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뎐(傳) 3] 극장에서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
[극장뎐(傳) 3] 극장에서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
  • 안상학 (시인)
  • 승인 2021.05.05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첫 영화 〈철수무정(鐵手無情)〉

  내 인생의 첫 영화는 중국의 장처(張徹)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철수무정〉이었다. 이 영화는 1969년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1971년에 개봉된 무협영화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중학교 2학년 형을 따라 처음 극장에 가서 본 영화다. 남자 주인공은 매서운 눈매의 소유자인 로례(羅烈)였고, 여성 주인공은 청순가련의 전형인 리칭(李菁)이었다. 둘은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배우들이었다. 호화 배역에 여러모로 상당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영화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때는 ‘문화교실’이라고 하는 학생 단체관람가가 있었다. 이 영화도 형의 단체관람가에 편승해서 본 것이다. 화면에 비가 내리는 것 같은 현상과 흔들림이 많은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간혹 영상이 스크린 밖으로 밀려나거나 화면이 두 동강이 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관객들은 “이층, 이층!”하고 영사실을 향해 손나발을 불었다. 열악한 상영 수준이었지만 극장은 만원이었다. 스토리는 전형적인 선악의 대결 구도에 적의 두목 딸과 사랑에 빠지는 설정까지 더해 흥미진진하게 흘렀다. 환호와 탄식이 섞바뀌는 가운데 주인공이 악전고투 끝에 악을 물리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극장이 떠나가라 기립박수가 터졌다.

  텔레비전도 없는 처지였던 나로서는 대형 스크린에 펼쳐지는 활동사진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간혹 첫 영화의 경험을 떠올릴 때면 〈철수무정〉이라는 제목을 쉬 떠올린다. 아마도 초등학교 들어가서 처음 배운 문장의 주인공이 철수-물론 뜻은 다르지만-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철수무정〉을 생각하면 그 영화의 장면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어떤 수풀 속에서 삿갓을 쓴 고독한 사내가 갈댓잎을 물고 있는 이미지가 그려지곤 했다.

  몇 해 전에 나는 이 영화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첫 영화는 나를 크게 실망시켰다. 1970년대 내내 무협영화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고 나는 그 시대에 걸맞게 극장을 드나들었던 터라 영화의 발전 정도에 맞게 눈도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왕우(왕위)와 이소룡을 거쳐 성룡(청룽), 주윤발(저우룬파), 임청하(린칭샤), 이연걸(리롄제), 견자단(전쯔단) 영화까지 거의 빠짐없이 봤으니 오죽하랴. 이 영화의 액션은 좋은 말로는 리얼하고 나쁜 말로는 어린아이들 장난 같았다. 스토리는 식상하고 화면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첫 영화의 환상이 처참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다만 모든 무협영화의 조상쯤 되는 작품이라는 인식에 기대어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 삼았다.

  안동 문화극장 ‘신 하사 사건’과 신영복

  1970년대 안동에는 극장이 세 곳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영화를 보았던 대안극장과 안동극장, 문화극장이다. 기억 속의 극장들이다. 지금은 어느 도시에나 있는 대형 영화관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자리 잡고 있다.

  안동의 극장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다. 이른바 ‘문화극장 신 하사 사건’이다. 본명은 신영식, 사건 당시 스물한 살의 청년이었다. 하사관으로 복무하던 청년은 애인의 변심을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복수를 계획했다. 물색한 곳이 하필이면 안동역 앞에 있던 문화극장이고, 또 하필 영화 제목이 〈복수〉였다. 수류탄 두 발을 영화를 보고 밀려 나오던 400여 명의 관객에게 투척했다. 이 사고로 5명이 죽고 44명이 다쳤다. 1968년 5월 18일 밤 10시 20분쯤에 터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신 하사가 애인 박씨의 변심이 사실인 줄 알고 벌인 사회적 보복이었으나 진실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남자가 생겨서 변심한 것이 아니라, 부산으로 이주해서 신 하사를 기다렸으나 단순히 연락이 닿지 않아서 생긴 오해일 뿐이었다. 그러나 오해에서 비롯된 일치고는 너무나 엄청난 참극을 낳았고, 그도 사형을 받고 196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 사건을 나는 신영복 선생의 『담론』에서 다시 만났다. 신영복은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신 하사와 같이 수감생활을 한 것으로 나온다. 당시 군은 해이해진 군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이 사건을 다소 각색해서 다뤘다. 그러나 신영복이 지켜본 신 하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후안무치한 사람이 아니라 후회와 반성을 하며 오히려 삶에 애착까지 보인 평범하고 안타까운 인간의 모습일 뿐이었다고 한다. 신 하사는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온 애인 박 씨와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부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어느 봄날 목욕장으로 이동하는 대열에서 신 하사는 신영복의 뒤에서 그를 껴안으며 “신 중위님, 나 진짜 살고 싶어요!”라며 흐느꼈다고 한다. 당시 목욕장으로 이동하는 길에서 푸르게 펼쳐진 보리밭이 보였다고 한다.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그 풍경과 신 하사의 울림이 있는 말 한마디는 묘하게 어우러져 평생 잊히지 않는 장면으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신영복에게 있어서 신 하사는 삶과 죽음, 생명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새롭게 하는 지점이었으며, 이후로도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하면 푸른 보리밭과 신 하사의 음성이 떠오른다고 적고 있다. 만약 사형이 되면 안구 기증까지 약속하며 감형을 꿈꿨으나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신 하사의 눈에도 들었을 보리밭은 당사자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두 사람에게 이식된 그의 각막은 무엇을 보고 살았을까.

