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영원히 빛나는 물방울의 변주: 제주 김창열미술관과 김창열 화가
[미술관 탐방] 영원히 빛나는 물방울의 변주: 제주 김창열미술관과 김창열 화가
  • 김명해(화가, 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1.04.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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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초 김창열(金昌烈, Tschang-Yeul Kim, 1929년 12월 24일 ~ 2021년 1월 5일) 화가의 부고를 신문기사를 통해 접했다.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오랜 시간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실제인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영롱한 물방울을 그린 작품으로 대중적인 인기와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한국 현대미술에 큰 획을 그었던 분이다.

  1992년 무렵, 경주 현대호텔 개관 기념으로 《한국현대미술작가 초빙 전시회》에서 김창열 화가의 〈물방울〉 작품을 본 적이 있다. 당시 필자는 현대미술의 흐름을 잘 모르는 미술 초년생이었고, 미술학원이나 대학에서 ‘물방울 잘 그리는 방법’에 대한 수업이 있어서 물방울 그리기 연습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였는지 정작 유명한 〈물방울〉 그림 앞에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물끄러미 작품을 보았던 것이 생각난다.

  견문이 짧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작품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에 당일치기로 제주로 날아갔다. 제주행 항공비가 기차요금 수준으로 낮춰졌고, 숙박비와 자동차 렌트 비용도 저가여서인지 제주 공항은 코로나 거리두기가 무색하게 전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볐다. 날이 완연한 봄이다. 남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따듯한 바람이 편안함을 주었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제주 바다 풍경은 ‘인생 샷’ 그 자체였다. 구멍 송송 검은 돌담은 노란 유채밭과 대조적인 색채로 눈에 띄었고, 초록 양배추밭과도 그럴싸하게 잘 어울렸다.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은 동서양의 가치를 구현한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가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며 현대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미술작품과 자료를 전시, 연구 수집하기 위해 제주시 한림읍 저지리에 2016년 9월에 개관한 미술관이다. 지상 1층 규모로 3개의 전시실을 비롯하여 교육실, 수장고, 야외 공연장 등 복합적인 시설들로 구성되어 있고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김창열 화가의 물방울 작품을 모티브로 빛의 중정과 각각의 방들로 구성된 독특한 미술관이다.

  미술관이 위치한 이곳은 제주 서남쪽, 해발 100미터 저지오름으로 제주현대미술관(2007년 9월 개관)뿐만 아니라 48명의 예술작가(화가, 조각가, 극작가, 서예가, 음악가 등등)의 작업실겸 집으로 2001년에 형성된 저지문화예술인마을도 있어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제주의 이색 문화지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예술인마을 초입에 있는 키 큰 야자수와 열대 식물들, 흐드러지게 핀 붉은 동백꽃, 초록 잎사귀 사이사이에 달린 노란 유자를 보니 ‘여기가 정말 제주도구나!’ 하고 새삼 제주에 온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라는 표지석 방향으로 50미터 정도 내려가니 김창열미술관이 바로 보인다. 주차장 입구에 현재전시를 알리는 안내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니 미술관 건물이 바로 나타났다. 제주 마을의 전형적인 집처럼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돌담과 정낭(대문)이 있고 미술관 건물 주변에는 유자나무, 차나무, 동백나무 같은 사철나무들이 즐비했다. 미술관 입구로 통하는 문은 두 갈래 길인데, 하나는 1층 미술관 현관으로 바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건물 옥상으로 연결되어 건물과 건물 사이 중정(건물 안이나 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뜰)으로 이어진 길이다. 보통의 관람객들이 1층 입구로 바로 직진하는데 필자는 옥상으로 연결된 길로 먼저 갔다. 옥상에서 미술관 건물 전체를 보고 싶은 충동이 앞섰기 때문이다.

