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현대서화書畵, 여비여동如飛如動: 경주 솔거미술관과 소산 박대성 화가
[미술관 탐방] 현대서화書畵, 여비여동如飛如動: 경주 솔거미술관과 소산 박대성 화가
  • 김명해(화가, 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1.05.02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주로 가는 도로 주변은 온통 봄꽃들의 향연이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복사꽃… 흰꽃, 노란꽃, 분홍꽃, 연두빛 새싹까지 봄 향기가 물씬 풍긴다.

  특히 경주는 신라문화와 역사 도시이기도 하지만 진해나 여의도 윤중로 못지않게 벚꽃으로도 유명한 도시이다. 보문단지, 장군로, 대릉원, 문무로, 반월성에 약 2만3000그루의 벚나무가 심겨 있어 차를 타고 경주 어디를 다녀도 눈부신 벚꽃 길을 만날 수 있다. 매년 벚꽃 필 무렵이면 벚꽃마라톤대회를 개최하여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물론 작년부터 코로나로 축제는 취소되었지만, 벚꽃을 구경하려는 상춘객은 어디든 몰리기 마련이다.

  만개한 벚꽃과 미술작품을 호젓하게 감상하고, 편하고 여유있게 사진 찍기 위해 주말을 피해 주중을 택했다. 그런데 꽃봉오리만 맺혀 꽃이 피기 직전의 상태이다. 우리 동네 벚꽃이 만개해서 당연히 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아쉽다. 하지만 맑은 봄 날씨에 경주엑스포공원 내에 위치한 솔거미술관까지의 산책길은 상큼하고 아름다웠다. 매표소에서 경주타워(황룡사 9층 목탑을 형상화해 만든 전망대)까지는 아기자기한 작은 꽃들이 심겨 있고, 타워에서 미술관으로 통하는 오솔길계단은 새싹들이 나뭇가지 틈을 비집고 나와 올망졸망 앉아있다. 미술관 입구까지 연결된 가로수 길은 벚나무들로 가득하다. 특히 미술관과 나란히 줄을 맞추고 있는 벚나무는 둥치만 봐도 꽤 오랫동안 서 있었던 왕벚나무 같다.

  천년고도 경주에 자리한 솔거미술관은 한국화의 거장 소산 박대성(1945- ) 화가가 자신의 작품 830여 점을 미술관에 기증하면서 솔거미술관 건립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신라 시대 화가 솔거(率居)의 이름을 따서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지원하여 2015년 8월에 개관한 공립미술관이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원 내 아평지 연못가에 세워진 솔거미술관은 빈자(貧者)의 미학을 실천하는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로 미니멀리즘(Minimalism) 예술의 건축양식이 느껴지고 주변 자연경관과도 잘 어울리게 건립되어있다. 특히 제3전시실의 통유리창은 자연을 한 폭의 작품으로 승화하여 미술관 건축의 백미로 꼽히고 있으며, 인증샷의 명소로 널리 알려져 주말이면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진풍경을 볼 수 있다.

  현재 솔거미술관은 〈서화(書畵), 조응(調應)하다〉 전으로 소산 박대성 화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기획전시하고 있다. 한국회화의 전통적인 수학법과 양식을 재조명하고, 박대성 화가의 날카롭고 묵직한 필법으로 그려낸 신작으로 공간을 구성하여 한국 서화를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소개하고 알리는 것을 주안점으로 기획하였다고 한다. 이번 미술관 탐방은 전시실마다 다르게 구성된 기획전시를 바탕으로 박대성 화가의 예술세계와 미술 철학을 살펴보고 알아가면서 전개하고자 한다.

미술관 통로
미술관 통로

  미술관 입구에서 전시실로 향하는 첫 관문은 아래로 뻗어 있는 긴 계단이다.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내려오면 이곳은 지상 1층으로 전시의 시작인 곳이다. 미술관 측은 관람객들에게 서화(書畵)를 기초부터 알아갈 수 있도록 이해를 돕기 위해 전시실 1관은 영상관으로, 2관은 자료실로 만들었다고 한다. 1관 영상관에서 상영되는 미디어아트, 필법(筆法)은 소산의 서화 작품이 내재한 정서와 한국화의 기술적인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고. 2관의 자료실은 한반도에서 서화가 꽃피우기 시작한 역사가 연대별로 나열되어있어 관람객들이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있다.

