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철 시인의 군산통신 5] 봄바람, 산 그리고 호수
[강형철 시인의 군산통신 5] 봄바람, 산 그리고 호수
  • 강형철(시인, 사)신동엽기념사업회 이사장)
  • 승인 2021.05.0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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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둘레길을 걷다

  길거리를 가득 채웠던 벚꽃이 지고 자동차 바퀴에 으깨지는 풍경을 보고 있던 산기슭의 산벚나무들은 그제야 감추었던 꽃잎을 나무 겨드랑이 아래로 슬슬 펴기 시작한다. 바로 그 풍경을 보고 있던 중턱의 산벚도 하는 수 없이 몽실몽실 꽃을 펴 야트막한 정상이지만 산꼭대기 쪽으로 노인네 산행하듯 올라간다. 더불어 어수선한 봄 산이 본격적으로 몸을 풀며 숨겨 두었던 초록을 여러 이름의 나뭇가지 끝에 조심조심 풀며 봄으로 간다.

  이때가 봄이다. 지난겨울을 지내오는 동안 버석버석하게 마른 산의 억새들도 아랫도리 쪽에서 올라오는 푸른 잎들에게 천천히 자리를 양보하며 하늘거리고 상수리, 모간주나무, 소나무 참나무 등등의 나무들도 허리를 펴고 굳은 삭신들을 펴기 시작한다. 그래서 봄 산은 흉흉하다. 다시 신생의 자리로 옮아가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해변가를 돌다가 멀리 보이는 동네의 설림산으로 오늘은 나들이를 간다. 예전에 설림산을 가는 일은 ‘학교 가는 길’에 거치는 한 과정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몸을 위해 가는 이른바 운동의 일환이다. 설림산 석치산 점방산 장계산 등등의 이름이 지금은 익숙해져있지만 예전에는 그냥 학교 가는 길이었다. 그러기에 길의 끝, 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에 있는 은적사라는 오래된 절도 여름이면 비바람에 떨어진 감을 줍는 장소였을 뿐이었다. 거기에 있는 4, 5백년 지난 팽나무 또한 숨바꼭질 때 몸을 숨기는 놀이터였을 뿐이다.

  실제로 이른바 ‘산책을 간다’는 말을 하면서 은적사를 거쳐 설림산 산길을 걷는 일은 이제 내게는 쉽지 않다. 예전에는 산속 샛길로 올라갔던 산길이 이제는 넓지막한 길로 바뀌었고 가파르던 경사도 많이 낮아 졌지만 오르막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우선 부담감이있고 실제로 걷는 일도 어렵기 때문이다. 예전 하굣길에 언덕으로 불어오는 마파람에 몸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몸을 돌려 간신히 내려올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어른이 되면서 커진 키보다 비만의 배가 자체적으로 일으키는 저항감이 더욱 커진 탓이기도 할 것이다.

  산을 오르니 예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봄이면 어김없이 소풍의 목적지였던 산 중턱의 넓지막한 빈 터에 사람들이 복작댄다. 이곳은 이제 체육공원이 되었다. 에어로빅 강사가 새벽에는 강습을 하고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양한 체육시설을 이용한다. 하체근력운동기구, 복부운동기구, 허리운동기구, 평행봉 미끄럼틀 링 등 각종의 운동기구들이 넓게 조성된 공원을 양분하며 설치되어 있고 자신에게 맞는 운동기구를 사용하여 각자 여러 부위의 몸을 단련하고 있다.

  나는 벚꽃이 터널을 이룬 곳으로 계속 걸어간다. 예전에는 일을 하면서 몸을 부리던 사람들이 얼마간 생긴 여유로운 삶의 자락에 도달하여 의무적으로 움직이던 몸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 이른바 우리가 예전의 삶과 지금의 삶이 달라진 자리겠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포장된 도로를 벗어난 샛길에는 앞에 자신들의 이름표를 단 꽃나무나 시청에서 걸어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드디어 예전에는 수원지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월명호수라고 개명된 이름의 호숫가에 닿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바지를 걷고 건너던 징검다릿길이 나무데크 길(습지 인도교)로 바뀌었다. 사진 촬영하기 좋은 곳이라는 팻말 옆에서 나는 전체 호수를 본다. 데크길 아래로는 잉어가 입을 뻐끔거리며 떼 지어 몰려다니고 연잎이 듬성듬성 호수 속에서 솟아 나와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꽃을 피우리라.

