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라이프 03] 요즘 애들의 ‘윤여정 선생님’
[MZ 라이프 03] 요즘 애들의 ‘윤여정 선생님’
  • 함은세(본지 객원 기자)
  • 승인 2021.05.27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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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여정 ‘선생님’ 신드롬

  학교와 사회에 대한 젊은 세대의 애정이 점점 옅어져가는 요즘, ‘선생님’이라는 말은 듣기 어려운 단어가 되었다. 그나마 줄임말인 ‘샘’은 계속해서 사용이 이어지는 추세지만, 존경의 의미로서 웃어른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를 보는 건 거의 하늘에 별 따기 수준이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교사에게 사용하는 호칭은 둘 중 하나이다. ‘~샘’ 혹은… 그냥 이름.

ⓒ판씨네마

  그런데 거의 백이면 백, ‘선생님’으로 불리는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배우 윤여정이다. 출연하는 방송안에서는 물론이고 랜선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sns의 댓글창에서도 윤여정을 ‘선생님’으로 칭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윤여정의 대표작을 〈윤식당〉이라고 생각하는 10대~20대까지도 그에게 꼬박꼬박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사실상 일반인들에게는 생판 남이나 마찬가지임에도 그는 2021년 현재, 그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만인의 ‘멘토’이자 ‘스승’이 되었다. 이제까지 많은 연예인들이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며 문화의 흐름과 사회의 분위기를 바꿔놓았지만, 이런 식으로 한 인물을 ‘어른’으로서 공경하며 그 인물의 작은 말과 행동 하나 하나를 넘어 삶까지 주목하는 케이스는 찾기 힘들다. 냉소가 무기가 되고 혐오가 권리가 되는 시대, 이 흥미로운 “윤여정 ‘선생님’ 신드롬”이 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른’을 그리워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리 아이작 정 감독의 장편 영화 〈미나리〉는 20년도와 21년도를 통틀어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 중 하나였다. 리 아이작 정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한국 영화계의 대선배이자 주춧돌인 배우 윤여정은 어린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미국의 시골 마을로 향한 한국인 ‘할머니’를 연기했다. 이미 탄탄한 커리어를 쌓고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위치를 누리면서도 〈돈의맛〉, 〈죽여주는 여자〉, 〈찬실이는 복도 많지〉 등을 통해 연기적 도전을 이어온 윤여정이었으나,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해외의 인디 예술 영화 감독의 작품을 함께하는 건 절대 쉬운 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윤여정은 나영석이라는 걸출한 예능 프로듀서와 함께 본인이 메인이 되는 프로그램에 계속해서 출연해오던 상황이었으니, “사서 고생하는 일” 정도는 마다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여정은 〈미나리〉를 선택하며 다시 한 번 새로운 문을 열어젖혔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한국 문화계에도, 윤여정 본인에게도 엄청난 획을 긋는 결정적 순간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윤여정의 데뷔작을 만든 고 김기영 감독이 사망한 후 태어난 젊은 세대에게도 ‘배우로서의 윤여정’의 존재감을 확고히 각인시켰다. 그러나 윤여정이 〈미나리〉로 거둔 괄목할만한 성적들은 그저 “윤여정 ‘선생님’ 신드롬”에 불을 붙이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꽃보다 누나〉와 〈윤식당〉 속 윤여정이 더 익숙한 젊은 세대가 열광한 건 오히려 ‘배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윤여정이었다. 선댄스영화제 무대 인사에서 “전 늙어서 더 고생하기 싫어요.”, 〈꽃보다 누나〉 방송 인터뷰 중 “60대가 되어도 인생을 몰라요.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 67살이 처음이야.”,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콧대 높은 것으로 유명한’ 영국인들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좋습니다.” 하고 말하던 그의 꾸밈없고 당당한 태도는 약육강식의 현실에서 한껏 몸을 굽히고 살아가야 생존할 수 있는 젊은 세대에게 대리 만족을 선사해주었고, ‘다정한 까칠함’은 그를 향한 동경의 마음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하지만 윤여정을 전 국민의 ‘선생님’으로 만든 것은 ‘진정한 어른’을 원해온 젊은 세대의 오랜 갈증 때문이다. “라떼 is horse…(라떼는 말이야…)”가 하나의 밈으로 자리 잡은 시대, 나이를 권력 삼아 부와 명예를 독점하고 청년들의 아픔을 조롱하며 기회조차 주지 않는 소위 ‘말만 어른인 이들’을 향한 젊은 세대의 분노는 그 어느 때보다 극단에 치달아 있다. 나만해도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만난 가지각색의 ‘어른 군상’으로 인해 그야말로 “인류애가 박살나는” 상황들을 수도 없이 겪었고, 주변의 친구들과 뉴스에 도배된 온갖 종류의 탐욕과 무지로 사건사고를 빚어내는 ‘어른들’에 관해 이야기 할 때면 “야 우리 진짜 저렇게는 늙지 말자…”는 말이 수십 번씩 나온다. (“저렇게 늙자.”는 말은 정말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다.) ‘롤모델’보다는 ‘반면교사’로 삼을 어른들을 찾는 게 훨씬 쉬운 사회에서 청년들의 어른에 대한 믿음이 결여된 것은 어쩌면 무척이나 당연한 흐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는 항상 ‘좋은 어른’을 갈구해왔다. 나이를 ‘힘’과 동의어로 여기지 않고, 청년들에게도 그들만의 ‘십자가’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상냥한 위선을 내세우기보다 조금 까칠해 보여도 진심으로 사람과 삶과 세상을 대하는 ‘좋은 어른’말이다. 그리고 윤여정은 그 누구도 채워주지 못하던 청년들의 목마름을 해소해주었다. 그는 어디에서나 충분히 당당하고 적당히 솔직하다. 언제나 자기자신의 아이덴티티와 니즈를 지키면서도 절대로 선을 넘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다. 무엇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나이가 많다고, 지위가 높다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타인을 뒤바꾸려 하지 않는다. 결국 “윤여정 ‘선생님’ 신드롬”은 젊은 세대가 얼마나 ‘어른’을, ‘선생님’을 필요로 해왔는지 보여주는 약간은 씁쓸한 환호성이다.

