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오늘의 영화 - 동주] 문화콘텐츠‘동주’현상과 그 현재성
[2017 오늘의 영화 - 동주] 문화콘텐츠‘동주’현상과 그 현재성
  • 손정순
  • 승인 2017.03.01 12: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

“동주야~”스크린 속에서 세상 밖으로 울려퍼지는 이 이름은 영원히 늙지 않는다. 아직 “청춘이 다하지 않은”그의 시처럼.

탄생 100년을 맞아 윤동주를 역사적으로 기억하고 현재형으로 각인하려는 ‘윤동주 현상’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잊지 못할 윤동주〉(MBC TV)가 재방, 삼방 되고,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시집 원본은 물론, 『동주』와 관계된 시집, 소설집, 평전 등이 개정판으로 쇄를 거듭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뿐이랴, 윤동주의 랩이 음원 사이트 1위를 차지하고, 뮤지컬과 연극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로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스물여덟이라는, 활짝 피어보지도 못한 채‘잎새’로 져버린 윤동주가 2030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청년들의 별’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통감했던 동주가 최근 불안했던 정국과 맞물리면서 젊은 층에게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취준생으로 패배와 좌절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온 그들이, 그들 나름의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통해 반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동주’현상을 현재형으로, 실천적으로 끌어 올리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주인공은 바로 ‘2017 오늘의 영화’ 최고작으로 선정된 이준익 감독의 〈동주〉일 것이다.

우수한 영상콘텐츠를 통해 재해석

오늘날 대중문화의 일용할 양식으로 자리잡은 ‘영화’가 다양한 문화예 술의 융합과 미학에 대한 콘텐츠로 나아가는 과정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 다. 그 중요한 사례로 〈동주〉의 성공에는 당연히 우수한 콘텐츠(시, 시나 리오)가 있었다. 우수한 콘텐츠란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영화 콘텐츠의 경우 단순히 좋은 영상을 넘어 원작과 시나리오, 음악, 연출, 제작에 이르기까지 중독성과 패러디하고 싶은 매혹이 필요한 것이다.

윤동주는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그는 1917년 북간 도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 유학 생활 중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후쿠오카의 차가운 감옥 에서 숨을 거뒀다. 부끄러움을 알기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랐던 시인 윤동주! 그는 힘든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변절하지 않았고 27년 2개월이 채 못 되는 짧은 삶을 마감했다. 시(예술)란 자아를 떠나 서는 존재할 수 없기에 냉혹한 죽음과 독대하면서도 끊임없이 시를 썼던 그의 정신은 그가 부재하는 오늘에도, 그를 연신 지금 여기에 불러와 현존케 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동주〉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까지 맡은 신연식 감독은 그동안에도 많은 작품들을 감독하거나 제작하고 각본을 썼지만 그가 유일하게 돈을 벌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은 바로 〈동주〉이다. 대체로 상업영화들이 20억 정도의 예산을 기본적인 규모로 상정하고 있는 현실에서 〈동주〉는 고작 5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 그는 꽤 많은 작품들을 스스로 쓰고 감독하고 제작했기 때문에 제작비를 최적화하는 노하우를 갖고 있었으며, 〈동주〉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최적화된 제작 덕분이 라고 말했다. 〈동주〉라는 영화가 더 가치 있게 다가오는 것은 이 영화 콘텐츠의 성공으로 인해 이제 우리도 5억 원의 규모로 대박은 아니어도 중박을 낼 수 있는 영화들이 가능할 수 있는 제작과 투자 시스템을 대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연식 감독이 말하는 이른바‘중박 영화론’이 영화콘텐츠의 다양성 차원에서도 또 투자 대비 수익의 관점에서도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연출을 맡은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든 것에 대해 “컬러는 윤동주를 현재로 불러오는 듯한 느낌인 반면 흑백은 현재의 우리가 그시대로 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윤동주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맞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랬다. 영화 속에서 윤동주는 그냥 거기에 있었고 현재의 우리가 냉혹했던 그 시대, 그에게로 가고 있었다.

