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윤여정 필모그래피 베스트 11
[7월 Theme] 윤여정 필모그래피 베스트 11
  • 전찬일(영화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 승인 2021.07.0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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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필자만 그럴까만은 목하, 배우 윤여정에 ‘윤며들어’ 한 철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2019년 5월 7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은 이래 몇 철을, ‘장르가 된 감독’ 봉준호와 더불어 지냈듯. 재미교포 감독 리 아이작 정(한국 이름 정이삭)이 연출한 미국영화<미나리>로 93회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거머쥐는 ‘미션 임파서블’을 현실화시키면서, 오스카는 말할 것 없고 한국, 아니 아시아 및 세계 영화 ‘역사’의 새 장을 활짝 열어젖혔으니, 당연하다. 그것도 ‘70대 중반’의 ‘아시아 여성’에, ‘주연 아닌 조연’이란 몇 중의 허들을 극복하며 일궈낸 쾌거니, 그 의미는 더 크고 깊다.

  오스카 수상 직후 한 매체(이하 《매일경제》 4월 27일 자 「시대 욕망 품은 연기…윤여정, 장르가 되다」 인용·참고)에서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진 바있다. “윤여정은 과연 어떤 배우였을까? 김혜자·전도연·최불암·송강호처럼 대한민국 최강의 연기파 배우였을까. 아니면 김지미·전지현·신성일·이병헌 같은 톱스타였을까”라고. 내 진단은 다음과 같았다. “국내외적으로 온갖 상찬들이 ‘여걸’을 향해 쇄도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렇다’고 답할 순 없다. 21세기로 시선을 고정하면, 그녀는 톱스타는 커녕 스타로 예우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주연보다는 명품 조연 정도로, 으레 주변부에 머물러왔다. 하지만 그 이름 앞에 ‘늘 도전하고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던’이라는 단서를 달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어미〉(박철수, 1985)로 복귀하기 전까지, 1974년 조영남과의 결혼 이후 10여 년간 미국 생활로 인한 ‘경력 단절’ 고려하면 연기자로서 윤여정의 위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립서비스용 빈말이 아니다. 그때로부터 2개월가량 지난 지금 이 시점, 그 진단은 유효하다 못해 한층 더 굳어졌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www.kmdb.or.kr)를 토대로 윤여정의 연기 여정을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 ‘질긴 생명력’에 감탄·감동하지 않을 도리 없다. 장편영화로 한정하자. 총 56편의 2020년 73회 칸 ‘공식 선정’(Official Selection)에 포함된,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하염 없이 개봉이 지연되고 있는 임상수 감독의 〈헤븐: 행복의 나라로〉(가제)를 포함해 〈미나리〉에 이르기까지, 윤여정의 필모그래피는 총 30여 편에 지나지 않는다. 김기영의 〈화녀〉(1971)가 스크린 데뷔작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과작이다. 그녀의 과작성은 크게 세 가지 함의를 띤다. 영화배우로서 그녀의 인기가 그다지 높지 않았거나, 출연작 선택 기준이 무척이나 까탈스러웠거나, 영화보다는 방송 연기 쪽에 무게중심을 뒀거나….

  아니나 다를까 윤여정은 이창동·박찬욱·봉준호, 목하 대한민국 ‘빅3 감독’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다. 심지어 102편이라는 다작의 임권택과도 함께 한적이 없다. 〈화녀〉와 〈충녀〉(1972), 그리고 ‘윤며들다 신드롬’에 힘입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는 유작 〈천사여 악녀가 되라(죽어도 좋은 경험)〉(1990)까지 한국 영화사의 거장 김기영과 3편을 함께 했으나, 당시 그 거장의 위상은 예의 전성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미〉로 성공적 컴백을 했어도,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3)으로 특유의 존재감을 공고화하기 이전까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녀의 영화 이력은 휴지기나 다름없었다. 〈사랑과 야망〉(최종수, 1987), 〈모래성〉(곽영범, 1988) 등 인기 TV 드라마에 출연했으나, 역할의 비중 등에서 대단한 게 아니었다.

