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삶이 증명한 말
[7월 Theme] 삶이 증명한 말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1.07.08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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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말하면서 살지만, 누구나 한 말이 ‘어록(語錄)’으로 남지는 않는다. 어록은 “위인들이 한 말을 간추려 모은 기록”이다. 어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윤여정은 배우로서 걸출한 업적을 남겨 그런 사람이 됐다. 그녀가 남긴 말은 이제 세상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아름답고 멋있는 말은 말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나 멋있음이 100퍼센트 들어 있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이나 멋있음의 더 큰 비중은 발화 주체와 발화 맥락에 달려 있다.

  토씨 하나 안 바꾸고 내가 윤여정과 똑같은 말을 한다면 어떨까? 나는 그녀와 같은 울림을 사람들에게 줄 수 없을 것이다. 발화 주체와 발화 맥락이 딴판이라서 그렇다. 동일한 대본을 받아들어도, 일류 배우의 연기와 아마추어의 연기가 현격하게 차이나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왜’라는 육하원칙의 중요성은 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윤여정의 어록을 살펴보려 한다.

* 아래 인용한 윤여정이 남긴 말들은 「1970년부터 2021년까지 윤여정의 어록, 데뷔작 〈화녀〉를 찍기 전 부터 〈미나리〉로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소감을 남기기까지」(씨네21, 2021년 4월 27일)를 참고했음을 밝혀 둔다.

  “나는 나같이 살다 가면 되잖아. 언젠가부터 롤 모델이란 게 생겨서.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난데 왜 그 사람 흉내를 내. 난 나처럼 살면 되지.(많은 배우들이 윤여정을 롤모델로 삼는다는 말에) 미쳤지, 걔네들이 날 자세히 몰라서 그러지.”
  -2017년 10월 18일. tvN 현장토크쇼 〈택시〉중에서

  “저는 결코 미인이 아니죠, 김기영 선생님도 저를 퍼니 페이스(funny face)라고 하셨는데 저 역시 동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역은 근본적인 여성의 매력, 순종이나 미적인 감각을 벗어난, 웬만해선 타협이 잘 안 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역할입니다.”
  -1971년 3월 11일. 〈화녀〉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 후 《조선일보》와 인터뷰 중에서

  ‘남에게 구애받지 않고 나답게 살 거야.’ 이런 요지의 말이 그리 대단하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말을 10대 반항아가 아니라 70대 할머니가 했다면 의미가 달라진다. 아직 산전수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과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 한 말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다. ‘내가 한평생 살아보니 남들처럼 무난하게 사는 게 좋은 거더라.’를 인생의 진리인 양 설파하는 ‘어르신’들이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지. 이 같은 상황에서 “난 나처럼 살면 되지.” 하고 말하는 윤여정은 돋보일 수밖에 없다.

  한국 영화계에서 김기영은 기벽과 기행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그는 당시 한국 영화에서 아무도 성취한 바 없는 그로테스크 미학 영화들을 제작하면서 한국 영화사의 거장으로 기록되었다. 김기영은 새로운 배우 발굴 및 그들의 연기 잠재력을 스크린에서 폭발시키는 감독으로도 알려졌는데, 윤여정은 〈하녀〉(1960)를 김기영 스스로 리메이크한 〈화녀〉(1971)의 주인공 ‘명자’에 캐스팅돼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그녀의 열연은 국내외에서 인정받았다. 윤여정은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뿐 아니라 시체스 국제판타스틱 영화제 여우주연상도 수상했다.

사진제공_JTBC

  예쁘고 순종적이던 여성관이 대세이던 시절이었다. 대세와 상관없이 윤여정은 “순종이나 미적인 감각을 벗어난, 웬만해선 타협이 잘 안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역할”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난 나처럼 살면 되지.”라는 말을 그녀는 20대에 이미 공언하고 실천해왔다. 말의 무게는 말이 아닌 그 말을 한 사람의 삶이 결정한다는 사실이 실감되는 순간이다. 한편으로 그런 윤여정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북돋운 ‘어른’ 김기영의 혜안에도 새삼 감탄하게 된다. “난 나처럼 살면 되지.” 하는 다짐도 주변에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단단하게 다져지는 법이다. 아래 윤여정의 말을 들어보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연출가 선생님들이 ‘얼굴은 고사하더라도 쟤는 목소리 때문에 배우 안된다,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그러셨는데, 그분들이 다 고인이 되셨어요.”
  -2015년 3월 26일. JTBC 〈뉴스룸〉과 인터뷰 중에서

  단아하고 청순한 배우의 대명사로 불리던 김희애에게 윤여정이 한 말이다. 단아하고 청순한 배우 김희애를 대중은 좋아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대중이 싫증낸다는 냉혹한 진실을 그녀는 지적했다. 김희애라고 몰랐을 리 없다. 다만 용기를 내기 위해, 낯선 도전에 지지 의사를 보내줄 사람들이 있음을 확인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때마침 윤여정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김희애가 있지만 그걸 뛰어넘어야 박수를 받”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해 김희애는 유아인과 호흡을 맞춘 드라마로 단아하고 청순한 배우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며, 대중과 평단 양쪽에서 모두 박수 받았다. 타인에게 이 정도 감화를 줄 수 있어야 어록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윤여정의 말은 이걸 해냈다.

  어떤 일에 연륜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평가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다. 윤여정이 배우가 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던 “연출가 선생님들”은 하늘에서 본인의 언행을 후회할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윤여정은 탄탄대로를 걸어온 배우가 아니다. 과거 여배우의 덕목이라 여겨졌던 예쁜 얼굴과 고운 목소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배우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폄하한 감독도 많았다. 윤여정은 찬사 받으며 성장한 배우라기보다, 모욕을 견디며 자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온 배우다. 그래서 후배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사진제공_tvN 꽃보다 누나

  “넌 이런 역할 저런 역할 다 할 수 있는 연기자인데, 유리관 속에서 ‘김희애는 저런 여자구나’ 하고 보여주는 건 다 굴레 아냐? 너 편할 대로 하는 게 좋지 않아? TV고 영화고, 이게 마치 장애물 경기 같아. 사람들이 기대하는 김희애가 있지만 그걸 뛰어넘어야 박수를 받지, 그 김희애를 유지하면 매너리즘이라고 사람들이 내팽개쳐. 그래서 우리 직업이 참 무서운 거 같아.”
  -2013년 12월 20일 tvN 예능 〈꽃보다 누나〉중에서

 

 


허 희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글 쓰고 이와 관련한 말을 하며 살고 있다. 2019년 비평집 『시차의 영도』를 냈다.

 

* 《쿨투라》 2021년 7월호(통권 8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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