영화 상영 내내 독백처럼 읊조려지는 그의 시편은 한 권의 흑백시집처럼 펼쳐졌으며, 식민지 청년 시인 동주(강하늘)는 태어나서부터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잎새에 이는 미세한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 에큐메니컬ecumenical 세계를 지향했던 그의 일대기가 스크린을 통해 재조명된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윤동주는 당대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으나 그의 시는 대대손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오래오래 남아있다. 그러나 송몽규는 일제강점기에 열심히 앞장서 싸웠으나 결국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사람”이 라 안타까웠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를 보고나면 ‘몽규’가 존재 하지 않는 윤동주는 더이상 상상할 수가 없게 된다. 시(문학)가 우수한 영상콘텐츠를 통해 재해석되고 확장되어지는 쾌거로 볼 수 있다.

존재의 자유와 평등 세상을 지향한 시민 윤동주

윤동주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북간도(명동촌)는 신학문과 기독 교를 받아들인 독립운동의 기지였다. 함경도 유학자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새 민족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을 쏟으며, 집단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놀라운 삶의 변화를 체험한 곳이다. 처음에는 순연한 유학문화를 지닌 마을이었는데 그런 문화는 1909년 명동마을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의식의 근본부터 바뀌는 전혀 다른 문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시기가 20년간 계속된 뒤 1929년부터 명동마을이 공산주의에 침윤된 시기가 시작되었다. 〈동주〉 영화는 이 시기 부터 시작하여 1945년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를 보여준다. 삶자체를 본질에서부터 다른 모습으로 전환시켜버린 이 현상은 “시간적으 로는 시대상황이 직접 잉태하여 빚어낸 것이었고, 공간적으로는 외국 땅에 뿌리를 내린, 늘 광복을 꿈꾸는 망국인으로서의 위상이 일구어낸 것”(송우혜, 『윤동주 평전』)이다.

윤동주에게 “북간도는 바로 ‘기독교공동체’였고, 그곳은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된 삶의 낭떠러지에서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건들’을 가능하게 한 공간”(김치성, 『윤동주 시 연구』)이다. 새로운 문화의 정체성이 시작되는 ‘제3의 공간’이요, 가능성을 지닌 공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했던 특수한 문화(북간도 명동) 속에서 성장한 그는 원천적으로 존재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할 수 밖에 없는 근대 시민이 었던 것이다.

아름답고 쓸쓸한 모든 이의 이름 〈동주〉

국제법에 대강 끼워맞춰서 자발적인 듯 진술서를 받으면 문명이고, 그런 것조차 모르는 무지한 조선인은 야만이라고, 고등형사 특구(김인우)의 취조를 받는 그 순간에도 “주어진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동주(강하늘) 의 시정신은 흔들리지 않았고 변함이 없다. 몽규(박정민)도 마찬가지다.

두 청년은 미완이었지만 평생을 자신이 뜻하는 길로 다가가고자 애썼다.

그들의 꼿꼿하고 순결한 청년 정신이 2030 세대들에게까지 다시 살아나, 현재의 우리가 더 좋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비춰지는 동주 캐릭터는 몽규 캐릭터에 비해 수동적이다. 몽규는 영화 내내 ‘동주’를 호명한다. 서로에게 흠집이 되는 날선 대화를 나눈 직후에도,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도, 몽규는 동주가 상심 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인물이다.

