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라이프 01] 아이덴티티도 쉐어가 되나요
[MZ 라이프 01] 아이덴티티도 쉐어가 되나요
  • 함은세(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1.04.27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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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Z적 감각

  “너 유튜브 하면 진짜 잘 할 텐데.”

  만약 ‘아무리 들어도 적응 안 되는 말’을 순위로 매기는 대회가 있다면 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저 문장을 꼽을 것이다. 벌써 열댓 번은 들었을 텐데 도무지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냉큼 묻는다. 도대체 왜 내가 유튜브 하면 잘 할 것 같냐고. 비슷한 이유들 속에서도 그 의견들을 가장 명료하게 정리했던 한 친구의 대답은 이러했다. “넌 말도 재미있고 삶도 재미있어”.

  나는 그 말이 매우 마음에 들어서 가끔 그 말을 되새기고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피식 웃는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흥미로운 시선이 아닐 수 없다. 말도 재미있고 삶도 재미있는, 이른바 ‘특이해서 이목을 끄는’ 이에게 ‘연예인’을 권하는 게 아니라 ‘유튜버’를 제안한다. MZ 세대에게는 익숙한 맥락이다. 패션스타일이 감각적인 친구는 ‘스타일리스트’보다는 ‘패션 인플루언서’를 권유받고, 착실하게 공부 스케줄을 짜는 친구는 ‘공스타그램(스터디 플랜을 올리는 인스타그램)’ 운영해도 되겠다는 칭찬을 듣는다. 직업이나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벼룩시장 대신 잡플래닛을 사용하며 각박한 세상에서 생존 청년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MZ 세대는 온갖 직업적 디테일에 빠삭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직업’이 아닌 ‘직업 이외의 것’을 제안하는 이유가 뭘까?

  우리가 남이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요즘과 비교할 만한 적절한 예시를 찾을 수 있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전공하거나 직업을 삼으면 생의 마지막 시점까지 그것을 붙들고 살았다. 엄청난 변수가 없는 이상, 인생의 줄기가 되는 ‘흐름’이 있었고 덕분에 사주팔자가 바뀔 가능성도 전무했다. 그러나 전기차기업 CEO가 하늘을 나는 자동차 대신 우주여행의 상업화를 목표로 하는 2020년대에 한국인들은 3천번 저어서 만드는 달고나 커피에 꽂힌 것처럼, 이제는 일의 크기에 상관없이 개인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잔업들을 이것저것 병행하며 삶의 바운더리를 확장하는 게 부끄럽지 않은 세상이다. 일상의 정해진 틀이나 경제 활동의 형태가 개인의 아이덴티티와 동일시되는 시선이 희미해졌다. 누군가는 이런 마인드가 ‘생산성을 잃어버린 공허한 가치 추구’라고 이야기하지만, 땡! 단단히 틀렸다. MZ 세대의 세계에서는 이미 그런 것들이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생산성 없는 순간’을 통해 ‘생산자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현실에서는 존재 자체가 과소평가 당하는 일이 파다해서일까? 예전에는 별 것 아니게 취급되던 글씨 잘 쓰기나 맛있게 먹기, 옷 잘 입기와 좋은 노래 찾아내기 등이 정보화 시대의 빠르고 촘촘한 네트워킹 덕분에 재능으로 판단되며 사람들의 각광을 받는다. 미디어에서 수능 만점자, 서울대 의대 수석, 멘사 회원을 접할 때에는 ‘저곳에 닿지 못한’ 상대적 박탈감에 자기 자신이 작아지는 반면, 실생활에서 멀지 않은 부분들에서 소소한 역량을 발휘하는 이들을 지켜볼 때에는 내적인 친밀감이 발현되며 “어쩌면 나도…” 라는 생각으로 본인의 가능성을 찾고 힘과 동기를 부여받는 것이다.

