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월평] 시적인 가사는 멀리 있지 않다: 레드벨벳 〈피카부(Peek-A-Boo)〉
[음악 월평] 시적인 가사는 멀리 있지 않다: 레드벨벳 〈피카부(Peek-A-Boo)〉
  • 이준행(음악가)
  • 승인 2021.04.27 10: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M엔터테인먼트

  좋은 가사를 쓰고 싶다, 시적인 가사를 쓰고 싶다는 것은 모든 아티스트의 꿈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시적인 가사’라는 이 애매한 표현이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와 음악이 생각보다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막연하게 비슷해 보이는 이 둘은 사실 매우 다르다.

  시는 함축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시인은 함축성을 지닌 시어들을 배열하여 독자가 그 수수께끼를 풀게 유도하고, 그 안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관찰을 끌어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시는 그다지 친절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수수께끼를 독자가 푸는 그 순간에만 숨겨진 의미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음악의 가사에서는 고도의 함축성이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가사가 있는 노래는 어떤 강렬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가사에서 고도의 함축이 이루어질 경우, 독자에게 그 곡의 이야기가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고 수수께끼로만 남아버린다. 소위 ‘철학적인 의미’를 노래를 통해 전달하고 싶다는 아티스트들이 이 함정에 자주 빠져버리고 만다.

  그러나 또 어떤 면에서 적당한 함축은 필요하다. 음악에서 가사가 들어가는 부분은 ‘절’과 ‘후렴’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이 짧은 분량 안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대중가요들은 구구절절 가사 안에 사연을 녹여낸다. 효율성을 기해도 모자랄 판에 ‘이별을 해서 마음이 아프고, 지금 술을 마시고 있다’와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

  가사에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경우, 그것은 닫힌 예술이 된다. 가사를 음미하는 독자들에게 자기생각과 이야기들을 투영할 자리를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가사는 그 아티스트 자신만의 것으로 한정되어 버린다. 본디 예술은 ‘x’라는 미지수에 독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넣어 자신의 고유한 의미인 ‘y’를 추출하는 과정이다. 이미 구체성으로 가득 차버린 가사는 아티스트 자신이 모든 답을 이미 내어놓아 작가 자신의 의미만으로 한정된 공식이 되어버린다.

  너무 과하게 함축을 내포한 단어를 나열한 가사는 고도로 압축된 단단한 밀가루 반죽을 리스너들에게 던지는 것과 같다. 일단 이 반죽을 그대로 맞으면 아프다. 또한 자신만의 먹음직스러운 빵을 만들어 가야 하는 리스너들에게 너무 많은 해석과정을 강요한다. 따라서 시적인 가사를 위해서는 해석의 범위를 어느 정도까지 적절히 좁혀 놓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반대로 아예 모든 것이 완성된 빵을 리스너들에게 줘 버리면 그것은 리스너들 자신의 빵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온전하게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 음악은 리스너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수가 없다.

  결국, 시적인 가사를 쓰는 것은 적당한 크기의 완성되지 않은 빵, 즉 ‘생지’를 제공하는 것과 같다. 작사가들은 어느 정도 빵의 모양이 나올 수 있는 수준으로 이야기를 그려놓아야 한다. 여기에 몇 가지 해석의 차원을 제공하기 위해 누룩을 투입하거나, 여러 재료를 이용해서 꾸며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온전한 상태의 빵을 제공해주는 것은 피해야 한다. 리스너들 스스로의 경험이 이 빵을 자신의 것으로 구워낼 수 있는 상태를 제공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답은 ‘시적인 가사’라는 표현이 다 알려주고 있다. ‘시적인’ 가사일 뿐 시가 아니다. 시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함축성을 어느 정도 빌려와서 제한된 형식 안에 효율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녹여내는 가사, 시와 이야기의 중간에 위치한 ‘균형’의 예술이 시적인 가사라고 정리할 수 있다. 시적인 가사는 함축성과 구체성의 사이에 위치하며, 음악을 듣는 리스너들에게 ‘x’와 ‘y’의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시적인 가사’인 것이다.

  ‘시적인 가사’는 어디에나 있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레드벨벳(Red Velvet)의 곡 〈피카부〉의 후렴은 그 훌륭한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술래는 너로 정해졌어
재밌을 거야 끼워 줄게
저 달이 정글짐에 걸릴
시간까지 노는 거야

  이 후렴은 놀이터를 둘러싼 전경을 단 4개의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폭넓은 의미를 리스너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먼저 우리는 놀이터라는 배경과 ‘술래’라는 단어, ‘끼워줄게’ 등의 표현들을 보면서 화자가 여전히 동심의 세계에 머무른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제일 중요한 부분은 ‘저 달이 정글짐에 걸릴 시간’이라는 표현이다. 화자는 현재의 시간이 밤이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는 다. 단지 달이 정글짐에 걸려 있다는 표현을 통해 놀이터의 전경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표현을 통해 시간이 밤이라는 기본적인 정보를 획득할 뿐만 아니라, 화자가 ‘정글짐’에서 놀고싶은 어린아이의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어서 찾아올 밤의 시간이 어린아이에게 금기의 시간임을 알수 있다. 놀이터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부모님에게 혼이 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곧 찾아올 밤의 시간은 아이들에게 매우 두려운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당돌하게 그 금기를 넘어서며, 위험하면서도 즐거운 유희를 함께 즐기자고 권하고 있다.

  화자가 정글짐에 걸린 달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래에서 위로 향해 있다. 정글짐의 맨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면 볼 수 없을 광경이다. 정글짐의 맨 꼭대기는 예로부터 용기 있는 아이들만이 차지했던 위치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피카부〉의 화자는 용기 있게 꼭대기를 향하는 어린아이는 아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어린 시절 겪어왔던 그 두려움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아이일 것이다. 꼭대기로 향하는 두려움을 간직한 채, 부모님의 두려움은 접어두고 밤의 시간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는 화자는 경계에 머무른 불안정한 상태 속에 있다.

  리스너들에게 어린 시절에 보냈던 놀이터에서의 시간, 정글짐과의 시간은 보편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다. 또한 이 후렴은 보편성 안에 각자가 투영할 수 있는 다양한 개인적 경험들의 자리를 충분히 열어두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놀이터인지, 배경의 시간이 언제인지 등을 말해주지 않고도 충분히 폭넓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 후렴 가사는 그 불안의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음악적 장치들과 만나며 하나의 시적인 음악을 이룬다. 특히 마이너의 코드 진행은 화자가 느끼고 있는 경계의 불안함을 배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곡 전체적으로 다양한 악기가 사용되지는 않는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EP 사운드, 단순한 베이스 비트 정도만 사용될 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시적인 가사’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한 많은 것이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이미 거기에는 당신의 경험을 녹여 넣을 충분한 자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준행
음악가. 락 밴드 벤치위레오 보컬. 기타로 활동중.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박사과정 재학. 시와 음악의 연관성을 탐색하는 중.

 

* 《쿨투라》 2021년 4월호(통권 82호)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