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뎐(傳) 4] 사라진 유랑극장
[극장뎐(傳) 4] 사라진 유랑극장
  • 정도상(소설가)
  • 승인 2021.05.2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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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벌극장

  내 생애 최초의 극장은 땅벌극장이었다. 함양군 마천면 면 소재지인 가흥리를 당시 마천 사람들은 ‘땅벌’이라고 했다. 왜 그렇게 불리는지도 모르고 나도 짜개바지를 입던 시절부터 면 소재지의 오일장이 열리는 공터를 땅벌이라고 불렀다. ‘땅벌 간다’고 하면 면 소재지를 가거나 오일장에 가는 것을 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마천면에는 유난히도 당집이 많아서 ‘당벌’이라는 별칭이 있었는데 당시 면민들은 된소리로 ‘땅벌’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 땅벌에 가끔 유랑극장이 들어왔다. 장이 서는날에 들어오곤 했는데, 등에 큰북을 맨 사람과 영화포스트를 앞뒤로 붙인 사람들이 장터를 누비며 밤에 개설될 극장을 선전하며 다녔다. 우리 같은 꼬마들은 우시장에서 황소 자지나 말 자지에 모래를 뿌리며 놀다가 극장 선전원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1963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누나가 일곱 살 때 옆집에 열아홉 먹은 순자 언니가 있었는데, 한창 연애중이었던 모양이었다. 땅벌에 천막극장이 들어오자 순자 언니가 누나한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누나는 펄쩍 뛰며 좋아했다. 우리가 살던 동네는 물레방아가 있던 송알이었다. 송알에서 땅벌까지 꼬마걸음으로는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아직 해가 남았을 때 누나는 순자 언니를 따라 길을 나섰다.

  땅벌에 도착하니 하얀 천으로 높다랗게 장막을 만든 천막극장이 개설되어 있었다. 확성기에서는 한명숙의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끝없이 반복되며 울려 나왔다. 지리산 곳곳의 골짜기에서 몰려나온 젊은 남녀들이며 어른들이 장터에서 국밥을 사먹으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일곱 살짜리 누나도 순자 언니와 그의 애인이 사준 국밥을 얻어먹으며 신영균과 엄앵란이 나오는 영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런데 밤이 오고 사람들이 표를 사서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만 순자 언니와 애인 총각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누나는 극장 밖에서 순자 언니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니다 끝내 영화도 못 보고 홀로 송알까지 걸어서 돌아가야만 했다.

  징검다리를 건너 걸어가는데 마천초등학교 못 미처 어느 길섶에서 ‘손 들엇’하며 갑자기 군인들이 총을 겨누며 튀어나왔다. 가뜩이나 어두운 밤길에서 귀신이라도 만날까 싶어 잔뜩 쫄아서 걷던 누나는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군인들은 어린 꼬마를 만나 당황했던지 누나를 깨워 집에까지 데려다주었다. 1963년까지도 지리산에는 빨치산 토벌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주로 신작로나 오솔길 근처에 참호를 파고 그 속에 들어가 밤 근무를 섰다.

  내가 최초로 본 영화는 〈007 두 번 산다〉였다. 마천국민학교 2학년에 다닐 무렵이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일 년 지난 영화가 땅벌극장에서 재개봉된 것이었다. 지리산 고리봉에서 발원하여 운봉과 남원 그리고 산내를 거쳐 마천의 땅벌로 흘러오는 냇물이 람천이다. 이 람천이 우리 동네를 지나는 임천과 합하여 흐르다가 남강이 되고 경호강이 된다. 경호강은 산청을 지나 흐르다가 사천 앞 남해로 흘러가 바다가 된다. 한편 남강을 진주를 지나 흐르고 흘러 낙동강과 합류한다. 산내 쪽에서 흘러오는 람천에 작은 물길을 만들어 터빈을 돌리는 초가집 한 채 크기의 소수력발전소가 있는데, 나는 그 집 아들과 같은 반이라서 친하게 지냈다. 지금은 이름도 잊었지만 그 아이와 함께 땅벌의 천막극장에서 〈007두 번 산다〉를 보고, 발전소에서 잤다. 다음 날 누나가 나를 찾아서 발전소에 왔었다.

  〈007 두 번 산다〉는 미국의 로켓이 우주에서 정체불명의 우주선에 납치된다는 내용이었다. 1968년에만 하더라도 우주선의 등장은 황당무계한 이야기였다. 내용은 황당무계했지만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화면에는 끊임없이 비가 내렸고, 가끔 까맣게 먹통이 되기도 했다. 총각들은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불었고, 어른들은 욕을 퍼부었다. 

  장터극장

  두 번째 유랑극장을 만난 곳은 인월장터였다. 나는 마천국민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인월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천막과 영사기와 질 낮은 확성기만 싸들고 다니며 영화를 상영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유랑민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입장료를 돈으로만 받지 않았다. 살아 있는 닭이나 새끼 돼지, 쌀과 보리쌀도 받았고 심지어는 꼬마들이 사이다 병을 모아 가져오면 받아주기도 했었다.

