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세상 모든 부모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 〈미나리〉
[영화 월평] 세상 모든 부모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 〈미나리〉
  • 나원정(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
  • 승인 2021.04.2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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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씨네마

  ‘우리들의 모든 할머니들께 감사합니다.’

  영화 〈미나리〉는 이런 내용의 영어 자막으로 끝맺는다. 지난해 미국 최대 독립영화제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관객상 수상을 시작으로 지난달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등 3월 11일까지 미국 안팎 영화시상식에서 90관왕을 차지하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이어 올 4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계 영화의 수상 가능성이 점쳐지는 바로 그 영화다. 재미교포 2세 리 아이작 정(한국 이름 정이삭) 감독이 각본을 겸해 1980년대 미국 아칸소 시골로 이주한 자전적 가족이민사를 새겼다.

  영화에서 가족의 막내인 꼬마 데이빗(앨런 김)이 유년 시절 정 감독의 분신 같은 캐릭터다. 미국 이민 10년차인 모니카(한예리)와 제이콥(스티븐 연) 부부가 외딴 시골의 바퀴 달린 트레일러 집으로 이사해 한국 채소 농장을 일구며 겪는 애증의 가족사가 주된 줄거리라면, 데이빗이 한국에서 찾아온 외할머니 순자(윤여정)와 방을 같이 쓰게 되며 티격태격하는 일상은 훈훈한 웃음을 끼얹은 쉼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쉼표인 줄 알았던 할머니와 어린 손자의 추억 어린 순간들이 이 가족을 계속 살아가게 만든 든든한 보호막이었다는 걸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 아마도 정 감독이 자신의 할머니를 추억하는 방식이자, 이 영화를 만든 까닭일 테다.

ⓒ판씨네마

  지난해부터 미국 수상 소식이 잇따른 덕에 〈미나리〉는 한국에선 3일 개봉해 2주만에 51만 관객을 동원하며 코로나19 극장가에 봄바람을 몰고 왔다. 정작 영화를 본 관람객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가족 생각이 나 울었다’거나 ‘감동했다’는 호평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보다 심심하다’, ‘미국에선 왜 이렇게 화제인지 의아하다’는 반응도 꽤 있다. 무엇보다 〈미나리〉로 현지에서 30개 가까운 트로피를 휩쓴 할머니 ‘순자’ 역의 윤여정은 전작에서 이보다 더 잘한 연기가 많은데 왜 하필 이 영화로 주목받는지 모르겠단 관객도 적지 않다 .

  미국 ABC 아침 생방송 ‘굿모닝 아메리카’가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 칭한 윤여정의 “반짝반짝하고 입이거친”(《타임》) “사랑스러운 할머니”(《버라이어티》) 순자, 정 감독이 “사람들이 관심이 가질지 확신이 없었다”고 할 만큼 내밀한 어느 한국계 이민 2세의 가족사는 어떻게 미국 관객을 사로잡았을까. 그 비결엔 지난해 아카데미 수상 무대에서 봉준호 감독이 말했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란 명제가 있다. 봉 감독이 영화 공부할 때 항상 가슴에 새겼다며 인용한 이탈리아계 미국 거장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의 지론이기도 하다.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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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

  〈미나리〉에서 이렇게 말한 데이빗은 “진짜 할머니 같은 게 뭔데?” 되묻는 순자에게 “쿠키도 만들고 나쁜 말도 안 하고 남자 팬티도 안 입고…” 불평한다. 미국서 자란 데이빗에게 순자는 “한국 냄새 나는(smells like Korea)” 할머니다. 한국서 다시용 멸치, 고춧가루를 양손 가득 싸들고 와 딸 모니카를 감동하게 만들지만, 요리는 별로 즐기지 않는다. 순자는 “산에서 온 이슬물”(미국 음료수 ‘마운틴듀’를 가족은 이렇게 부른다)을 들이켜며 레슬링 중계를 즐겨 본다. 심장이 약한 데이빗이 동네 교회에서 새로 사귄 미국 친구에게 훈수까지 두며 ‘이겨먹는’ 화투도 순자가 조기 특훈한 것이다.

