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순자의 의미, 윤여정의 의미: 〈미나리〉
[7월 Theme] 순자의 의미, 윤여정의 의미: 〈미나리〉
  • 윤성은(영화평론가)
  • 승인 2021.07.0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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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나리〉에서 순자(윤여정)는 미나리를 처음 보는 손자에게 말한다. “미나리는 아무데서나 잘자라. 미나리는 어디에든 넣어 먹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평등해.” 그런데 그렇게 ‘원더풀(wonderful)’하고, ‘원더(wonder) 풀’이기도 한 미나리에 우리가 그동안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정이삭 감독이 이 식물의 이름을 딴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말이다.

  1966년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화녀〉(김기영, 1971)로 영화계에 첫발을 디딘 지도 50년이 넘었지만, 배우 윤여정 또한 미나리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어떤 장르에서든, 누구의 연출작이든, 어떤 배우와 앙상블을 이루든 늘 좋은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그게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크게 주목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존재감이 젊은 주연 배우들 뒤로 포커스 아웃 되어갔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 그녀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부각시킨 것은 극중 캐릭터가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전에 수십 년 동안 우리네 굵직한 드라마들, 흥행작들 및 크고 작은 화제작들 안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한국계 미국인인 정이삭 감독은 그런 그녀를 미국으로 불러 인생 최고의 필모그래피를 추가해주었다. 아마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의외성을 지닌 순자 역에 윤여정이 적격이라는 것을 간파했을 것이다. 물가에 파릇하게 자라난 미나리처럼 이 영화에서 순자는 싱그럽고 사랑스럽다.

〈미나리〉 스틸컷

  〈미나리〉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미국에 가서 서로를 구해주자고 했던 한국인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아칸소의 넓은 들판으로 이사를 온다. 그러나 부부의 속마음은 다르다. ‘제이콥’(스티븐 연)은 이 땅의 흙을 일구어 아이들에게 뭔가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반해, ‘모니카’(한예리)는 외딴 컨테이너 집이 한심한 데다 병원이 멀어 심장이 안 좋은 어린 아들 ‘데이빗’(앨런 김)이 걱정이다. 제이콥이 대출을 받아 농사를 시작하자 부부싸움은 잦아지고 집 안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날아온 순자는 이 가정의 위기를 봉합하기 위해 투입된 구원투수와도 같다. 몇 번의 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가족을 함께 하게 만드는 접착제로서 순자의 역할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첫 등장부터 순자는 여느 할머니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태어난 데이빗과는 문화적 차이가 크다. 데이빗은 처음에 밤을 입으로 깨서 주는 할머니를 더럽다고 생각하고, 냄새 나는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는 것도, 할머니가 가져온 한약을 먹어야 하는 것도 싫다. 파스타는 만들 줄 모르면서 마운틴 듀와 화투, 프로레슬링을 즐기는 순자의 모습이 데이빗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데이빗이 순자에게 음료수 대신 오줌을 갖다 주는 행위는 할머니에 대한 적대감이 극으로 치달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데이빗은 순자가 부모님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남다른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뛰지마’, ‘안 돼’와 같은 부정어를 많이 사용하는 부모님과 달리 순자의 언어는 ‘Strong boy’, ‘wonderful’, ‘네가 이겼다’처럼 긍정적이다. 이는 미나리 씨앗처럼 데이빗의 심장에 푸른 에너지로 자라나 마침내 그를 뛰게 만든다.

〈미나리〉 스틸컷

  데이빗의 시점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미나리〉는 미국 이민 1세대 한국인들의 성공 과정을 보여주는 대신 이들이 겪게 되는 다양한 역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순자가 가져온 미나리는 거센 비바람과 뜨거운 햇볕 속에서도 다시 살아나는 제이콥 가족의 강인한 생명력과 적응력을 의미한다. 이들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돈이나 성공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의 동행이라는 주제가 선명하다. 그래서 〈미나리〉는 이민자들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가족에 관한 영화이며, 무엇보다 삶의 보편적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그 의미가 더 크다. 이민이라는 특별한 경험 없이도 3대에 걸친 가족들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실수를 통해 가족들이 모두 거실에 모여 잠을 자게 만드는 당사자로서 영화의 해피엔딩을 견인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윤여정은 이처럼 조연이면서도 길지 않은 러닝타임 내에 다양한 감정과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순자 역을 오직 윤여정만의 스타일로 소화해냈다. 윤여정에게 대단히 특별한 연기는 아니었을지라도, 순자라는 캐릭터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딱 맞는 옷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정이삭 감독은 〈미나리〉가 ‘자식의 미래를 위해 희망을 걸었던 세상 모든 부모를 향한 러브레터’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에서 모니카 부부는 이름 대신 서로를 ‘지영 아빠’, ‘지영 엄마’라고 호칭한다. 우리 문화에서 익숙한 그 호칭이 아칸소의 외딴집에서 들릴 때마다 새삼 뭉클해졌던 것은 이제 제이콥보다 나이가 더 든 중년 감독의 고백이 진솔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윤여정의 품에 안긴 오스카상은 그가 어머니 세대의 배우에게 헌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선물이 아니었을까.


 


윤성은
영화학 박사. 201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이후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공연과 리뷰》 PAF 평론상 수상.

 

* 《쿨투라》 2021년 7월호(통권 8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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