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고즈넉하게
[7월 Theme]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고즈넉하게
  • 최창근(극작가 겸 연출가)
  • 승인 2021.07.0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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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아주 예기치 않은 곳에서 우연히 그 누군가를 마주칠 때가 있다. 내게는 2010년 4월 1일이 바로 그날이었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 주최로 ‘실험과 도전, 식민지의 심연’이라는 주제 아래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가 열렸는데 그 행사에서 문학의 밤 총연출을 맡았던 것이 계기였다. 광화문에 있는 서울신문사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심포지엄이 끝나고 서울시중부여성발전센터 강당으로 자리를 옮겨 문인 유가족과의 대화, 작품 낭송과 연극, 무용, 음악공연 등을 다양하게 준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그때 일이 잊히지 않는 것은 그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문학인 중에 내가 정말 좋아하던 영문학자이자 시인이고 수필가인 피천득 선생이 끼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인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 안막, 안함광, 이북명, 이찬, 허준들은 일제 강점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통과한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식인이자 작가들이었지만 유독 문학의 밤 준비에 특별히 정성을 기울인 것은 작가 명단에 있던 피천득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을 큰 보람이자 낙으로 여긴 탓이었다.

  행사의 연출 컨셉을 ‘후배작가들이 들려주는 선배작가 이야기’로 잡았는데 문학의 밤 전날까지 출연진을 확정짓지 못하고 있었던 문인이 피천득이었다. 여러 작가들의 유족을 대표한 분이 피천득 선생의 아드님이자 소아과 전문의로 명망 높던 피수영 선생님이었다. 피 선생님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낭독자가 따로 있는데 그이가 배우라서 스케줄 조정 때문에 행사 하루 전까지 참석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 배우가 바로 윤여정이었다. 알고 보니 피수영 선생님과 윤여정 선생님은 예전부터 친분이 돈독한 친구 사이였다. 그날 사회를 맡았던 문학행사의 사회를 잘 보기로 유명한 하성란 소설가도 피수영 선생님과 인연이 있었으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각 분야의 선수들은 다 모였던 셈이다.

사진제공_대신문화재단

  아직도 선연하게 떠오른다. 피수영 선생님의 선친에 대한 회고 후에 작은 강당의 무대에 올라 “수필은 청자연적이다”로 시작되는 피천득의 「수필」을 고즈넉하고 나지막하게 읽어내려가던 가녀린 체구의 그녀의 모습을. 아,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워라. 어떤 과장이나 꾸밈 없이 수수하고 소탈하게 낭독하는 피천득의 수필론이 얼마나 큰 울림을 독자나 관객들에게 전해주었던가. 그날 그곳에 모여 피천득의 「수필」을 낭랑하게 들려주는 윤여정의 낭독을 체험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엄청난 축복을 누린 행운아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배우가 아닌 문학 낭독가로서의 또 다른 윤여정을 발견했다.

  지난 20년 동안 국제적인 작가축제나 인문학콘서트, 크고 작은 문학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해왔고 연극무대에서도 당대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시나 소설, 동화나 희곡을 낭독하는 것을 보아왔지만 그렇게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객석을 휘어잡으면서 ‘고요한 침묵의 힘’으로 청중들을 매료시키고 끝내는 서늘한 감동을 선사한 이는 윤여정 선생님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독백 같은 읊조림은 그 어떤 웅변이나 함성보다도 더 크고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

