적효과를 혼합시키면서 이른바 ‘반추상적 화의’로 나갔다. 수묵이 본디 지닌 추상 지향적 표현성, 물리적 속성 및 운필 본연의 서예적 추상 표현의 본질을 조형 차원으로 적극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여름풍경, 1950〉, 〈생맥生脈, 1950〉, 〈산촌, 1956〉, 〈비원, 1957〉 등의 작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데 특히 긴 묵선이 얽히고 튀고 흘러내린 얼룩으로 가득한 〈생맥, 1950〉은 얽힌 나뭇가지를 연상시키는 붓질로 자연의 분출하는 생기를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자유분방한 조형성과 리듬감, 자동적인 운필의 격렬한 동세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즉흥적 본능과 행위성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과 유사하며 이들은 서로 다른 전통에서 출발했지만 신명난 흥취를 즉흥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렸기 때문에 비슷한 결과에 도달했다고 한다. 고암의 회화 인생 중 이 시기를 “전통과 소재에 대한 독자적이며 현대적인 해석이 돋보이면서도 먹이라는 매체를 통해 나타나는 생생한 기운과 구성력의 조화는 도불 이후 전개되는 추상으로서의 진입을 시사한다.”고 미술관 측은 설명하고 있다.

  내가 빌려 표현하는 자연 대상과의 융화는 나의 생명인 예술의 반려자다.
  - 이응노, 1976년 신세계미술관 개인전 서문,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에서

〈수壽, 1972〉
〈생맥生脈,1950〉
〈향원정香遠亭, 1982〉

  3전시실은 고암의 가을 풍경 대표작품으로 경복궁의 후원인 향원정의 가을 풍경을 그린 〈향원정香遠亭, 1982〉과 10폭 산수화 병풍인 〈산수풍경〉, 그 외 도불 이후(1959-1989)에 그린 수묵 풍경화가 전시되어있다. 이 시기의 산수는 묘사적인 선이 없어지고 화면에 발묵(潑墨)을 활용한 면으로의 표현과 농묵ㆍ담묵이 서로 만나면서 이루는 번지기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이 특징이며 〈숲, 1980〉, 〈산, 1980〉, 〈바다풍경, 1966〉 등의 작품 통해 알 수 있다. 도불 이후, 고암의 작품은 서예에서 찾아낸 동양적 추상의 조형을 추상 산수화의 세계로 나가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나는 특히 한국의 민족적인 추상화를 개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동양화에서 선, 한자나 한글에서의 선, 움직임에서 출발하여 공간 구성과의 조화로써 화폭을 발전시켰지요. 한국의 민족성은 특이합니다. 즉 소박, 깨끗, 고상하면서도 세련된 율동과 기백, 이 같은 나의 민족관에서 특히 유럽을 제압하는 기백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작업입니다.
  - 이응노 작가노트, 《중앙일보》 1972년 12월 5일자

  마지막 4전시실에서는 1960~80년대 제작된 이응노 화백이 겨울을 묘사한 글과 설경 풍경이 전시되어있다. 특히 〈공주산성, 1940〉은 일본 유학 이후(1940년 이후) 사실적 재현의 풍경에 얽매이지 않고 수묵담채풍의 산수풍경을 본격적으로 그린 시기의 작품으로, 겨울나무의 앙상한 가지 하나하나 섬세하게 마른 붓으로 된 짧은 선과 점들로 구사하여 현장에서 얻은 인상과 감흥을 담담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70여 년에 걸친 고암의 작품세계는 20대 때의 전통 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의 모방 시기, 30대 때의 사실주의적 탐구 시기, 40대 때의 반추상적인 사의적 표현 시기, 50대 때의 유럽 추상화 시기, 60대 때의 사의적 추상화 시기, 70대 때의 서예적 추상화(문자추상과 인간 시리즈) 시기의 단계적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 고암은 묵죽화의 봉건 사회적 조형 의식부터 20세기 전위적 미술까지, 일생 동안 다양한 변화와 탐구 및 실험정신으로 현시대 화가들에게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관 내부의 작품을 관람하다 보면 작품 한번 보고 바깥 풍경 한번 보고, 다른 작품 한번 보고 또다시 바깥 풍경 한번 쳐다보고… 전시 관람 동선에 맞춰 아름답게 꾸며진 연못과 나무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작품 감상뿐만 아니라 미술관 내ㆍ외부를 들락날락하며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또한 미술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와 앞쪽으로 펼쳐진 광장과 분수대, 조각공원도 인상적이며 미술관 뒤쪽으로는 수목원이 있어 자연의 푸른 녹지도 감상할 수 있다.

  ‘자연과 예술이 조화된 건축물, 건축도 예술품이 될 수 있다’ 는 것을 보여 준 이응노미술관은 2007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로 뮤제오그라피(건축물과 전시실, 가구와 소품 등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처럼 설계한 것)를 실현한 ‘명품 미술관’이라는 찬사도 받았으며, 실제로 이응노미술관 1층 카페테리아에 있는 탁자와 의자 그리고 안내 데스크는 모두 로랑 보두엥의 작품이라고 한다. 예술 속의 예술, 작품 속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이응노미술관. 건축물과 자연 어느 하나라도 돋보이거나 모자라지 않게 어우러진 예술 그 자체인 곳이다. 날이 흐려 사진이 어둡게 나와 아쉽긴 하지만 새로운 사고와 시선으로 작품을 관람할 수 있었던 이응노미술관과 일평생 끊임없이 탐구하고 시도하고 새롭게 개척하여 역사에 남을 우리 미술로 승화시킨 고암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포근한 봄비가 내렸으니 파릇파릇 새싹이 움트고 이제 곧 봄이 오겠지. 코로나가 언제쯤 종결될지 모르겠지만 미술관 탐방기를 통해 봄 새싹 같은 자연의 새로운 기운을 충전시켜 드리며 다가올 봄날의 희망을 전하고 싶다. 코로나로 지친 모든 분들께.


출처
이응노미술관 https://www.leeungnomuseum.or.kr/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 박영택 지음/(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2014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1」 최광진 지음/ 미술문화 /2018
《문신ㆍ이응노의 아름다운 동행》 전시도록/ 2011
《리빙센스/ 작품에서 태어난 친환경건축, 이응노미술관》 2015.11월호

 

* 《쿨투라》 2021년 3월호(통권 8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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