   건축물은 제주를 상징하는 검은 돌로 둘러진 외벽과 중앙 중정을 중심으로 높낮이가 다른 네모난 대형 큐브(Cube) 6-7개가 井(우물 정)자 모양으로 세워진 느낌이다. 하지만 미술관을 상공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보이는 격자무늬 구조를 갖춘 건축물의 모습은 回(돌아올 회)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며 오름(평지보다 높이 솟아있는 땅으로 “산”의 제주방언)과 같이 융기되는 지형과 건물의 내ㆍ외부를 입체적으로 연결하여 인위적인 공간인 미술관이 자연으로 스며들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빛과 바람 등의 자연을 실내로 유입하는 통로인 회랑과 김창열 화가의 회귀(回歸) 철학을 친환경 디자인으로 미술관 중심공간에 승화시킨 중정 등 건축물로서도 무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건물 옥상은 마냥 비워두지 않고 작은 현무암 돌들을 깔아 비가 오면 빗물이 관을 통해 자연스레 빠지도록 의도하였는지, 시각적으로 심심하지 않다. 그리고 옥상에서 중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 통로 길은 중정의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시선을 고정시켜 훑어보게 하는 묘한 상황을 연출한다. 미술관 옥상 공간을 다시 예술 공간으로 연장시킨 점이나 미술관 사방으로 채광과 환기 기능이 가능한 외부공간을 유입시킨 설계 역시 돋보인다.

  중정은 일반적으로 나무나 화초 등 정원이 있게 마련인데, 여기에는 평평한 바위 위에 물방울 모형 3개가 놓여있는 분수가 있다. 10분 간격으로 10분씩 분수가 솟구치며 햇빛을 받을 때마다 물방울 모형 위로 무지개가 만들어져서 관람객들의 시선을 압도적으로 받고 있다. 비가 오면 중정으로 내리는 빗물이 오히려 더 운치 있고 분위기 있을 것 같다. 다른 길로 둘러와도 1층 미술관 출입구에서 만나기 마련. 미술관 내부보다 외부를 먼저 둘러보고 온 터라 이제 내부 구경과 미술작품을 감상할 차례다.

ⓒ미술관 중정

  현재전시 주제는 ‘물방울의 변주’로, 전시 의도는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지속했던 김창열 화가의 예술세계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물방울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했던 예술가로서의 도전정신에 대한 헌사로 기획했다고 미술관 측은 설명하고 있다. 기획 의도에서 제시했듯이 각 전시실마다 물방울이 그려진 시기가 다르듯 실제 신문의 지면과 활자를 활용한 바탕에 물방울이 그려져 있으며 마포((linen)랑 나무판 위에도 있다.

  김창열 화가의 ‘물방울’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가 70년대 파리로 이주한 이후의 시기이다. 그래서 1전시실은 1970년대 신문지면에 그린 〈물방울〉 시리즈, 2전시실은 마대나 나무판 위에 물방울이 몰려있는 〈Water Drops〉 시리즈, 3전시실은 1990년-2000년대 천자문 바탕 위에 물방울이 그려진 〈회귀(Recurrence)〉 시리즈로 전시되어있다.

“밤새도록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유화 색채를 떼어내 재활용하기 위해 캔버스 뒤에 물을 뿌려 놓았는데 물이 방울져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며 물방울을 만났습니다. 내가 외국에서 오래 생활을 하다 보니, 과연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결국 서양과 다른 나의 차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바로 한 방울의 물방울이었던 것입니다. 물방울은 불교의 공(空)과 도교의 무(無)와도 통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물방울’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와같은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고 전하는 김창열 화가는 이때부터 ‘물방울’을 작품의 모티프로 삼기 시작했다.

 1전시실의 20여 점의 작품들은 신문지를 매체로 그린 물방울 작품이다. 1975년 《르 피가로》, 《르 몽드》 지의 지면에 물방울을 그렸는데, 문자와 물방울이 대등한 관계로 등장한다. 그림의 여백을 가시화하기 위해 신문지를 매체로 삼고 물방울에 반투명성과 중량을 부여했다. 포도 알맹이처럼 맺혀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 빛을 받아 비스듬히 진행되는 모양새를 띠기도 한다. 구도 역시 몇 개의 물방울이 넓은 화면의 한가운데 자리 잡거나 가장자리로 몰려 흩뿌려진 빗방울처럼 맺혀있기도 한다. 무엇보다 현저한 변화의 시도는 문자의 등장이며 신문지 위의 물방울 작품은 〈물방울〉과 〈회귀〉의 중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훗날 문자를 화면에 써나가는 작업으로 작품을 변화시켰다.

