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편견’을 먹고 자란 윤여정의 특별함
[INTERVIEW] ‘편견’을 먹고 자란 윤여정의 특별함
  • 안진용(문화일보 기자)
  • 승인 2021.07.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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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스틸컷
ⓒ판씨네마

  “할머니는 할머니 같지 않아요.”

  배우 윤여정에게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긴 영화 〈미나리〉에서 손자 데이비드(앨런 김)는 순자(윤여정)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느 할머니처럼 쿠키도 구워주지 않고, 밤사이 이불에 오줌을 싼 자신을 향해 ‘페니스 브로큰’이라고 놀리는 순자가 못마땅한 탓이다. 

  이는 현실 속 윤여정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올해 74세인 그와 비슷한 또래 배우들을 가리켜 한국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원로(元老). 경력과 공로가 많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났다는 의미다. 젊은 후배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고 이제는 그들의 엄마, 혹은 아버지 역할에 만족할 나이라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윤여정은 그렇지 않다. 1966년 19세의 나이로 데뷔한 후, 1971년 고(故) 김기영 감독의 영화로 시체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며 일찍 폈던 꽃은 50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보낸 후 재차 만개했다. 그 꽃의 색은 더욱 선명하고 향기 또한 일품이다.

  “나는 옛날 여배우입니다.”

  윤여정은 나이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미국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도 스스로를 “old-time actress(옛날 여배우)”라고 칭했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그의 성향은 ‘솔직함’이다. 장년에 접어든 대다수 배우들이 나이에 매몰되는 것을 부정하는 반면, 윤여정은 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또 활용한다.

  수상 릴레이의 시작이었던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을 때도 그는 “나는 그냥 나이 많은 노배우이지 않나.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뭘 이뤄내는 걸 보면 장하다. 젊은 사람들이 나보다 낫다 싶으면 애국심이 폭발한다”며 후배들에게 공을 돌렸다. 자세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높이는 윤여정다운 화법이다.

  시계를 돌려보면, 윤여정의 전성시대는 2003년부터 다시 시동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그는 임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했다. 노출과 표현 수위가 높아 다른 여배우가 거절한 역할이기도 했다. 출연 이유에 대해 윤여정은 “당시 집수리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나 역시 꺼려졌지만 돈이 너무 급해 결국 수락했다”면서 “배우는 돈 필요할 때 연기를 제일 잘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임상수와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줬다. 이후 임 감독의 영화 〈하녀〉(2010)와 〈돈의 맛〉(2012)으로 연이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아 뤼미에르 극장 레드카펫을 밟았다. 이 자리에는 드레스코드가 있다. 남배우는 턱시도, 여배우는 드레스다. 내로라하는 배우와 감독들이 즐비하고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가 몰리는 이 자리는 유명 브랜드들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당시 드레스 협찬 여부를 묻는 필자의 질문에 윤여정은 “나처럼 늙은 여배우에게는 협찬 안 해준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돈의 맛〉때는 “두 벌 협찬 받았다. 칸 한번 다녀오니 대우가 달라지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자신을 향한 편견을 인정하고 당당히 맞서는 것을 넘어 이를 깨나가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사진_the academy<br>
ⓒOscar

  “아이들의 잔소리가 상을 받게 했습니다.”

  전 세계 공통 언어가 있다. 유머. 웃음 앞에서는 모두가 무장해제된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2019)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에 오르며 다양한 유머로 화제를 모았듯, 윤여정 역시 거침없는 화법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는 선댄스영화제에서부터 좌중의 웃음보를 자극했다. 〈미나리〉의 촬영 에피소드를 전하며 그는 “〈미나리〉는 독립영화라서 출연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아주 많이 고생할 걸 알았기 때문이다. 돈을 아끼느라 우린 한집에 살았고 그렇게 가족이 됐다”고 엄살을 부렸다. 출연진과 제작진의 가족애는 〈미나리〉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저예산 영화를 찍으며 척박했던 제작환경은 그들의 애틋한 동지애로 위로받았고, 숱한 영화제에서 수상 행렬을 이어가며 또 다른 형태로 보상받았다. 정작 윤여정은 미국 골든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른 직후 가진 화상 인터뷰에서 “세계에서 26개 상을 받았는데 나는 아직도 하나밖에 손에 쥔 게 없어 실감을 못 한다”며 “이 나라(미국) 는 땅덩이가 크니까 상이 많다고 생각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윤여정의 유머는 가장 떨리는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극대화됐다. 호명되어 단상에 오르자마자 그는 <미나리>의 제작자이자 시상자였던 브래드 피트를 향해 “반갑다. 저희가 영화 찍을 때 어디 계셨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농담을 던져 현장을 웃음 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이어 “두 아들에게도 감사하다. 두 아들이 저한테 일하러 나가라고 종용한다. 아이들의 잔소리 덕분에 엄마가 열심히 일했더니 이런 상을 받는다”고 두 아들을 향한 사랑을 에둘러 표현했다. 미국 CNN을 비롯해 유수 언론들은 윤여정의 유머가 빛을 발하던 대목을 이번 아카데미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저는 한국에서 온 윤여정입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로 호명된 후 마이크를 잡은 윤여정은 대뜸 “저는 한국에서 왔다. 이름은 윤여정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가장 유력한 여우조연상 수상 후보이자 그동안 수십 개의 트로피를 받아온 그의 이름을 어찌 모를 수 있으랴.