  안동문화회관 영화 모임과 권정생

  나의 일천한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또 하나 있다. 1980년 중반 무렵 안동에는 작고 은밀한 영화 모임이 있었다. 독일에서 온 임인덕 신부가 독일제 바우어 16밀리 포터블 영사기를 가지고 영화 사목을 하는 자리의 일환이었다. 주로 국내에는 개봉이 불허된 사회 비판적인 영화들이었다. 기억나는 영화들의 제목만 나열하자면 〈분노의 포도〉(존 포드,1940), 〈길〉(페데리코 펠리니, 1954), 〈무방비 도시〉(로베르토 로셀리니, 1945),〈워터프론트〉(엘리아 카잔, 1954),〈사계절의 사나이〉(프레드 진네만, 1966) 등과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스〉(1936), 〈황금광 시대〉(1925), 〈위대한 독재자〉(1940) 등이었다.

  상영은 주로 안동문화회관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 특설극장이었던 셈이다. 참여한 사람들은 전우익, 이오덕, 권종대, 권정생 등 재야인사들과 그들을 따르던 소위 운동권 청년 학생들이었다. 영화가 끝나면 간단한 음식을 나누며 토론을 했다. 영화 감상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대개는 시국과 정세를 논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안동문화회관은 숙박시설도 겸하고 있어서 자리가 늦어지면 자연스레 숙소를 잡고 밤샘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임인덕 신부는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 있는 분도출판사 책임을 겸하고 있었다. 권정생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안동을 드나드는 길목에 권정생 집이 있었기 때문에 꼭 태워서 다녔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몸이 불편한 권정생에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권정생의 동화집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소년소설 『초가집이 있던 마을』을 출간하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임인덕 신부의 영화 사목은 1987년에 당한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영화모임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그러나 영화모임에서 축적된 경험은 안동문화운동연합이 결성되면서 열린영상회라는 부문운동으로 이어졌다.

  권정생은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극장을 드나들며 영화를 본 경험이 정서에 녹아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거동이 어려워서 극장에는 자주 갈 수 없었지만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로 보고 싶은 영화를 꼭 챙겨봤다. 이런저런 글에서 영화 이야기를 심심찮게 풀어낸 바 있다.

  나는 권정생과 딱 한 번 영화관에 같이 간 적이 있었다. 2006년 8월 18일이었다. 그날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과 생신 축하 자리 겸 집 주변 잡목들과 마당에 풀들을 정리하려고 권정생의 오두막을 방문했다. 일을 마치고 음식을 나누다가 당시 공전의 빅히트를 치고 있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개봉하기 무섭게 엄청난 흥행 속도를 보이고 있었고, 천만 돌파는 시간문제였다. 미리 본 사람들의 거리낌 없는 스포일러와 보지 못한 사람들의 지레짐작이 충돌하다가 결국 천만 대열에 동참하기로 의기투합을 했다.

  그렇게 해서 권정생과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영화 나들이 길에 나섰다. 날씨가 무척 더운 날이었다. 가는 길에 상영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어서 암산유 원지에 들렀다. 나무 그늘에 앉아 더위를 식히며 한참을 놀았다. 그때 권정생과 단둘이 찍은 셀카는 소위 몇 안 되는 ‘인생 샷’으로 남아 있다. 권정생과 함께 영화를 관람한 일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안상학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年 11月의 新川」 당선. 시집 『남아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등이 있다.

 

* 《쿨투라》 2021년 5월호(통권 83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