미인도(미술관 제공)
부처마을(미술관 제공)

  전시실 4관은 박대성 화가가 자신만의 서화를 그려내기 위하여 수행되는 통일신라시대의 명필가인 지서 김생과 조선시대의 문필가인 추사 김정희의 글과 그림을 임서(臨書)하고 임모(臨模)한 작품들을 함께 전시하였다. 특히 4관은 길쭉한 직사각형 구조의 전시실로, 앞 벽면에서 길게 드리워진 두루마리에 임서하여 쓴 서체에서 소산의 끊임없는 수행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고 멋진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예술가의 진정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작품에서 느꼈듯이 박대성 화가는 ‘문인화가’ 또는 ‘서화(書畵)가’라 칭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문인화가 서화동원(글을 쓰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 근본이 같다)과 시서화일체(시와 글씨와 그림은 원래 동일한 몸체)의 사상에 근거를 둔 회화영역이고, 작품이나 영상을 통해 보았듯이 소산은 끊임없는 공부와 서체를 연습하고 연구하고 득도(得道)하는 마음으로 글씨가 가지는 한국적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현대수묵화로 창출하면서 문인화의 소양을 갖추고 그 경지에 이른 화가이기 때문이다.

삼릉비경(미술관 제공)

  “내 지혜와 정신을 넣는데 가장 밑받침이 된 것이 바로 이가염(1907~1989)이 말한 ‘글씨와 먹을 중요시하라’는 이야기였다. 글을 잘 쓰면 그림도 잘 그리게 되고 그림이 되면 글도 잘되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이 가능하다.”
  - 소산 박대성 개인전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 인터뷰 중에서, 《아트인포》 2018년 2월 9일

전시실 3관
전시실 3관

  전시실 3관은 소산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서(書)에 중심을 두고 마련된 전시라고 한다. 1990년 이후 경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부터 연마한 ‘서(書)’는 글씨의 선에 주목해 '글'이라기보다는 사물의 형태와 의미를 나타내는 '디자인'으로 접근하여 필획을 회화에 적용함으로써 박대성만의 새로운 한국화가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필획을 그림에 사용하면서부터 선이 단순해지고 절제된 표현으로 접어듦에 따라 먹이 가지는 정신적인 면이 강조되었고 먹의 농담만으로 화면의 효과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손목을 움직이지 않고 팔뚝을 움직이면서 내리긋는 필력, 기운(氣韻)을 자아내는 필법이다.
  게다가 소산은 오랫동안 글씨 쓰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예에서 나오는 필력 즉 운필(運筆)의 힘, 그것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힘, 이것은 소산 예술의 특성을 이룬다.
  -소산 화업 50주년 기념전 《솔거묵향》 전시기획 중에서, 윤범모, 2016년

  3관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작품이 〈옥룡암〉이다. 옥룡암은 경주 탑골에 있는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과 탑을 묘사한 이 작품은 갈필(渴筆)과 농묵(濃墨)으로 바위를 웅장하게 그렸고 바위에 새겨진 탑과 불상들은 밝은 담채(淡彩)로 형체를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담백하게 표현되어있다. 선적인 요소로 산의 형상을 유연하게 표현한 〈금수강산〉과 물고기가 되어 오목렌즈로 바라본 듯 금강산의 풍광을 동그랗게 그려 넣은 〈금강화개〉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금강화개〉는 필자가 시기별로 다르게 표현된 작품을 여럿 보았는데, 마치 연꽃 봉오리가 장엄하고 아름다운 금강산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외에 바깥 풍경과 통하는 통유리창이 있는 3관에는 부채형지(紙)에 그린 〈자주빛 목련〉 〈고양이〉 〈오리〉 〈옥룡암〉 긴 족자에 표현한 〈난초〉 〈연꽃〉 〈가마우지〉와 문자를 배경으로 자기(瓷器)를 그린 〈고미(古美)〉 등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4관
전시실 4관

  전시실 5관에는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의 문화유산과 풍광을 화면에 담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분황사 탑을 그린 〈고분〉, 경주 남산자락의 풍경을 담아낸 〈삼릉비경〉, 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춤사위를 펼친 버드나무 가지를 그린 〈유풍〉, 석상이 모셔진 〈부처마을〉, 5명의 각기 다른 스타일의 여인 〈미인도〉 등 대작 위주로 전시되어 있다. 소산은 경주 남산자락에서 작업실을 마련하여 석굴암, 불국사, 분황사 탑, 남산 마애불, 삼체 석불, 포석정 등 신라의 대표적 문화유산을 주제로 30년 가까이 그려오고 있어 경주와는 남다른 인연을 맺고 계신 분이셨다.