  데크 길 옆에 왕버들이란 이름표를 달고 선 나무들의 군락지가 있다. 그 나무 중에는 뿌리가 하늘로 드러난 커다란 나무둥치가 누워있는데, 그 누운 나무 등걸에서 또 왕버들이 위용을 자랑하며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어머니가 치매로 판정되고 3년여 시간이 지난 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 가까스로 넘어 도달했던 이곳에서 발견했던 풍경이니 벌써 십 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런데도 여전하다. 나의 어머니는 가슴 속에만 남았는데 저 왕버들은 누운 자리에서 새로운 새끼들을 키우고 있다. 왕버들은 수령도 길다. 김제의 봉남면에는 수령이 300년을 넘어 천연기념물 296호로 지정되어 있다.(높이 16미터, 밑동 부분 6.9미터) 산길을 걸어 300여 미터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인근의 나운동 사람들에게는 산책길 입구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그곳이 중학교, 고등학교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 길가에서 남의 밭에서 자라던 오이도 훔쳐 먹었고 무슨 무슨 성씨의 제실이 있어 드나들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고 이른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황토 흙이 묻어나는 입구에는 배추 나무, 그리고 철에 따라 시금치, 돌미나리 등등을 늘어놓고 산책길에 나선 사람들에게 파는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다.

  나는 서둘러 더 빠른 속도로 산길을 간다. 오르막길을 가는 도중 소나무 재선충으로 벌목이 된 자리에 5, 6년 전에 심은 편백나무나 단풍나무 등등이 이제 제법 의젓한 자세로 서 있다. 예전의 길은 소나무가 울창한 길이었고, 학교에 가기 싫은 친구들은 그곳에서 낮잠도 자고 무리지어 놀기도 했다. 그 길 어디쯤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면서 자살한 사람 혹은 사고로 죽은 사람을 가마니로 덮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월명호수는 쉽게 설명하면 영어의 T자 모양으로 돼있다. 그리고 T자의 한끝에는 군산청소년수련원이 세워져 있다. 그곳을 위탁경영하며 군산 YMCA의 총장으로 재직하던 한 지인이 이곳이야말로 생태치유 최적의 장소라며 이곳을 군산의 명소로 반드시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었다. 이곳엔 천혜의 숲길이 있고 호수 주변 길 네 곳에 편백나무 휴게 공간 숲이 있다. 지금은 ‘구불길’로 이름 지어진 둘레길은 3.1킬로미터로 한 시간 정도에 돌아볼 수 있어 심신 힐링의 최적의 장소라고 했다. 그러한 기획의 일환인지 6, 70대 정도의 차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시설이 돼있고 곳곳에 모정이 산기슭에 세워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제 다른 쪽 호수의 제방이 있는 곳으로 간다. 제방 가운데 서면 저 멀리로 금강이 서해바다로 잦아들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금강 하구로 밀려든 토사가 섬을 이룬 금란도가 보이고 호수 안쪽으로는 수원지의 수위를 측정하던 탑이 단정하게 서 있다. 그 앞에는 간략한 표지판에 ‘이 호수의 제방이 1912년 착공하여 1915년 완성되었으며 하루 300명의 인부가 동원되고 연 인원 10만 명이 동원되어 축조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 이 제방과 수문 측정탑, 그리고 수문은 근대초기산업시설물로 지역사 및 건축기술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국가등록문화재 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방 아래로는 청소년 체력단련장이 서있으나 그곳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봄철 유원지로 명성이 높았다. 봄날 벚꽃이 만발했을 때나 바쁜 일을 끝낸 사람들이 몰려와 풍장을 치면서 흥을 내던 곳이었다.

  문득 1912년이면 일본제국주의에 식민지로 전락했던 때란 생각을 한다. 그들이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벼를 수탈하기 위해 군산에 들어왔었고 그들에게 공급할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해 이 제방이 만들어졌으며 야트막한 산들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을 담아내면서 수원지가 되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10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은 진안 용담댐에서 물을 공급받으면서 1차적인 목적을 달성하며 폐기되었으나 이제 이곳은 방문객들의 체력단련과 산책을 위한 길로 탈바꿈하여 군산 둘레길의 주요 코스가 된 것이다.

  세월이 무서운가 아니면 사람들의 굳센 삶의 의지와 역정, 그리고 좀 더 잘 살아보자는 꿈이 더 큰 것인가? 모든 것은 생성되면 변화하고 발전하며 끝내 소멸하기 마련이다. 갑자기 훅 다가온 생각 사이로 삽상한 바람이 분다. 봄바람이다. 이 바람이 Covid-19를 몰아내고 우리들 마음에 생기를 북돋아주는 가장큰 봄바람이길…….

 

 


강형철
1955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숭실대 철학과. 동대학원에서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5년 『민중시』 2집에 『해망동 일기』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해망동 일기』『야트막한 사랑』『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환생』과 평론집으로 『시인의 길 사람의 길』『발효의 시학』 등이 있다. '5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사)신동엽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숭의여대 미디어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다 정년하였으며, 현재 고향 군산에서 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쿨투라》 2021년 5월호(통권 8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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