  미나리의 시대

  윤여정에게 수십 개의 트로피로도 모자라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이라는 금자탑의 정점까지 안겨준 리 아이작 정 감독의 영화 〈미나리〉에서, 윤여정이 맡은 ‘할머니’는 타이틀롤인 ‘미나리’ 씨앗과 함께 미국으로 간다. ‘미나리’는 어디서나 혼자서도 잘 자라는 식물로, 척박한 현실을 딛고 삶을 개척해나가는 이민자 가족을 상징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윤여정의 ‘할머니’는 영화 속에서 가족의 갈등 서사를 이루는 주요한 줄기임과 동시에, (다소 서글프고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극한의 구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미나리는 삭막한 환경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싹을 틔우며 다음 생명으로 연결되는 이 시대의 청년들을 닮았다. 놔두면 “대충 알아서 자라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나리 또한 아주 얕고 흐릴지언정 최소한의 물과 햇빛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좋은 ‘어른’과 ‘스승’들은 그 물과 햇빛이다. 설령 그 정도와 농도가 무척이나 희미하여도, 각박한 땅에서 꾸역꾸역 잎을 키워내는 미나리에게는 물과 햇빛이 필요하고, 청년들에게는 어른이 필요하다. 메말라가던 ‘미나리 세대’가 더 이상 먼 곳에서, 연결되지 않은 세계에서 ‘선생님’을 찾을 필요가 없는 언젠가를 꿈꾸며, 끝끝내 한 줄기 희망처럼 존재만으로도 청년들을 달랜 윤여정 ‘선생님’의 말 한 구절과 함께 이야기를 마친다.

   “우리는 낡았고 매너리즘에 빠졌고 편견을 가지고 있잖아요. 살아온 경험 때문에 많이 오염됐어요. 이 나이에 편견이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너희들이 뭘 알아?”라고 하면 안 되죠.”

 

 


  함은세

  고등학교 자퇴한 걸 자랑하고 다니는 02년생. ‘인생 재미있게 살기 프로젝트’ 라는 명목 하에 삶을 모험하며 세상을 읽는 눈을 키우는 중이다.

 

* 《쿨투라》 2021년 6월호(통권 8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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