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윤여정이라는 캐릭터
[7월 Theme] 윤여정이라는 캐릭터
  • 김세연(미디어비평가)
  • 승인 2021.07.08 11: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TV 속 나이든 여자의 모습은 대개 둘 중 하나다. 어머니 아니면 아줌마. 자애롭고 헌신적이며 숭고한 ‘어머니’든가, 어딘가 좀 모자란 듯 괄괄한 목소리로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아줌마’든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 청순미를 자랑하던 여배우가 결혼 후 예능프로에 나와 푼수 같은 말을 툭툭 내뱉거나, 억척스러운 모습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한다. 나이 듦에 대한 여성들의 불안은 당연한 것 같다. 대부분은 숭고한 어머니가 될 자신도, 푼수데기 아줌마가 될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니어 여성 롤모델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요즘 윤여정 신드롬이 분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입을 모아 ‘윤여정처럼 늙고 싶다’고 말한다. ‘늙고 싶다’라니. 그런 표현이 우리 사전에도 존재했던가. 〈현장토크쇼 택시〉(tvN)에서 윤여정은 이렇게 답한다. “걔네가 미쳤지. 롤모델 그런 거? 넌 너고 난 나면 돼!”

  윤여정이 다른 중년 여배우들과 다른 점은 푸근하고 정겨운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윤여정은 영어를 잘하고 이지적이다. 똑부러지고 깐깐하다. 젊은 시절 악녀를, 후에는 커리어우먼을 주로 연기했다. 과거에는 드물던 이혼녀 배우였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녀를 차가운 도시 여자로 기억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 것은 예능프로그램 출연 이후였다. 모던하지만 소탈함. 깐깐하지만 초연함. 쿨하지만 세심함. 미묘한 모순에 시청자들은 신선한 끌림을 느꼈다. 우리를 ‘윤며들게’(윤여정+스며들다) 만든 것은 그런 의외성에 있다.

출처_tvN 유튜브 페이지

  윤여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나영석 예능’일 것이다. 〈윤식당〉(tvN) 첫 촬영 당시 나영석 PD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 때문에 당황했다고한다. 처음 〈윤식당〉을 기획할 때 그는 영화 <카모메 식당>처럼 여유롭고 한가한 식당을 떠올렸다고 한다. 커리어우먼답게 요리를 싫어하는 여정이 주방일을 내팽개치고 빈둥거릴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윤식당은 여정의 진두지휘 아래 매일 매출 신기록을 갱신한다. 나 PD는 그녀에 대해 “인형 눈알 박기를 해야 하면 당장 오늘 100개는 하실 분이더라”며 혀를 내둘렀다.

  물론 그것은 시청자들에게도 의외였다. 자타공인 패셔니스타 윤여정은 편한 반바지 차림과 흐트러진 머리로 정신없이 불고기를 볶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쉬는 시간에는 신메뉴를 개발하고, “자, 한 걸음씩 나가자고”라며 전의를 불태운다. 퇴근 후 숙소에 돌아와 노안 교정용 선글라스를 닦는 모습은 마치 연장을 벼리는 목수 같다. 나 PD 말마따나 “식당이 안 되면 큰일 날 것처럼” 구는 것이다. 그러는 한편, 행정상의 문제로 식당이 철거되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는 비교적 침착하다. “다 철거된다는데 한 집만 남겨놓는 건 말이 안 되지”라며 상황을 받아들이고, “여기서 죄송한 사람이 어딨어.”라는 말로 제작진을 다독인다.

  그녀의 이중성(?)에 대한 의문은 다른 장면에서 풀린다. 〈꽃보다 누나〉(tvN)에서 윤여정은 이혼 직후의 삶을 이렇게 회고한다. “너무 힘들었어. 이 애들(자식)을 먹여 살려야 된다는 미션이 있었기 때문에. 백 계단을 올라가라면 올라갔고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진짜 더럽게 일했어.” 싱글맘이 되어 연예계에 복귀한 그녀에게는 무시와 냉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때 청춘스타였던 여정에게 주어지는 것은 고작 단역뿐이었고, 시청자들은 그녀를 싫어했다. 그러나 윤여정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기에 작은 일부터 찾아 나섰다고 한다.

  얘기를 듣고 보면, 〈꽃보다 누나〉(이하 ‘꽃누나’)에서 이승기를 대신해 외국인에게 길을 물어보는 장면이 다르게 해석된다. 지성미가 돋보인다고만 생각했던 이 장면에서 지나간 세월이 겹쳐보이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작은 보폭으로 움직이는 것, 상황을 예민하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것. 그녀의 세련됨은 더 이상 고고한 귀부인의 그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생존을 위해 자신을 단련해온 사람의 굳은살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진다.

  사실 윤여정의 재발견은 그녀의 솔직한 성격과 나영석 예능 스타일이 합쳐졌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보통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캐릭터’가 중요한데, 웃음 유발을 위해 출연자의 특정 부분을 과장하고 그에 반하는 면은 감춘다. 출연자는 점점 특정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캐릭터에 맞는 행동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영석 예능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런 면이 적다. 만일 윤여정이 나 PD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빈둥거리는 사장 역할을 했다면 어땠을까. 모던 레이디나, 국민 어머니 캐릭터가 되었다면? 어느 쪽이든 틀 안에 들어갔을 때 그녀가 가진 진짜 매력은 온전히 빛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 PD는 섭외 후기에서 ‘윤여정은 나이가 들어도 어머니가 아니라 그냥 윤여정이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나이가 들었을 때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어머니나 아줌마? 아니면 다른 무엇? 우리는 이제 답을 알고 있다. 무엇도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윤여정이 윤여정인 것처럼, 나도 나이가 들었을 때 그저 나일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단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모호한 두려움의 장막이 걷힌다. 윤여정은 그녀를 롤모델로 삼겠다는 청년들을 만류한다. 그에는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윤여정은 우리의 롤모델이 된다.

  이쯤 되니 어디선가 윤여정 배우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듯하다. 요즘 유행한다는 ‘휴먼여정체’로 마무리해볼까 한다.

  ‘어유 얘, 나 미쳐 증말. 글이 너무 저기하다. 어째뜬지 간에 몇 문장은 좀 빼는 게 어뜨까싶어. 으응, 이러다 나 동상 서겠네.’

 

 


참고문헌
이화정, 「〈윤식당〉 윤여정, 나영석 PD와의 대화」 《씨네21》, 2017.

김세연
미디어비평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소설집 『홀리데이 컬렉션』이 있다. 현재 동국대 다르마칼리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 《쿨투라》 2021년 7월호(통권 85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