  윤여정은 이어서 말했다. “유럽 분들은 제 이름을 ‘여여’라고 부르거나 ‘정’이라고 부르는데, 모두 용서 해드리겠다.” 〈기생충〉의 명대사를 빌리자면 굉장히 상징적인 문장이었고, 윤여정의 멘트에는 다 계획이 있는 듯했다. 이는 백인 배우나 감독에게 주로 상을 주며 ‘오스카소화이트(OscarSoWhite·백인중심)’라 는 오명을 쓰고 있는 아카데미를 향한 일침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두고 아시아 배우의 이름조차 제대로 외거나 발음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윤여정’이라는 이름 석 자를 똑똑히 각인시킨 대목이었다.

  윤여정이 이에 앞선 4월 초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후 “콧대 높은(snobbish) 영국인에게 이 상을 받아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한 것도 궤를 같이 한다. 좀처럼 아시아 영화나 아시아 배우에게 문을 열지 않는 그들의 폐쇄성을 지적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윤여정은 오만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승리 후 깃발을 꽂은 개선장군이 아니라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트로피를 두 손으로 받든 모양새로 “저는 경쟁을 믿지는 않는다. 어떻게 글렌 클로즈와 같은 대배우와 경쟁하겠나. 다섯 후보 모두 다 다른 역할을 영화에서 해냈다. 경쟁은 없다. 내가 그냥 운이 좀 더 좋아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며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다섯 명을 향해 존경을 표했다. 이 때 감격한 표정으로 “I love her(윤여정이 너무 좋다)”라고 말하는 어맨다 사이프리드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사진_&lt;미나리&gt;
ⓒ판씨네마

  “내가 말년이 좋다”

  2018년 1월 영화 개봉 당시 윤여정과 긴 시간 인터뷰를 나눴다. 운 좋게도 그와 기자 2명만 앉아 수다 떨듯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당시 tvN 예능 으로 주목 받던 그는 “〈윤식당〉이 내 대표작”이라며 농담하며 “내가 사주를 봤는데 ‘말년이 좋다’더라. 위안을 얻었는데 진짜 나아지더라. 얼마나 좋을지 지켜보자”고 말했다.

  실제로 윤여정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그는 미국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의 주연도 맡아 이미 촬영을 마쳤다. 공교롭게도 〈화녀〉(1971) 속 명자, 〈미나리〉의 순자를 거친 윤여정이 〈파친코〉에서 맡은 역할의 이름은 ‘선자’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지난한 삶을 산 한 여성의 일대기를 그린 이 작품을 통해 윤여정은 다시 한번 세계 시장을 공략한다.

  윤여정은 요즘 국경을 초월해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배우다. 단연 그의 다음 시선이 어디로 향할지 관심이 쏠린다. 윤여정은 〈파친코〉 촬영 도중 《인디 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두 가지가 진행되고 있는데 거의 죽을 지경이다. 한 가지는 한국에서 진행되고 다른 하나는 아닌데, 말해 줄 수 없다”고 답했다. 이에 《인디와이어》는 “혹시 봉준호 감독과 함께하는가?”라고 돌직구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에 윤여정은 “곧 알게 되겠지(We’ll see)”라고 답했다. 그의 다음 행보가 더 궁금해지는 이유다.

 

 


안진용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저서로 『방송연예산업경영론』(공저)이 있음.

* 《쿨투라》 2021년 7월호(통권 8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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