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도어 라이프가 탄생시킨 송태영의 뮤지션 생활: 《피할 수 없는 이별》
[INTERVIEW] 인도어 라이프가 탄생시킨 송태영의 뮤지션 생활: 《피할 수 없는 이별》
  • 손희(본지 에디터)
  • 승인 2021.05.05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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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화된 ‘코로나블루’로 집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인도어(indoor) 라이프’가 정착됐다. ‘코로나블루’가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우울감을 나타내는 신조어임에도 불구하고, 밀레니얼 세대를 비롯한 일부 예술가들에게는 무궁무진한 하루의 시작이다. 집이라는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자발적 선택을 중시하는 인도어 라이프는 새 시대가 가져온 삶의 변화이기도 하다.

  여기 인도어 라이프로 잊혀졌던 자신의 모습을 되찾으며 새 음반을 낸 홈족(Home族) 가수가 있다. 인도어 공간에서 라이브를 즐기고 있는 그를 만나러 문화·창의 도시 부천에 자리한 영뮤직홀을 찾았다.

  고교시절 아이돌이었던 송태영 가수

  손희(이하 손) 안녕하세요? 제게는 송태영 가수님의 이름이 낯선데요.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송태영(이하 송) 먼 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40대 중반에 첫 싱글앨범 《추억의 을왕리》(2008년)를 내고, 코로나블루로 방구석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이번에 다시 4집 《피할 수 없는 이별》을 내게 된 송태영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동안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잘 모르실 텐데요. 좋은 문화잡지의 지면을 통해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네 그럼 송태영 가수님을 하나씩 조명해 보겠습니다.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는지요?

  제가 처음 음악을 시작한 건 고교 2학년 때입니다. 당시 친구들과 ‘LIVE’라는 하드록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습니다. 제가 보컬을 맡았었는데 지나가다 우리가 연습하는 소리를 듣고 한 나이든 신사분이 찾아와 공연을 제안해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산 모 여고 교장선생님이셨어요. 덕분에 여고 강당에서 첫 공연도 하게되고 우리 팀이 지역신문에 실력 있는 아마추어 밴드로 소개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아 고교시절에 이미 아이돌이셨군요. 그렇다면 그 인기를 몰아 대학에서도 음악을 전공하셨는지요?

   아닙니다. 저 미대 공예과 나왔어요.(웃음) 잘 아시겠지만, 당시에는 실용음악과가 거의 없어서 못 갔어요. 제가 알기로는 그때 당시에 전국에 서울예대 하나밖에 없었는데 경쟁률이 30:1 정도로 높았어요. 30명 정도를 뽑는데 지원자가 1,000명이나 몰렸어요. 그래서 이건 안 되겠다 생각했죠. 사실은 그냥 음대를 가려다가 클래식은 저랑 안 맞아서 제가 할 수 있는 편한 곳으로 선택하다보니 그림을 그리게 됐는데…(웃음) 몇 개월 하다보니까 되더라고요? 학원 원장님의 추천으로 미대에 진학하게 된거예요.

  근데 중요한 건 뭐냐면, 제가 운동을 무지하게 좋아해요. 새벽에라도 친구들이 공 차러 가자 그러면 새벽에도 뛰쳐나가서 축구하고 그랬어요. 운동을 중독 비슷하게 좋아했어요. 대학에 갔을 때도 친구들이 제가 체육과인줄 알았는데 미대라고 하니 의아하게 생각했죠. 미대를 가서 그림은 안 그리고, 공부도 안 하고, 음악다방이나 다니고 그랬죠. 솔직히 그때 동네에서 인기가 좀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대학 시절에는 동아리 활동과 밴드 활동 등을 통해 음악과의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음악다방과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며 노래도 하고, 통기타도 치고, 색소폰도 불고 다방면으로 활동했지요. 유명가수보다 스케줄은 더 바빴던 것 같아요.(웃음) 군대제대 후 서울로 올라와 서울 종로 2가에 있던 포크 음악 감상실 ‘쉘부르’ 팀의 막내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졸업 후 건설회사에 취직하며 노래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40대에 운명처럼 다시 노래를 시작하다

  정말 멋진 대학생활을 보내셨네요. 졸업 후 음악과는 동떨어진 건설회사에 취직하셨는데 어떻게 다시 음악을 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건설회사에 취직하고 일상이 바빠 음악을 다시 할 생각을 못 하고 있었는데, 40대 중반 즈음에 몸이 아파서 쉬게 되면서 운명처럼 다시 노래가 나를 끌어당겼어요. 건설회사에서 일하며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위궤양이 심하게 왔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시간이 많아지니 그제야 내 삶을 돌아보게 됐고, 학창시절 통기타가수로 활동하고 아르바이트 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됐지요. 그러면서 노래를 다시 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마침 아는 선배가 연습실을 하고 있어서 가서 노래 연습을 하게 됐고, 싱글 음반 작업으로까지 이어져 2008년에 1집 싱글앨범 《추억의 을왕리》를 발매하게 됐습니다. 다시 노래를 하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내가 정말 다시 살아 숨쉬는 설렘을 느꼈습니다.