  제작자 겸 주연을 맡은 재미교포 배우 스티븐 연이 미나리에 대한 설명을 무한 반복하게 만든 한국식 영어 제목(Minari)처럼, 순자는 미국에서도 그저 순자라 불린다.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를 아칸소 깊은 숲속 개울가에 심으며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란다”고, 어린 손자와 “원더풀(wonderful) 미나리” 노래를 부른다. 야심만만한 사위 제이콥이 초목만 무성한 외딴 시골에서 경험도 없이 무턱대고 한국 야채 농장을 만들려 하거나, 딸모니카가 아픈 아들을 위해 병원이 가까운 대도시 한인사회 속에 안착하길 원하는 것과 다르다.

  정 감독과 스티븐 연은 여러 인터뷰에서 “아시아계 백인으로서 정체성을 (백인 관객을 위해) 굳이 설명하지 말자는 것이 이 영화의 제작 의도”라고 거듭 밝혀왔는데 그런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할머니 순자와 손자 데이빗의 장면들이다. 순자가 한국에서 하듯 자신의 입으로 부드럽게 씹어 뱉어낸 삶은 밤을 먹이려 하자 데이빗이 질색하거나, 순자가 손자 심장을 위해 다려온 한국식 탕약이 너무 쓰기만 한 데이빗이 순자의 음료수를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해 할머니를 골탕먹이는 실화 바탕의 일화들은 이토록 생생할 수 없을 만큼 더없이 섬세하게 40년 전 가족의 이야기를 2021년 스크린 속에 불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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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지극히 미국적인 이민자 가족의 영화가 왜 대사의 50퍼센트 이상이 한국어란 이유만으로 골든글로브 등에서 작품상 자격없이 ‘외국어영화’로 분류됐는지에 대한, 각종 외신과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비판도 화제가 됐지만, 현지 대중을 움직인 것은 바로 이런 가족의 소소한 순간들이 었다. 미국 인기 소셜 게시판 ‘래딧(Reddit)’에선 이민 1.5~2세대 어린 관객들이 극중 데이빗에게 감정이입해 각자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얘기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아 무수히 많은 사람이 가족을 잃은 미국에서 조금 투박하되 진심어린 방식으로, 미나리처럼 질긴 생명력의 가족애를 되새긴 이 영화가 각별히 다가왔으리란 해석도 나온다. 특유의 맛깔난 호흡, 따뜻한 유머를 더한 윤여정식 연기도 그런 이유로 더욱 돋보였단다.

  정 감독은 미국 유타대 인천 송도 캠퍼스에서 영화를 가르치던 시기에 교수실 창밖으로 갯벌에서 조개캐는 나이든 여성들이 보였고, 그러면서 한국전쟁 때남편 잃고 외동딸인 자신의 어머니를 키우려 갯벌에 나갔던 할머니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고, “할머니가 안계셨다면 내가 여기 와서 가르치고 있을 수 있었을까” 눈물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고백했다. 그가지극히 개인적이고 꾸밈없는 묘사에 실어낸 “자식의 미래를 위해 희망을 걸었던 세상 모든 부모를 향한 러브레터”는 문화와 언어 장벽을 넘어 그 진심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이들의 가슴을 두드린 것이다. 그렇게 빚어낸 영화에서 그 시절 이민자들의 고충부터 한국전쟁의 상흔, 삶 그 자체의 경이가 바라보는 이의 시점에 따라 폭넓게 감지된다는 것 역시 신묘한 일이다.

 

 


나원정
《스크린》《무비위크》《맥스무비 매거진》《매거진M》 등 영화잡지를 거쳐 지금은 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 영화의 안과 밖을 들여다보는 게 '일'이자 '취미'인 성공한 덕후다. 

 

* 《쿨투라》 2021년 4월호(통권 8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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