전시실 5관
전시실 5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 고민하다가 찾은 곳이 바로 경주였다. 창작의 원혼들이 나를 그곳으로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싶다. 내게 경주는 창작의 도시 그 자체이다.”
  -「사실과 추상을 넘나드는 수묵의 경지를 보다」 중에서, 《중앙일보》 2018년 2월

  개인적 소견이지만 소산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우선 작품 크기에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76세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둘째, 작품마다 특징적으로 다가오는 거침없고 자신감 있게 그은 강한 필선과 자신의 혼을 담아 오랫동안 연마하여 체득한 예술의 경지를 관람객에게 발산하고자 하는 마음이 보인다. 셋째, 작품 속에 둥근 달이나 광채가 자주 등장하는데, 물론 음영의 효과를 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어둠이나 역경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로 느껴진다. 또한 먹이 가지고 있는 단조로운 색채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소재의 형태에만 머무르지 않고 단순 간결하게 처리하면서도 주변 배경과 자연스럽게 동화되게 표현한 점이 눈에 띈다. 당(唐)나라 화가 장언원은 먹으로 오색을 능숙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계를 득의(得意)라고 했다. 소산 박대성 화가는 충분히 득의를 터득하신 분이 분명하다.

  색의 귀향, 그것의 궁극적 지향은 먹색이다. 먹 색깔은 살아 꿈틀거린다. 하여 먹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색채 난무 시대에 소산의 먹그림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먹의 정신성 때문에 그럴 것이다. 먹의 향연, 이는 소산 회화의 원형이다.
  「신라정신을 현대화한 수묵의 달인」 중, 《월간조선》 2009년 11월

  조선말기까지 우리나라도 전통회화를 “서화(書畵)”라 불렀다. 서화는 인간의 내면에 형성된 시적인 이미지를 그림과 글로 나타내는 것으로 그림에 글을 곁들이거나 글씨 문장에 그림을 곁들이는 양식으로, 오늘날에는 “서화 양식”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분들이 많지 않다. 어찌 보면 전통회화의 명맥이 끊어질 위태위태한 위기에 처한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 소산 박대성 화가는 전통문화를 받아들여 수용하고, 새롭게 재해석하여 현대 수묵화로 발전시키고, 작품 표현에 있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획을 구사하며, 서예와 그림을 접목하면서 작품 소재를 산수풍경에만 안주하지 않고 주변의 사물이나 늘 접하는 생명체까지 다양하게 묘사하며, 깨달음에 의한 자신의 내면세계를 회화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rgger)는 “심경이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더욱 미적 향수에 다다를 수 있다”고 했다. 박대성 화가야말로 전통을 바탕으로 오랫동안의 서예와 그림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늘 공부하고, 새롭게 시도하고, 자연과 함께하면서 자유롭게 작품에 임하여 확고한 깨달음으로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진정한 예술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박대성 화가는 전통적인 소재와 기법을 통해 현시대를 드러내고 한국화 현대화에 이바지해온 점과 한국화 실경 산수를 독보적인 화풍으로 이룩한 점 등을 높이 평가받아 ‘2020년 문화예술발전 유공자 수여식’에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작품 감상하고 사진 찍느라 정신을 놓고 있을 즈음, 전시는 끝나고 처음 들어왔던 로비(lobby)가 나왔다. 전시실을 둘러보느라 미술관 내부 통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다시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긴 복도와 통로들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지그재그로 연결되어 있어 처음 입구로 되돌아 나온다. 마치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어 숨바꼭질하듯 전시실을 찾는 재미가 있으며, 휠체어를 이용하시는 분들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관람객들을 고려한 설계가 돋보이는 경주솔거미술관이다. 그런데 미술관에 입장하려면 경주엑스포공원 전체 입장료를 같이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 좀 아쉽긴 하다.

  벚꽃 계절이면 항상 울려 퍼지는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꽃은 만개하지 않았지만, 이 노래를 들으면서 봄 분위기에 취하고 싶다.

 


출처
경주솔거미술관: https://www.gjsam.or.kr
아트인포: http://www.artinfo.kr
월간조선: http://monthly.chosun.com
중앙일보: https://joongang.joins.com
경주솔거미술관특별기획 《솔거묵향》
(재)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6

* 《쿨투라》 2021년 5월호(통권 83호)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