  손 그럼 1집 이후 주욱 순탄하게 음악생활을 하게 되신 건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노래가 생각만큼 안 되어서 힘들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프면서, 내 시간을 갖게 되면서 대학 졸업 후 접었던 가수의 꿈을 다시 꺼내 드는 것까지는 순조로웠지만, 20년 가까이 쉬었던 노래를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맘처럼 쉽지 않았죠. 예전보다 키를 내려서 불러도 과거와 같은 기량이 안 나와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한심하게 생각되어 자책도 많이 했었습니다. 다행히 꾸준한 연습으로 과거의 기량을 찾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도 기특하게(?) 생각하는 것은 노래를 다시 시작한 40대 중반 이후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연습을 거르지 않고 꾸준히 계속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심장병어린이 재단에서 진행하는 모금 공연에도 꾸준히 참여하여 개인적인 행복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인도어 라이프가 선물한 4집 앨범

  최근 발매한 4집 앨범은 전 곡을 직접 작사·작곡 레코딩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악기 연주자들은 있지만 저는 혼자 다해요. 편곡도 물론이고요.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덕분에 4집이 나왔어요. 인도어 라이프 생활이 길어지다보니 시간이 많이 남았죠. 잘됐다 하고. 겸사겸사 그동안 써놓은 곡을 정리해서 낸 거죠. 특히 4집은 곡 작업을 직접 다해서 다른 앨범보다 더 뜻깊게 느껴지는 앨범 입니다. 1~3집의 경우 신귀복(〈얼굴〉 작곡), SB 김상배(〈날이 갈수록〉 작곡), 정풍송(〈허공〉 작곡) 등 여러 작곡가의 곡과 자작곡이 섞여 있었는데, 4집 앨범은 나만의 스타일을 더 담고 싶어 전체 자작곡으로 앨범을 채웠습니다. 화려한 반주의 곡 대신 서정적인 통기타 음률의 곡들로 채워 보다 담백하게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4집 타이틀곡은 〈피할 수 없는 이별〉인데요. 이 곡에 대한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이곡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마음이 아프더라도 보내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별의 아픔을 그린 〈잊어보려고〉, 젊은 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캠퍼스 연가〉는 젊었을 때 작사해놓았던 노래입니다. 마음 한켠에 간직하고 있던 곡을 대중들에게 내놓게 되어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낍니다.

  근데 노래가 전체적으로 좀 슬프고 어두워요. 무슨 사연라도…

  제 목소리가 좀 슬픈 목소리에요. 그래서 그쪽으로 갈수밖에 없죠. 흐름이 밝은 노래도 몇 곡 발표한 건 있어요. 제가 원래 마이너 노래를 좋아해서… 제 작업 공간에 오셨으니 ‘인도어 라이브 공연’ 한번 해볼까요? (기타 하나로 애창곡과 4집 타이틀곡을 즉석에서 라이브로 들려주었다.)

  대중들과 소통하며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와 감동입니다. 이렇게 가까이서 혼자만을 위한 라이브 공연은 처음입니다. 대단한 실력과 내공을 갖춘 송태영이라는 가수를 오래 기억하게 할 멋진 라이브입니다. 어떨 때는 슬픈 노래가 우리 마음에 더 많은 안식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기도 하지요. 노래 속에 내재된 깊은 그늘이 감성을 스르르 움직이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제 노래를 좋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래만큼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30대 때는 일을 선택했고, 40대 중반부터는 일과 노래를 병행했다면, 50대 후반에 들어선 지금은 가수로서의 성취를 위해 더 공을 들일 계획입니다. 3집까지는 홍보도 하지 않고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앨범이었다면, 4집 앨범부터는 대중들과 소통하며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혹자는 너무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하는데,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음악은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고 혹여 한 사람이라도 공감하고 도전하는 이가 있다면, 동료로서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내 비루한 이야기가, 나의 4집 앨범이 젊은 시절 품었던 꿈에 다시 도전하려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생은 도전할 수 있기에 아름다운 것 아닐까요? 100세 시대니까 40~50대에 시작해도 빠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나이 때문에 새로운 도전에 망설이시는 분이 있다면 “나이에 절대 구애받지 말고 용기 내어 자신의 꿈에 도전하라”고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조금 쑥스러운데…저는 시를 써서 가사를 뽑아요. 습작들을 정리해서 시집을 한권 내고 싶어요.

  아 대박!!(웃음) 원래 시가 노래가 되고 노래가 시가되기도 하죠. 인도어 라이프 시대가 가수님의 첫 시집도 탄생시키길 기대하겠습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영화 〈실미도〉 영화음악 제작에 참여하기도 한 송태영 가수는 쉰을 넘긴 나이에도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해 정진해가고 있다. 현재 건설업(미도건설대표)을 하며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손수 공연장 영뮤직홀을 설계하고 디자인했다. 많은 뮤지션의 로망인 자신의 공연장을 만들어, 그 속에 음악을 지속하려는 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인테리어를 스스로 기획하고 단장했으니 그야말로 홈퍼니싱이다.

  이 공연장은 인도어 라이프 시대의 개인 연습장과 작업공간이자 가난하고 힘들지만 음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인디 뮤지션들에게 기꺼이 소공연장으로, 작업실로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마련했다고 말한다. 그의 음악 후배들을 위한 작은 배려와 따스한 마음이 그의 노래만큼 큰 울림을 준다. 앞으로 나홀로 공연은 물론 서툰 유튜브와 SNS 활동도 조심스럽게 해보겠다는 그를 쿨투라가 응원한다.

 

 


 

* 《쿨투라》 2021년 5월호(통권 8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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