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Theme] 나는 나이기에 아름다운 것
[5월 Theme] 나는 나이기에 아름다운 것
  • 이두헌(밴드 다섯손가락 리더, 책가옥 대표)
  • 승인 2021.04.28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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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위한 한 잔의 커피를 홀로 만드는 사람은 얼마나 향기로운가?

  다수의 사람들이 식당 혹은 커피전문점에 함께 가는 경우 선택되는 메뉴의 순위를 매겨 보면 언제나 1위는 ‘아무거나’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다수의 사람들에게 선택되는 메뉴의 2위는 ‘대충’이다.

  하지만 이렇게 인기 있는 ‘아무거나’나 ‘대충’도 5인 이하만 가능해진 어처구니없는 시대를 우리는 만나고야 말았다.

  그 많고 맛있는 메뉴 중에 우리는 왜 늘 아무거나를 선택하고 산지가 명확한 수많은 커피를 두고도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선택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그저 누구나 중의 한 사람이 되는 안전을 쉽게 선택한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아무나 중에 한 명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남에게 일부러 보여줄 일이 거의 없는 속옷을 디자인과 색상까지 고려해 고르는 시대, 보여줄 일 없어도 나를 위한 한 잔의 커피를 홀로 만드는 사람은 얼마나 향기로운가?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내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혼자가 일상이 된 팬데믹 시대,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내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완성품 혹은 기성품 커피 대신 나만의 커피를 만나는 첫걸음은 동네 산책에서 시작된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역의 대로변이 아닌 작은 골목을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산책하다 보면 작지만 단아하게 조용히 커피를 볶는 로스터리 카페를 만날 확률이 매우 높다.

  로스터에게 커피에 대한 무지를 수줍게 드러낼수록 그 혹은 그녀는 말이 많아질 확률이 높다. 진열된 커피 원두 봉투의 이름 중에 그저 마음에 드는 커피100그램을 구입한다. 커피분쇄기가 집에 없다면 분쇄를 부탁하면 그만이다.

  마침 카페에서 드리퍼와 여과지를 판매한다면 만 원 정도에 구입하자.

  세심하게 전문가처럼 커피를 내리자면 주둥이가 길고 좁은 커피 전용 드립 주전자가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오늘의 경험이 내 마음을 움직일 때 준비해도 충분하다.

  전기포트보다는 파란 불꽃이 이는 가스레인지 위에 주전자를 올리고 물이 끓어오르며 시시각각 다르게 내는 소리를 듣는 관능미를 느껴보는 것을 추천한다.

  커다란 머그잔 위에 드리퍼를 올리고 여과지를 장착한 후 분쇄된 커피를 20그램 정도 털어 넣고 잠시 나의 반경을 채우는 향기를 흠뻑 마셔본다.

  커피가 젖어 한두 방울의 커피가 잔에 떨어질 정도로 물을 부어 뜸을 들이고(쉽지는 않다) 30초 정도를 기다린 후, 모기향 모양을 떠올리며 같은 간격으로 두 번 정도 물을 충분히 부어주면 끝.

  오늘은 이 정도의 나를 마구 칭찬하기로 하자.

  내 손으로 내린 서툰 한 잔의 커피

  늘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음악을 준비하고 햇살이 가득한, 혹은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내 손으로 내린 이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해 본다. 밀려드는 한 마디, 행복해!

  머신에 캡슐 하나를 넣고 스위치를 누르는 배우의 손보다는 서툰 나의 물 붓기가, 캔 하나를 따서 물 마시듯 마셨던 공장 커피보다는 내가 내려 내 손에 들려있는 이 느린 한 잔이 얼마나 멋있는지.

 커피를 즐기는 나머지 수백 가지의 방법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말 ‘나’의 어원은 ‘아름’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곧 나답다는 뜻이다.
 나는 언제나 너무 소중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남다른 존재가 아니던가. 

‘아무나’가 되느냐 ‘나’가 되느냐는 오늘 내 손으로 내린 이 서툰 한 잔의 커피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이두헌
밴드 ‘다섯손가락’의 작사·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 1983년 KBS <젊음의 행진>으로 데뷔. 1986년 KBS가요대상 록 그룹 부문(다섯손가락) 수상. 2002 영상물등급위원회 가요음반 부분소위원회 위원, 2008년부터 시작된 ‘이두헌 교수의 음악과 인문학으로 풀어듣는 경영’, ‘경제에 관한 수준 높은 기업’등을 주제로 한 기관강의를 하고 있으며, 38여 년 동안 꾸준히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커피로스터로 거듭난 그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겸임교수이자 책가옥 대표이다.

 

* 《쿨투라》 2021년 5월호(통권 8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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