  인월로 전학을 간 나는 외고모할머니 댁에 얹혀사는 처지여서 돈이 없었다. 장이 서는 날이면 아이스께끼 등을 팔아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벌기도 했지만 그것으로는 눈깔사탕 사먹기에도 빠듯했다. 장터에 천막이 설치되고 영화 선전이 요란하면,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런 내가 보기에 안쓰러웠는지 외팔촌쯤 되는 형이 영화를 보여준다며 데리고 나갔다. 이태 전 서울에서 대히트를 친 〈미워도 다시 한 번〉이 그날 밤에 상영될 영화였다. 변사들이 “신영균과 문희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이 왔다며 면소재지의 골목과 인근 산촌까지 누비며 영화를 선전했다. 외팔촌 형은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였지만 차부에서 차표 검사를 하며 잔뜩 폼을 내고 살아가는 총각이었다. 그 형이 나를 데리고가서 극장 관계자들한테 공짜로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걱정마랑게. 영화가 시작되면 내가 면도칼로 천막을 찢어버릴 테니 그 사이로 뛰어 들어가 빙글빙글 돌다가 자리에 앉으면 된게.”

  나는 형과 함께 장터의 구석진 곳에 숨어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내리고 별이 뜨자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가 시작되었는데도 형은 빨리 움직이질 않았다. 천막 밖에는 나처럼 입장하지 못한 조무래기들과 동네 껄렁패들 그리고 입맛만 다시는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 어슬렁거렸다. 천막 입구에는 공짜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막는 소위 관계자들로 약간 소란스러웠다. 잠시 후, 그 형이 비장한 표정으로 따라오라고 했다. 형은 천막을 한 바퀴 돌더니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천막을 위에서 아래로 긋자마자 나를 틈새로 밀어 넣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간 나는 거의 엎드리다시피 해서 관객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관객용 가마니 위에 무사히 안착했지만, 한동안은 언제 끌려나갈지 몰라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을보면서 사람들은 울었다. 나도 문희의 아들 때문에 울었다.

  천막극장에서 최루성 멜로드라마만 본 것이 아니었다. 합죽이 김희갑과 살살이 서영춘의 영화들도 모두 천막극장에서 보았다. 특히 구봉서와 서영춘이나오는 〈번지수가 틀렸네요〉가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른다. 살살이 서영춘은 시골에 살던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유행어와 노래를 아이들은 입에 달고 살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이었다. 갈비씨 서영춘과 뚱녀 백금녀 콤비의 민담도 좋지만 꼬마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는 역시 요절복통 노래였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라 어른들은 바빴다. 초가집이 헐리고 양철지붕이 새로 올라왔다. 인월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호롱불과 남포만 사용하다가 전기가 들어오니 심봉사가 눈을 뜬것만 같았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김희갑이 등장하는 〈팔도유람〉이라는 영화가 들어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조국의 근대화를 효도문화와 접합시켜 만든 홍보용 영화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천막극장에서 그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동네 형과 누나들 중에는 남원과 함양에 있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오기도 했다. 처녀 총각이 영화를 보고 오면 동네에서는 누가 누구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골방극장

  국민학교 5학년을 인월에서 마치고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에서도 변두리에 살았다.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변두리에 극장이 하나둘씩 생겼다. 가난했던 나는 어머니가 모아둔 백원짜리 지폐를 훔쳐 남영동에 있는 성남극장이나 용산 청과물시장 근처의 용산극장으로 가서 영화를 보곤 했다. 그 극장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전주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서 군대를 마치고1984년에 복학했다. 독문학과를 다녔기 때문에 독일 관련 잡지나 기사들을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그 잡지들에서 나는 광주항쟁을 만났다. 독일의 《Quick》이라는 잡지에 실린 기사였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1980년 당시 나는 삼수생이어서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었다. 잡지에나온 “Blutiger Aufstand in Südkorea”과 “Das Blut fioß inStrömen”이라는 제목을 보고 독일어 사전을 찾아보며 자세히 기사를 읽었다. 그 후에 대학가에 독일에서 만든 〈광주비디오〉가 들어왔다. 나는 직접 영화 상영기사가 되었다.

  우리는 비밀리에 후배 몇 명을 모아 대학가에서먼 곳에 있는 자취방으로 갔다. 창문을 담요로 가리고 가지고 간 작은 텔레비전과 비디오데크를 연결하여 〈광주비디오〉를 상영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후배들은 울었다. 광주를 직접 겪지 못한 후배들을 위하여 우리는 〈광주비디오〉를 자취방은 물론이고 교회 지하에 있는 학생회실이나 청년회실에서 자주 상영하곤 했다. 정보과 형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우리들은 자주 장소를 옮겨야만 했다. 그렇게 골방극장이 두 해정도 운영되었다.

  사라진 유랑극장

  이제 천막극장도 골방극장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지리산 인근의 깡촌에서 살았던 내게 천막극장은 소중한 추억이다. 영화가 들어오면 하루종일 확성기에서 영화주제곡과 이미자와 남진의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영화선전원들이 동네마다 다니면서 초대권도 주고 쇼도 보여주었다. 동네 총각과 누나들은 영화가 들어오면 은밀히 눈을 맞춰 데이트를 하곤 했었다. 그런 시절을 지나 지금의 시대에 우리는 와 있는 것이다.

 

 


  정도상
  1960년 경남 함양 출생. 1987년 소설가로등단.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부이사장

 

* 《쿨투라》 2021년 6월호(통권 8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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