  〈바람난 가족〉을 계기로 상황은 급반전이 된다. 한 해도 쉬지 않고 매년 한두 편씩 조·주연으로, 윤여정 그녀만의 맛·개성을 영화에 입히는 데 성공한다. 전작(全作) 중 무려 25편이 그 이후의 출연작들이다. 그 가운데 14편을 세 감독과 작업했다. 임상수 7편, 홍상수 4편, 이재용 3편이다. 통속적 대중 감독들이 아닌, 범상치 않은 문제적 감독들이다. 윤여정의 남다름은 그 누구보다 이 세 명장들과 상통한다. ‘천만 감독’과는 딱 한 편을 함께 했다. 강제규의 〈장수상회〉(2015)다. 한국 영화사의 이 대표적 ‘시니어 영화’는 120만여 관객이라는 소박한 흥행 성적을 거두는데 그쳤으나, 60대 후반의 그녀는 사랑의 설렘을 잃지 않는 금님 캐릭터로 분해, 생애의 열연을 펼쳤다.

  얼마 전 한 기업의 요청으로 ‘미 할리우드가 한국 배우 윤여정에 주목하는 이유’에 대해 조찬 특강을 하며, 기업에서 벤치마킹할 만한 배우 윤여정만의 어떤 특성들을 꼽아봤다. 그 첫째가 결단과 모험(심)이다. 언제부터인가 가슴에 품어온 한 가지 인생 명제가 ‘노 리스크 노 리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바, 필자보다 14년 선배인 그녀는 그 명제를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그녀는 최근 두 자식을 양육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즉 ‘생존 수단’으로서 연기를 해왔다고 역설했다. 그러니 ‘치열’할 수밖에 없었을 터. 치열함은 다양함으로 이어진다.

  (의도하진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한 가정을 파괴하게 되는) 식모·가정부(〈화녀〉와 〈충녀〉)부터 남편에게 배신당해 복수에 나서는 주부(〈천사여 악녀가 되라〉), 중년의 바람녀(〈바람난 가족〉), 수녀(〈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배우 윤여정 자신(〈여배우들〉, 〈뒷담화:감독이 미쳤어요〉), 나이든 하녀(〈하녀〉), 재벌가의 탐욕스러운 안주인(〈돈의 맛〉), 일명 ‘박카스녀’(〈죽여주는 여자〉), 엄마(〈꽃피는 봄이 오면〉, 〈고령화 가족〉, 〈그것만이 내 세상〉), 그리고 〈계춘할망〉, 〈미나리〉 등의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다채로운지 그 비교의 예를 찾기 쉽지 않다. 그녀의 출연작들은 대체로 일정한 수준을 견지하는데, 모험·치열함·다양함 같은 특징이 아니라면 〈가루지기〉(신한솔, 2008)처럼 영화적 수준을 평하기 곤란한 태작에도 참여했던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정도의 덕목들로 작금의 윤신드롬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배우들이 어디 그녀만이겠는가. 돈벌이를 넘어 가치까지 추구해온 방향·지향성, 개성 넘치는 지속성으로 구축·확보한 흔치 않은 생명력, 출연작들에서 발견되는 그녀만의 어떤 인간적 배려·의리와, 더 나아가 그녀 특유의 어떤 ‘노블리스 오블리제’, 나이 듦에 굴하지 않는, 솔직하다 못해 당당할 대로 당당한 열정, 그리고 〈미나리〉에서 절정을 이룬 상생의 ‘개방 협력’(Open Collaboration)에 이르기까지 가히 ‘윤여정스러운’, 빛나는 미덕들이 수두룩하다. 다소의 과장을 허락한다면, 한국영화 배우사에 이런 이가 존재했거나 존재하는지, 나아가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소 많기는 해도 이쯤에서 위와 같은 기준들을 근거로 윤여정 필모 베스트 11을 선정해보면 어떨까. 상기 기업 특강연과, 지난 4월 19일 출범한 ‘크리튜버 전찬일TV’의 새 프로그램 ‘전찬일의 촌철살인’에서도 밝혔듯. 재미 삼아 후 순위부터 말하면, 11위는 〈그것만이 내 세상〉(최성현, 2018)이다. 두 아들의 엄마로서, 삭발투혼까지 감행하는 감동의 열연을 선사했다. 놀라지 마시길. 10위는, 신드롬의 결정적 동기인 화제작 〈미나리〉다. 너무 인색한 평가 아닐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 순위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후 내린 결과다. 애초에는 11위로 배치하려다 예의 차원에서 10위 안에 포함시켰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역사적인 오스카 여우조연상 포함 40개 가까운 수상 기록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왔듯, 그것은 연기보다는 순자라는 ‘별난’ 할머니 캐릭터가 거둔 완승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내 주장이다). 어디까지나 참고용일 따름인 개인적 의견이다. 윤여정 특유의 ‘장외 연기’, 달리 말해 영화상 등 연기 밖에서 선보인 감동·재치 가득했던 윤여정다운 수상 소감 등도 그에 한몫했을 터.

