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 종이감옥(나희덕)
201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 종이감옥(나희덕)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17.03.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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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감옥

나희덕

 

그러니까 여기, 누구나 불을 끄고 켤 수 있는 이 방에서, 언제든 문을 잠그고 나갈 수 있는 이 방에서, 그토록 오래 웅크리고 있었다니


묽어가는 피를 잉크로 충전하면서
책으로 가득찬 벽들과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서류 더미들 속에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옮겨 다니며
종이 부스러기나 삼키며 살아왔다니


이 감옥은 안전하고 자유로워
방문객들은 감옥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간수조차 사라져버렸지 나를 유폐한 사실도 잊은 채


여기서 시는 점점 상형문자에 가까워져 간다
입안에는 말 대신 흙이 버석거리고
종이에 박힌 활자들처럼
아무래도 제 발로 걸어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썩어문드러지든지 말라비틀어지든지

벽돌집이 순식간에 벽돌무덤이 되는 것처럼
종이벽이 무너져내리고 잔해 속에서 발굴될 얼굴 하나


종이에서 시가 싹트길 기다리지 마라


그러니까 오늘, 이 낡은 방에서, 하루에 30분 남짓 해가 들어오는 이 방에서, 위태롭게 깜박거리는 것이 형광등만은 아니라는 걸알게 되다니

 

 

시작노트

오든은 예이츠를 추모하는 시에서“시란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않”지만 그러하기에“시는 말의 계곡 속에서 살아남는다”고 노래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살다가 숨을 거두는 조야한 도시”에서“시는 하나의 사건이며 하나의 입”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말의 계곡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말. 그런 믿음이나 위로마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낡은 종이감옥을 견딜 수 있을 까. 가장 가벼우면서도 무겁고,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종이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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