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윤여정은 드라마다
[7월 Theme] 윤여정은 드라마다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1.07.0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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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은 윤여정의 해다. 그녀는 한국영화사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배우로 우뚝 섰다. 그런데 그녀에게 큰 영광을 안겨준 영화 〈미나리〉에서 그녀는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 모니카의 엄마 역할, 즉 ‘조연’이다. 그녀가 받은 상의 타이틀 역시 여우‘조연’상이다. 영화 안 조연이 영화 밖에서 주연보다 더 빛난 조연이 된 것이다.

  윤여정은 영화 〈화녀〉에서부터 〈하녀〉, 〈돈의 맛〉, 〈다른 나라에서〉, 그리고 〈미나리〉에 이르기까지 영화배우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배우 윤여정의 빛나는 시간은 전부 영화의 차지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드라마가 자리하고 있다. 그녀가 연기를 시작하고(1966년 TBC 공채 탤런트 3기), 그녀가 배우로서 처음 연기력을 인정받고(1971년 드라마 〈장희빈〉), 그녀가 긴 공백기를 거쳐 재기의 발판을 다지게 된 것(1987년 드라마 〈사랑과 야망〉) 그리고 그녀가 배우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삶의 존엄성을 지켜나간 것은 모두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윤여정의 드라마

  영화에서 윤여정은 당대의 상식에서 벗어난 문제적 인물로 등장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하지만 드라마에서의 윤여정은 다르다. 우리가 기억하는 드라마 속 윤여정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엄마와 아내, 그리고 할머니의 얼굴이다. 배우 윤여정의 인생에서 영화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도전과 모험의 무대라면 드라마는 그녀가 기나긴 하루를 견뎌내는 삶의 현장이다.

  2010년 영화 〈하녀〉로 칸국제영화제에 진출한 직후에도 윤여정은 일일극 〈황금물고기〉에서 경산의 아내로, 주말극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영구 엄마로 출연했다. 2021년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고도 달라진 것은 없다. 그녀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4대에 걸친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파친코〉에서 또 한 명의 엄마와 할머니로 출현 중이다. 뜨거운 기립박수와 함께 영화의 막이 내리고 그녀는 스크린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와 누구보다 친숙한 얼굴로 조용히 드라마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영화 속 인물이 두 시간짜리 짧고 강렬한 삶을 산다면 드라마의 등장인물은 수십 수백의 긴 시간 동안 길고 느린 호흡으로 인생을 살아낸다. 그렇게 희로애락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겪어낸다. “어렵게 연기 기회를 잡을 때마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는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인생을 묵묵히 지탱해온 것은 화려하진 않지만 한결같이 그녀의 곁을 지켜낸 드라마다. 윤여정의 삶에서 드라마는 가장 중요한 ‘조연’이다.

〈하녀〉 스틸컷

  윤여정의 드라마 연기

  윤여정에게 거창한 연기론 같은 것은 없다. 누구처럼 예술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연기자가 나의 천직이라고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목숨 걸고 한 거였어요.” 드라마가 그녀에게는 삶이고 현실이었듯 그녀의 연기는 과장되지 않은 다큐멘터리를 닮아있다. 영화에서의 그녀는 파격적이고 독특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 해내 큰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와 할머니로서 다른 등장인물과 함께 어울리며 조화로운 연기를 선보인다 .

  지금까지 출연한 100여 편의 드라마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비중도 캐릭터도 다 다르다. 하지만 그녀 혼자 튀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들숨과 날숨의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그녀는 호흡하듯 자신이 맡은 역할에 조용히 스며든다. 다림질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연기가 몸에 익을 때까지 다리미를 들고 옷을 다리며 100번씩 대사를 연습한다. 윤여정은 그녀 특유의 사실적인 연기로 어딘가 있을 법한 인물을 창조해낸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그녀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어린 아들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가 돈이 필요해 돌아온 중년 여성을 연기한다. 극중 그녀는 성인이 된 아들에게 이제까지 단 한 명도 자신을 아껴주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하소연한다. 이때 윤여정은 눈가를 딱 한 번 훔친다. 신세를 한탄하며 통곡하기보다 무덤덤하게 눈물을 삼키는 것으로 슬픔을 극대화한다. 그렇게 그녀는 아들을 버린 매정한 엄마가 아닌 사랑을 갈구하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탄생시킨다. 윤여정에게 드라마는 삶이고 삶은 곧 드라마다. 인생을 연기하는 배우, 그녀가 바로 윤여정이다.

  윤여정의 드라마 작가

  김수현과 노희경, 두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윤여정은 그녀만의 ‘오리지널’ 드라마를 제작한다. 행복과 불행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인생의 롤러코스터 앞에서 ‘배우’ 윤여정은 언제나 김수현 작가와 함께였다. 1972년 만 25세의 신인배우 윤여정은 김수현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 〈새엄마〉에 출연해 대중적인 스타 반열에 올라섰으며, 긴 공백기 이후 배우 생활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야망〉으로 다시금 큰 인기를 얻는다. 그 후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과 같은 90년대 최고 인기 드라마에 연이어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진다 .

  세월의 풍랑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간’ 윤여정은 그 모습 그대로 노희경 작가에 의해 브라운관으로 소환된다. 1997년 〈내가 사는 이유〉에서 윤여정은 술집 마담 손 언니로 나와 까칠한 말투로 인생의 지혜가 담긴 말들을 툭툭 내던진다. 2008년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녀는 조연 전담이지만 후배 배우들에게는 존경을 받는 멋진 배우 오민숙으로 등장해 2021년 윤여정의 ‘오래된 미래’를 실감 나게 연기한다. 그렇게 윤여정은 김수현, 노희경 두 작가와 함께 윤여정의 ‘오리지널리티’를 구축하며 자기만의 브랜드를 가진 ‘특별한’ 배우로 발돋움한다.

  윤여정의 윤여정

  제2의 누구로 불리기보다는 그냥 ‘윤여정’이고 싶다는 그녀. 윤여정의 유일한 경쟁자는 윤여정 본인이다. “배우는 쉬운 연기를 하면 내가 망하고 있는 거로 생각하면 된다.” 윤여정은 과거가 아닌 미래의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늘에 떠 있는 높은 별을 잡은 순간에도 그녀는 걷고 또 걷는다. 영화가 건네는 환한 미소에 잠시 시름을 잊고 달콤한 꿈에 젖어 들 때도 있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는 ‘지금 이 순간’의 윤여정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연기 잘 하는 배우다. 미래의 윤여정에게 기꺼이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주고 한 걸음 뒤에서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조연. 배우 윤여정의 ‘여정’은 현재진행형이다.

 

 


김민정
이화여자대학교 연론홍보영상학부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창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에서 스토리텔링콘텐츠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저서로 드라마 인문교양서 『당신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가요』 『당신의 밤을 위한 드라마 사용법』 소설집『홍보용 소설』 이 사람 시리즈 『한현민의 블랙 스웨그』 등이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 《쿨투라》 2021년 7월호(통권 8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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