  이런 마인드 때문인지 MZ 세대는 아이덴티티의 ‘쉐어’를 즐긴다. 나와 미디어 속 인물들을 완벽히 분리 혹은 동일시 시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되 나름의 연결고리는 잊지 않고 생성한다. 예컨대 3D* 덕후 판에는 ‘손민수’**라는 문화가 존재한다. 주로 팬으로서 지지하는 연예인을 따라하며 동질감이나 소속감을 느끼는 행동인데, 연예인이 입은 옷이나 사용하는 화장품 구매는 물론 그들이 자주 가는 음식점을 방문하거나 비슷한 말투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예전의 분위기와 달리, 이제는 대부분의 팬들이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원치도 않을 뿐더러 금기시한다. 적당한 선을 지켜 그들의 ‘공적인 아이덴티티’만 좋아하는게 서로에게 이롭다고 여긴다.

  이와 반대로 미디어 발전에 따라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셀럽들을 바라보는 눈은 다르다. 특히 유튜버나 BJ들에 관해서는 다들 ‘킹메이커’의 자리를 탐낸다. 평범한 개인이던 크리에이터들을 우상화하는 문화 역시 무의식 속에서 본인과의 격차가 허물어진 셀럽이 부와 명성을 쌓는 것을 지켜보며 마치 자기 자신 혹은 가까운 지인의 성공이 이뤄지는 기분에 휩싸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정리하자면, 과거에는 연예인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평범한 일반인들과는 분리하는 태도가 주를 이뤘으나 이제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괜찮은’, ‘잘나가는’ 일반인들과 내적 친밀감을 형성하고 ‘왠지 너무 먼’ 연예인들과는 정확히 선을 긋는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형태의 관계성이지만 MZ 세대에게는 당연한 태도다. 도전할 기회도, 설 자리도 없이 그저 입시 체제에 맞는 꿈과 목표를 설정해온 그들은 “하면 된다.”는 말이나 “최선을 다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부질없는 공허한 울림으로 느낄 뿐이다.

  어떤 탈피는 비상보다 치열하다

  이렇듯 형태에는 차이가 있으나 MZ 세대의 자아실현 프로세스는 타인의 아이덴티티를 쉐어하는 과정을 즐기고 그를 통해 비로소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하는 독특한 방식을 띤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개척하는 널 보면 왠지 나도 주저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아.” 고등학교 자퇴 후 명문대 입학은 커녕 반백수로 살며 삽 하나로 건물 짓기에 나선 나에게 친구들이 이런 말과 함께 ‘유튜버’를 권유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동경의 대상보다는 공유의 대상이, 은하계 너머 거성보다는 손 뻗으면 닿을 법한 작은 조약돌 같은 존재가 그들에겐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다른 이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이라니 기뻐서 몸 둘 바를 모르다가도, 문득 씁쓸해진다. 현실의 벽과 싸워나갈 기회도, 자아를 정확히 마주할 기회도 충분히 부여받지 못했음에도 어떻게든 껍질을 벗고 나오려는 청춘들. 타인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며 작고 소탈한 기쁨을 얻는 MZ 세대의 아이덴티티 쉐어를 그저 ‘생산성 없는 행위’로 바라보는 기성세대에게 새로운 시선과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데미안』의 문장을 인용하기 전에, 우선 MZ 세대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희는 새야. 너희에게는 알을 깨고 나올 힘이 있어.”

 


*3D 덕후 : 덕후의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여기서 말하는 ‘3D 덕후’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덕질하는 팬들을 통틀어 이르는 용어다. 연예인 팬덤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처럼 가상인물 등을 좋아하는 팬들을 ‘2D 덕후’라고 부르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손민수 : 순끼 작가의 웹툰 <치즈 인더 트랩>에 등장하는 인물로, 주인공을 동경하고 질투하며 주인공의 스타일과 말투, 성격 등 모든 것을 똑같이 따라한다. 따라서 MZ 세대에서는 ‘연예인이 사용했던 물품 등을 따라사거나 그들의 행위를 모방하는 움직임’을 지칭할 때 ‘손민수’라는 단어를 쓴다.

함은세
고등학교 자퇴한 걸 자랑하고 다니는 02년생. '인생 재미있게 살기 프로젝트'라는 명목 하에 삶을 모험하며 세상을 읽는 눈을 키우는 중이다.

* 《쿨투라》 2021년 4월호(통권 8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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