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Theme] 공간에서 장소로 바뀌는 집
[5월 Theme] 공간에서 장소로 바뀌는 집
  • 김성신(출판평론가)
  • 승인 2021.04.28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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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은 장소보다 추상적입니다.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됩니다. 공간과 장소의 개념은 각각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장소의 안전과 안정을 통해 공간의 개방성과 자유, 위협을 인식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공간을 ‘움직임(movement)’이 허용되는 곳으로 생각한다면, 장소는 ‘정지(pause)’가 일어나는 곳이 됩니다. 움직임 중에 정지가 일어난다면 그 위치는 바로 장소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공간과 장소』라는 책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책은 중국계 미국인 지리학자이며, 인문지리학의 대가로 인정받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석학, 이-푸 투안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1977년에 처음 출간된 이후로 40년 가까이 독자들이 끊임없이 찾는 인문지리학의 고전이다, 이-푸 투안은 이 책에서 ‘공간과 장소는 명확히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공간’과 ‘장소’에 대한 정의를 대비시켜 구분 짓고 있고, 사람과 장소와의 정서적 유대감을 뜻하는 ‘장소애(場所愛)’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한다. 그는 바로 이 관점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에서 우리 인간이 겪는 ‘경험’과 그곳에서의 우리의 ‘감정’에 대해 설명한다.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들 때, 즉 공간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그곳은 ‘장소로 발전’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가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을 그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적 지리학’이라는 관점에서, 현대인의 일상적이고 미묘한 삶의 경험들이 장소에 대한 우리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며 설명하고 있다.

  이-푸 투안에 따르면 공간에 대한 인식은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공간에 대한 인식 위에 서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우리가 일상적이고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도 공간에 대한 인식이 쉽게 드러난다. 우리가 사회적 지위를 표현할 때 ‘높고 낮음’이라는 수직의 공간개념을 사용한다. 또 사람과의 친밀한 정도를 나타낼 때도 ‘가깝다’나‘멀다’와 같은 공간 감각을 이용한다. 시간을 나타내는 말을 할 때 역시 앞과 뒤라는 공간 개념을 사용하고, 미래의 일을 말할 때는 ‘앞으로’라는 표현을, 과거의 일을 말할 때는 ‘지나온 길’이라는 표현을 쓴다. 모두 공간적인 개념을 활용해 표현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는 물리적 공간 감각을 활용해 세상의 관계와 방식을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한 식품 컨설팅 업체(HUNTER)에서 진행한 최근(2021년 3월)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무려 71퍼센트는 ‘전염병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집에서 요리를 계속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유는 이렇다. 요리 초보일지라도 코로나19 이후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이제는 어느 정도 요리 실력이 늘어났으며, 이에 따른 자신감과 즐거움도 맛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가정에서 요리를 하면 ‘돈이 절약되고’(67퍼센트), ‘더건강하게 먹을 수 있으며’(56퍼센트), ‘기분이 좋아진다’(56퍼센트, 복수응답)고 답했다. 이런 현상은 현재 우리나라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유로모니터 코리아라는 시장조사기관에서는 2021년의 지배적인 대한민국의 트렌드로 ‘집콕 챌린지’를 꼽았다. 즉, 올해는 사람들이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보는 계기로 삼을 것이란 전망이다.

  15년 전쯤의 일이다. 나는 느닷없이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표면적으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속절없이 나는 삶의 모든 의욕을 잃었다. 외출도 하지 않고 거의 6개월 동안이나 집 안에만 머물며 자신을 스스로 유폐한 채 멍하니 살았다. 그러니까 2020년의 팬데믹보다 훨씬 이전에 나는 자가격리를 경험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극심한 우울증에서 단숨에 빠져나온 계기가 있었다. 그간의 심리적 고통에 비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가볍게 우울에서 벗어났다. 단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좋은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 그저 옆에 있기에 아무렇게나 들춘 페이지에 적혀 있던 문장이다. 이 문장은 눈에 거슬렸다. ‘위대한 것의 적이 좋은 것이라니? 대체 뭔 소리?’ 하지만 뒤에 붙어 이어진 문장은 마치 도화선 같았다. 불꽃을 튀기며 어딘가를 향하더니 결국 내 머릿속에서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했다. 뒷 문장은 이렇다. ‘사람들은 제법 좋은 삶을 살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위대한 삶으로의 꿈을 접는다’ 그날 왜 유독 그 문장에 불꽃이 튀기듯 반응을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다만 내가 그토록 우울했던 이유가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잃어버렸던 것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면 ‘제법 좋은삶’에 머물지 말고 ‘위대한 삶’에 도전하라는 문장이, 나에게 삶의 방향과 의미를 순간 다시 일깨워 준 것이 아닐까 싶다.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던 내 인생의 어느 날, 모든 의욕을 잃고 넘어져 집 안에 갇혔던 나를 단숨에 일으켜 세워준 인생의 한 문장. 그것은 『Good to great』1라는 책의 서문에 등장한다. 짐 콜린스라는 경영컨설턴트가 쓴 책이다. 인생 문장을 얻은 책이지만, 책의 본문은 내 관심사와 거리가 좀 있는, 기업의 경영전략에 관한 책이라 끝까지 읽지는 않았다. 그때 내가 왜 그 책에 손을 뻗어 펼쳤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직업적 백면서생’, 그러니까 출판평론가라는 이름을 걸고 한참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매일기고와 방송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책과 독서를 권하고 있었지만, 사실 책 속의 한 줄이 그토록 강력한 위력을 가졌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집 안에 머물며 혼자만의 시간에 책을 펼친다는 행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잠시나마 행동을 멈추고, 사유를 시작하는 의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기착취가 일상이 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집은 그저 공간이기만 했다. 그 공간에 의미와 가치를 채워 ‘ 나만의 장소’로 만드는데 독서만 한 것이 또 있을까?

 

 


1 국내에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김영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됨.

김성신
출판평론가, 문화평론가, 한국콘텐츠비평협회부회장, 한양대 ERICA캠퍼스 겸임교수, 파주출판도시문화재단 실행이사

 

* 《쿨투라》 2021년 5월호(통권 8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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