“시를 쓰기만 하면 뭘 하니 발표를 해야지.” 그는 시를 꽁꽁 매어두는 동주에게 직접 잡지를 만들어 발표하자고 제안한다. 이처럼 북간도에서 함께 나고 자란 동갑내기 사촌지간이지만 몽규와 동주는 서로 다르다. 하지만 경쟁하되 선을 넘지 않으면서 서로의 미덕과 다양성을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질투를 느낄 만큼 이른 나이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몽규는 산문의 힘으로 현실의 벽을 이끌어내는 것을 중요시한다. 반면 동주는 시, 그 영혼의 울림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중요시한다. 시집도 내지 않고, 등단도 하지 않았지만 몽규에게 동주는 늘 자랑스러운 ‘윤 시인’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강하늘(동주 역)이 부르는 영화 ost 〈자화상〉이 담담히 울러퍼지면, 몽규에 대한 이준익 감독의 끝없는 애정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왜 〈동주〉라고 붙였는지 알 것 같다. 극장을 빠져 나오 면, 우리는 윤동주 시인, 송몽규 문사(투사)가 아니라 동주, 몽규, 이렇게 그들의 이름을 친구처럼 부르게 된다. 아득한 북간도 용정 땅에 잠들어 있는 그들이 가깝게 느껴진다. 〈동주〉는 시인 윤동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동주야, 하고 부르던 몽규의 목소리와 그 시절을 함께 고민한 벗들과 영원히 사라질 뻔한 그의 시집을 출간해 준, 잊혀져간 모든 이들의 아름답고 쓸쓸한 이름인 것이다. 이처럼 〈동주〉에는 스크린에 비춰진 그 흑백색의 논리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내면의 숭고함을 읽어내라는 일침이 담겨있다.

북간도 공동체에서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그렇게 우리는 북간도가 아닌‘지금 여기’에서 동주를 부르며, 광장의 ‘촛불’로까지 번지는 청춘의 아름다운 정신을 추억하고 있다.
유성호 교수는 “윤동주는 지금의 중국 땅에서 태어나 지금의 북한(숭실 중학)과 남한(연희전문)에서 공부하고 일본(릿쿄대학, 도시샤대학)에서 유학하였으니 그야말로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공간 편력”을 가지고 있고 “한중일에 시비가 세워진 유일한 시인”이며, “윤동주를 통해 ‘북간도-평양-서울-도쿄-교토’라는 공간 확장”의 기억 단위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윤동주의 현재성이 이러한 “동아시아적 공간 확장성”에서 온다는 그는 “윤동주 시가 ‘일본어-조선어’의 갈등을 넘어 조선어의 존재증명에 바쳐진 결과”라고 밝혔다.

그래서일까. 며칠 전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도시샤 대학을 방문했을 때,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이 윤동주 시비에 꽃을 헌화하는 모습은 과히 감동적이었다. 송우혜 작가는 “영화 〈동주〉를 본뒤 윤동주 관련 서적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는 편지를 여러 통 받았다”면서 “콘텐츠의 수준과 상관없이 윤동주라는 관문에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선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특히 ‘윤동주 콘텐츠’가 다양해지면서 대중과 접점이 점차 넓어지고 있는 올해는 그의 탄생 100년을 맞는 해이다. 극장가는 1년 전 개봉했던 영화 〈동주〉의 재개봉을 준비하고, 일본, 중국뿐만 아니라 뉴욕과 런던, 해외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도 우리 가슴 한 켠 남아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된 시인을 다시 호명한다. 이처럼 영화 〈동주〉는 우수한 콘텐츠로 살아남아, 우리 사회의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중요한 문화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콘텐츠의 ‘동주’ 현상이 세계 문화산업으로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영화 〈동주〉를 초국적 문화 수용으로서의 텍스트이자 글로벌 문화와 로컬 문화가 서로 만나 공명하고 통섭해나가는 노력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존재의 화해와 일치를, 자유와 평등 세상을 지향했던 영화 〈동주〉가 북간도를 넘어, 한중일 경계를 넘어, 이제 드넓은 세계 속의 문화콘텐츠로 뻗어나가길 기대해 본다.

 


손정순 고려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동해와 만나는 여섯 번째 길』, 저서로 『흰 그늘의 미학, 김지하 서정시 』 『목월 詩의 현대성』『문화예술 현장에서 통섭적 글쓰기』 등이 있음. 《쿨투라》 편집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