  평소에도 간간히 접하는 언론 매체를 통해 마종기 시인의 시를 애송하는 그녀가 문학과 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전공도 연극영화학이 아니라 국문학이었고!) 그날 이후로 윤여정은 내 마음에 가장 문학적인 배우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보면 영화 관계자들이 기억하는 윤여정은 일찍이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로 영화 〈화녀〉와 〈충녀〉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팜므파탈이었겠지만 내게 윤여정 하면 떠오르는 그녀의 이미지는 김수현과 노희경의 드라마에 단골로 출연했던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 하고는 조금은 다른 ‘엄마’였다. 그 분야의 대가들인 김수현과 노희경은 서로 스타일은 다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문학적인 드라마작가인 것도 그렇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문학적인 배우 윤여정의 학창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영화는 2019년에 세상을 떠난 고 류장하 감독의 데뷔작 〈꽃 피는 봄이 오면〉(2004)에서 최민식 선배가 맡아서 열연했던 작곡가 현우 엄마 역을 통해서이다. 감독의 어머니를 모델로 빌려왔을 것 같은 자전적인 영화에서 잠자리에 누워 엄마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냐고 묻는 아들에게 윤여정은 지난 시절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엄마가 말이야. 학교 다닐 때는 글짓기도 잘해서 나중에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전통적인 어머니 상과는 다른 개성이 강하고 독립적인 엄마 역을 자주 소화했던 그녀가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으로 다시 한 번 변신한 것은 창 감독의 〈계춘할망〉(2016)을 통해서였다고 평가받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잘나가지 못하는 자식을 부드럽고 따듯하게 감싸 안는 〈꽃 피는 봄이 오면〉에서의 현우 엄마가 그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류장하 감독님은 데뷔작에서의 인연 때문이었는지 영화감독들이 연극 연출을 하게 됐을 때 엄마 역으로 윤여정 선생님을 강력하게 추천했었다. 2009년 겨울 ‘감독, 무대로 오다’라는 전체 타이틀로 한국을 대표하는 류장하, 허진호, 장항준, 김태용 네 명의 영화감독으로 라인업이 짜여진 첫 공연에 희곡 쓰는 후배작가와 함께 대본작가로 참여하게 됐을 때 나는 윤여정 선생님과 더불어 김혜자 선생님을 추천했었다. 〈엄마, 여행 갈래요?〉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라간 그 연극에서 결국 아들 역으로 캐스팅 된 김상경, 김성수와 같이 호흡을 맞춘 것은 오미연과 예수정 선생님이었지만 그 작업을 통해서도 영화감독들이 ‘윤여정’이라는 배우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과 신뢰를 넘어선 일종의 경외심 같은 기꺼운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한국영화 100년을 맞아 《쿨투라》에서 진행한 20세기와 21세기를 대표하는 여배우 두 사람을 꼽으라는 설문에서 보통의 영화관계자들과 비슷하게 21세기의 배우는 전도연과 김민희를 택했지만 20세기의 배우로 내가 지목한 사람은 약간은 엉뚱하고 조금은 뜻밖에도 김혜자와 윤여정이었다. 최은희나 김지미, 윤정희, 장미희, 강수연처럼 한 시대를 주름잡고 풍미했던 밤하늘의 별과 같은 배우들이 훌륭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나문희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두 배우가 20대의 젊은 나이에 데뷔해서 세기가 바뀌고 나이가 들어서도 현장에서 꾸준하게 영화를 찍고 있다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한동안 자주 회자됐던 세간의 유행어처럼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존재 자체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여정 선생님은 아카데미 영화제 시상식 직후에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그녀 특유의 기지와 재치를 담아 “나는 최고가 싫어. 다들 중간 정도로 최중처럼 살면 안 되나.” 같은 윤여정의 어록에 남을 만한 말을 남겼다. 다 같이 나눠 먹고 사는 사회가 좋겠다고 말하고 나서 옆에 있던 후배 배우 한예리에게 나, 이거 이러면 사회주의자인가? 라면서 가벼운 유머처럼 웃고 넘겼다. 나는 그녀의 유머가 한국 같은 가부장제 유교사회에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 기죽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당신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담긴 ‘단순한 진심’이었다고 믿는다.

  이제 막 지천명에 접어든 나 역시 그녀의 생활을 본받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에서 꾸준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작업해보리라 마음을 다잡아본다. 새롭고 창조적인 작업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배우는 태도와 자세로 남은 삶을 매 순간 열정적으로 불태워 보고 싶다. 그것이 문학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아니면 또 다른 삶의 형태이든.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한 우리는 또 다른 예술의 현장에서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타고 난 문학낭독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아티스트 윤여정의 행보는 그러하기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최창근
희곡을 쓰고 공연을 연출하고 있다. 최근에 새로 영화작업을 시작했고 감독한 영화로 〈단순한 진심〉과 〈잃어버린 계절〉이 있다. 극단 제비꽃·제비꽃 필름 대표

 

* 《쿨투라》 2021년 7월호(통권 8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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