 “제 작업에 물방울을 없애버리고 싶은 욕망이 수없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나 물방울을 빼고 나면 내가 어디로 소멸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어요. 물방울이 어느덧 내 운명처럼 돼버렸고 찌그러진 것이든 건강한 것이든 삶의 형식이 된 것입니다.”
- 「한지 위에 물방울 그리다」, 《동아일보》 1990. 10. 5일자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달마대사의 면벽 수행을 통한 득도와 비교하면서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으며,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것을 물방울로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이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에고’의 신장을 바라고 있으나, 나는 에고의 소멸을 지향하며 그 표현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
- 박영택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 중 작가노트


 초기 물방울 회화에서 물방울은 전쟁으로 인한 작가의 상실감과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정화와 치유의 수단이었다. 1980년대 들어, 작가는 캔버스가 아닌 거친 마포나 마대, 나무판을 사용해 표면의 즉물성(卽物性)을 그대로 나타내면서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다. 2전시실의 〈Water Drops〉 시리즈가 이시기의 작품들이다.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날것의 바탕 위에 그려진 물방울의 이질감이 강조되며 온 사방에 분산된 물방울,한쪽 귀퉁이에 빼곡히 몰려있는 물방울, 나란히 총총 줄지어선 물방울도 실제 물방울의 물질성은 사라지고 뭔지 모를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물방울이 보석처럼 영롱하지만, 사실은 존재성이 희박하고 물체로서 가장 허약하다는 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털면 금세 없어지는 물방울, 그것이 주는 이미지를 좋아했죠. 카뮈 스타일의 허무가 아니라 충만하면서도 공허한 동양철학의 추구였습니다.”
-「귀국전 여는 물방울 화가, 재불 김창열 씨」, 《한국일보》 1976. 5. 14일자


 1990년대부터는 한자의 획이나 동양적 정서의 색점, 색면을끌어들여 물방울 회화에 도입한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토양과 풍토로 돌아간다’는 뜻의 〈회귀(Recurrence)〉 연작은 3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 시기의 물방울 작품들은 단지 맺혀 있는 것에서 변화되어 일그러지기도 하고 뭉개지기도 하며 지워지기도 한다. 또한 물방울의 바탕에는 끊임없이 천자문이 작게 혹은 크게 등장하는데 이는 오랜 해외 생활로 인해 형성된 작가의 향수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 아래에서 쓰던 천자문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물론 미술 평단에서도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의 응결체로 천자문 시리즈를 들고 있으며 ‘이들 작품들은 더욱 더 강렬하게 동양의 철학과 정신성을 드러내며 새로운 사유의 장을 만들어내었다’고 평하고 있다.

물방울 / 129x96.5cm / 마포에 염료, 유채 / 1983

  이와 같이 김창열 화가의 물방울 작업은 하나의 물방울이 캔버스를 점하고 있는 작품에서부터 캔버스 전면을 물방울이 메운 작품, 이제 막 맺힌 영롱한 물방울에서 금방이라도 밑으로 흘러내리거나 표면으로 스며들 것 같은 물방울 작품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렇게 다양한 물방울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그의 화면 지지대도 캔버스에서 신문지, 마포, 모래, 나무판 등으로 변화되었으며, 물방울의 조형적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 물방울과 함께 스며든 물방울의 흔적, 거칠게 발라놓은 유화물감, 천자문 등을 그리기도 하였다. 다양한 작업 속에 존재와 우주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그의 명상적 사유가 오롯이 응축되어 있다.

 제주는 생각보다 넓고 발길 닿는 곳마다 관광지라 볼 것이 많은데, 다른 곳을 두루 둘러보지 못해 너무 아쉽다. 비행기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일부러 몇 코스 전에 내려 공항까지 산책하면서 걸었다. 왼쪽으로 넓게 펼쳐진 원시림을 끼고 오른쪽으로는 야자수 가로수를 벗 삼아 내리막 앞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걸으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걸으면서 문득 오늘 갔었던 김창열미술관 건물이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형성된 8개의 검은 오름 형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의 환경과 물방울 작품이 조화를 이루고, 곶자왈 숲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지어진 김창열미술관.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림을 만드는 일을 평생 했다’는 김창열 화가. 유명(有名) 화가는 떠났지만, 그는 우리에게 물방울 그림으로 공간의 비움과 채움, 생성과 소멸 등 무한대로 변주하는 작품을 남겨주셨다.

 


출처: 김창열미술관 http://kimtschang-yeul.jeju.go.kr/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 박영택/(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2014)

 

* 《쿨투라》 2021년 4월호(통권 8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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