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낯설게 귀 기울여줄 누군가에게: 〈비와 당신의 이야기〉 〈좋은 빛, 좋은 공기〉 〈아들의 이름으로〉
[영화 월평] 낯설게 귀 기울여줄 누군가에게: 〈비와 당신의 이야기〉 〈좋은 빛, 좋은 공기〉 〈아들의 이름으로〉
  • 나원정(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
  • 승인 2021.05.27 00: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 키다리이엔티

  온화한 계절과 함께 극장가엔 복고 바람이 찾아왔다. 과거로 간 영화들은 장르도 다양하다. 요즘은 희귀해진 느린 사랑 이야기에서 감성적인 온기를 찾거나, 매듭짓지 못한 근현대사의 비극을 똑바로 마주해 현 사회의 변화를 강하게 촉구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5월 12일 박스오피스 1위는 조진모 감독의 로맨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다. 4월 28일 개봉 후 2주 만에 31만 관객을 동원했다. 장기화된 코로나19 상황에서 올해 개봉작 중 100만 관객을 넘은 실사영화가 배우 윤여정의 한국 최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으로 큰 화제를 모은 〈미나리〉 한 편뿐인 것을 감안하면 고무적 성과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2003년 서울에서 대학입시 삼수생에 접어든 영호(강하늘)가 잊을 수 없는 초등학교 시절의 소녀, 소연이 있는 부산으로 용기 내어 보낸 편지가 펜팔로 이어지며 시작된다. 만나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내건 소연을 못내 보고 싶어 영호는 12월 31일 비가 오면 만나자는 가능성 낮은 약속을 하곤 그 해부터 2011년까지 9년간의 기다림을 반복한다. 핸드폰이 이미 대중화된 시대지만, 이들은 손글씨로 쓴 편지를 주고받는다. 사실 영호가 받는 편지는 소연의 동생 소희(천우희)가 사정이 있는 언니 대신 쓰는 것이다. 영호가 기다릴 줄 알면서도 소희는 12월 31일 그가 기다리는 옛 초등학교 터의 벤치에 나갈 수도, 언니의 비밀을 밝힐 수도 없다. 그렇게 평행선처럼 흐르는 두 청춘의 나날을 관객은 보지만 그들은 서로 보지 못한다. 실제로 두 주연배우 강하늘과 천우희도 촬영 현장에서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단다.

  자신을 다 내어 보이지 않는 가림막 같은 비밀과 그로 인한 엇갈림, 오랜 기다림. 지구 반대편마저 낱낱이, 실시간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요즘의 초연결 시대엔 낯설어진 것들이다. 우리는 소셜미디어의 토막글을 보고도 얼마나 서로를 아는 ‘척’하고 있는지. 똑같은 대학입시를 3년째 치르면서 잘난 형의 아는 척에 질려버린 영호, 그리고 엄마와 헌책방으로 출근했다가 병원에 들르는 게 일과의 전부인 그 시절의 소희 역시 어쩐지 뻔해서 지루해져버린 자신의 이야기를 낯설게 귀 기울여줄 누군가가, 손편지에 진심을 눌러 담는 시간 자체가 그들에겐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도. 이 영화가 개봉 후 줄곧 흥행 정상권을 지킬 수 있었던 까닭이 아닐까 .

ⓒ엣나인필름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재조명한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좋은 빛, 좋은 공기〉와 안성기주연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는 조금 다른 태도로 과거를 돌아본다.

  5·18은 군부 독재에 맞선 광주 시민들을 군부 정권의 계엄군이 유혈 진압했던 근현대사의 참상이다. 지난해 40주년을 맞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재조명이 이뤄져 왔지만, 올해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날의 진상과 가해자 처벌이 온전히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올봄 당시의 계엄군이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에게 발포한 사실을 인정하고 유족에게 사과하는 자리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계엄군들이 당시 진압 작전을 증언한 경우는 있었지만, 직접 총을 발포해 민간인을 가해했다고 양심 고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40년간의 죄책감을 토로한 계엄군을 유족이 끌어안은 눈물의 현장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 역사적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물꼬가 될 터. 4월 28일 개봉한 〈좋은 빛, 좋은 공기〉는 ‘빛고을’ 광주(光州)와 ‘좋은 공기’란 뜻의 이름을 가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 두 도시를 관통한 아픈 역사에 더해 지금 현재 미얀마 민주화 시위에 대한 지지까지 담아냈다.

  언어도 생김새도 다른 지구 반대편 두 도시에선 광주는 19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976~83년 각 신군부 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시민들이 무수히 죽거나 사라졌다. 임 감독은 한국 최초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은 2014년 작 〈위로공단〉에서 1960년대 구로공단부터 지금까지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고난사에 2014년 캄보디아 내 한국기업 현지 노동자들이 농성 중에 현지 군대에 의해 유혈진압당한 사건까지 반복되는 비극으로 짚어냈다. 미술 작가이기도 한 그는 2017년 아르헨티나 벨라스 아르테 국립미술관 초청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았을 때 이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도군사정권에 의한 납치와 감금, 강간, 살인으로 3만 명 넘는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광주와 더불어 다음 세대가 역사를 알아야 이런 비극이 조금이라도 ‘덜’ 대물림된다고 그는 믿었다 .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의 비밀수용소는 파출소, 가정집 등 다양한 형태로 일반 주택가를 파고들어 아르헨티나 월드컵 땐 중계방송 축구 함성 탓에 그 위치가 발각되기도 했단다. 당시 참상이 기록된 사진과 생존자증언, 유해 발굴 현장은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중 어느 도시 장면인지 헷갈릴 정도로 빼닮게 겹쳐진다. 다만 임 감독은 아르헨티나에선 발굴 중인 불법 감금소의 흙 한 줌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며 원형 그대로의 보존에 힘쓰고 있다면 한국에선 복원이 원래 모습을 훼손하기도 하며 진행돼왔다고 지적했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존하고 그 의미를 계속해서 발굴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다. 이런 투쟁의 증거물을 통해 비로소 국가 폭력이 온전히 증언되고 진상 규명에 다가갈 수 있다는 논지다.

ⓒ엣나인필름

  5월 12일 개봉한 이정국 감독의 극영화 〈아들의 이름으로〉는 좀 더 직설적인 화법으로 5·18 가해자들의 사과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계엄군의 양심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가해자들의 제대로 된 반성 없이는 피해자들의 고통도 진정 치유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안성기가 연기한 주인공 오채근은 서울에서 가족 없이 혼자 사는 대리운전기사. 광주 사람들이 하는 식당 단골인 그는 사실 1980년 광주와 자신의 아들에 얽힌 비밀이 있다. 그는 반성 없이 호의호식하는 역사의 가해자들의 숨통을 서서히 죄어간다.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편히 잘 살 수 있었는지….” 40여 년을 돌아온 그의 질문은 1980년 광주가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비극으로 남은 2021년 현재까지 유효하다는 게 이 영화가 가르쳐주는 진짜 비극이다.

 

 


나원정
《스크린》《무비위크》《맥스무비 매거진》《매거진M》 등 영화잡지를 거쳐 지금은 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 영화의 안과 밖을 들여다보는게 '일'이자 '취미'인 성공한 덕후이다.

 

* 《쿨투라》 2021년 6월호(통권 84호)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