  9위는 〈장수상회〉요, 8위는 임상수의 〈하녀〉다. 수상 목록으로 치면 여집사 병식 역의 〈하녀〉는 최고작으로 평해질 법도 하다. 19회 부일영화상을 비롯해 11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8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31회 청룡영화상, 18회 춘사영화상, 47회 대종상 등 2010년 국내 거의 모든 영화상에서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하녀〉에 이어 2년 만에 칸 경쟁에 초청되며 파란을 일으켰던 〈돈의 맛〉을 베스트 목록에 넣지 않은 것은 두 역할의 색깔이 워낙 닮아서다. 두 영화는 이란성 쌍둥이 격이다.

  7위 역시 임상수 연출작인 바, 더 이상 부연이 필요 없을 〈바람난 가족〉이다. 6위는 주인공 최민식 필모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고)류장하의 〈꽃피는 봄이 오면〉(2004)이다. 일찍이 다른 지면에서도 피력했듯, 〈장수상회〉와 더불어 그 진가가 넉넉히 인정받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는 가작. 그 가슴 아린 수작에서 윤여정은, 내게 가장 이상적 모성으로 다가섰다. 양적 비중은 크지 않고 강력한 맛은 다소 부족해도, 그 울림·여운에서는. 5위는 〈충녀〉요, 4위는 〈어미〉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재발견한 〈어미〉는 김수현 각본에 걸맞게 플롯도 꽤 치밀하며, 연출력도 수준급이다. 윤여정은 3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원숙하면서도 강렬한 모성을 구현했다. 남자의 영역으로 간주되기 십상인 ‘사적 복수’를 여성 주인공이 홀로 감행한다는 점에서도 단연 주목감이다. 봉준호의 〈마더〉(2008)와 비교하는 맛이 작지 않을 텐데, 특히 표정 연기가 일품이다.

  3위와 2위는 〈계춘할망〉(창, 2016)과, 〈죽여주는 여자〉(이재용, 2016)다. 성격화(Characterization)도 그렇거니와 분장, 연기의 밀도 등 여러 모로 할머니 연기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후자는, 객관적 시선으로는 윤 필모 최고작으로 손색없다. 〈장수상회〉 못잖은 그 문제적 ‘시니어 영화’에서 윤여정은 그녀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캐릭터와 연기로, 그야말로 ‘죽여준다’. 연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미나리〉의 순자는 소영에 비견되기 무리다. 그렇다면 영예의 1위작은 무엇일까? 짐작했겠지만, 〈화녀〉다. 김기영의 부동의 걸작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괴작. 연기에만 집중하면, 〈화녀〉는 〈하녀〉를 훌쩍 넘어선다. 〈화녀〉의 윤여정이 〈하녀〉의 이은심을 압도한다. 닮은꼴 영화 〈충녀〉를 5위로 위치시킨 이유도 그래서다.

  그 문제작을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 적, 청량리 소재 동일극장에서, 때마침 나왔던 단속을 피해 숨죽여 가면서 관람했다. “야할 대로 야했던 극장 간판의 윤여정 모습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장차 영화평론의 길로 인도할 인생 영화로 중학교 적 동네 3류 극장에서 봤던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을 들곤 했으나, 어쩌면 그 이전에 〈화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심상·뇌리에 자리 잡고는, 50여 년간 존재해왔으니. 물론 화녀 윤여정 덕분이었다.” 그녀는 〈화녀〉로 대종상 신인상을 비롯해 청룡영화상,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부일영화상 우수신인상 등을 싹쓸이했다. 훗날 〈하녀〉로 그랬듯. 한국영화평론가협회(영평)상이 제정되기 9년 전이었다. “결국 윤여정의 기념비적 성과는 이미 예고됐던 셈이다. 윤여정의 소감이 말해주듯,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견디고 또 견디면서…….”

 

 


전찬일
(주)문화광장 대표,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조직위원. 저서로 『영화의 매혹, 잔혹한 비평』(2008), 『봉준호 장르가 된 감독』(2020) 등이 있음.

 

* 《쿨투라》 2021년 7월호(통권 8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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