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에밀 모세리의 사운드스케이프로 더해진 이야기들: 〈미나리〉의 음악
[7월 Theme] 에밀 모세리의 사운드스케이프로 더해진 이야기들: 〈미나리〉의 음악
  • 서영호(음악가)
  • 승인 2021.07.08 1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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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의 첫 장면, 그러니까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아름다운 시골의 한적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한 가족의 모습에 대사 대신 공간을 가득 채운 음악의 어우러짐으로 이루어진 인트로 장면은, 이 가족 앞에 펼쳐질 미래이자 우리에게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어떤 가족 서사의 아름다움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단 첫 장면뿐만 아니라 영화를 관통하여 마지막의 화재 장면을 제외하곤 딱히 극적인 사건이나 갈등, 긴장 없이 전개되는 이 가족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청자의 머릿속에 다채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을 이끌어내는 에밀 모세리의 음악이다.

  어떤 순간에 영화음악은 장면이 보여주는 것을 보충 설명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면에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 경우 음악은 화성과 리듬의 단순 ‘배치’로 마치 드라이아이스처럼 심상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관여하기보다, 구체적인 자신만의 주장이나 이야기를 호소하고 나선다. 즉 철저히 미장센을 위한 소품으로만 머물기보다 음악 자신의 호소가 또 하나의 대사나 혹은 내레이션처럼 기능하는 것이다. 보통은 이때 그 음악은 영상과 별개로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으로 감상하기에도 충분한 음악적 조형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음악은 대부분 명징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영화의 장면만큼이나 오래도록 각인된다. 누군가의 메시지가 정제되고 구체화된 언어로 표현 될 때 결국 그 의미가 분명해지듯, 소리가 전하는 의미가 선명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보다 선명하고 인상적인 멜로디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엔니오 모리코 네나 존 윌리엄스의 음악들이 그렇다. 그리고 에밀리 모세리의 미나리 OST 역시 그러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미나리〉 스틸컷

 거의 완벽한 영화의 인트로를 여는 데 중요하게 기여하는 Big Country는 영화음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선율을 남기는 테마다. 영화의 엔딩에서 한예리의 보컬과 함께 Rain Song으로 리프라이즈reprise 되기도 하는 이 테마는 한 가족의 이야기에 역사성과 보편성을 부여한다. 즉 우리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미 이 패밀리 앤썸family anthem으로서 테마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과 사운드스케이프를 통해 이 가족의 서사가 인종을 떠난 모든 가족의 이야기이며 모든 이민자의 역사로 남겨질 이야기임을 직감한다.

  Jacob and  the Stone의 테마는 이 가족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 대지와 자연의 테마다. 매우 단순하고 보편적인 화성과 선율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바로 그 화성 진행의 포용력은 자연의 그것과 닮아 있다. 이 테마는 ‘빅 가든’을 만드려는 제이콥, 미국의 아칸소에 한국식 농사법을 적용하려는 제이콥, 물이 끊기고 자신을 증명하는데 실패할 지도 몰라 노심초사하는 제이콥의 몸부림을 묵묵히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대지의 표상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또 결국은 이 낯선 땅에 미나리처럼 자신들만의 새로운 삶을 뿌리내리는 가족을 위한 대자연의 테마가 되기도 한다. 특히 영화의 막바지에 농작물 창고에 일어난 화재로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위기가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에 흘러나오는 Jacob and the Stone의 테마는 이 ‘전소’가 곧 ‘해소’임을, 곧 가족을 위한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임을 일러준다. 가족은 화재로 인해 서로의 의미를 확인하고 더 공고해지며 해결하지 못했던 감정들에 대한 해답을 찾고 새날을 맞는다.

  신비롭고도 슬프도록 아름다운 Garden of Eden의 테마는 겉으로 드러나는 안온함과 그 사이에서 알 수 없이 솟아 자라나는 불안과 의혹이 뒤엉킨 소리다.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햇살 좋은 날의 모니카의 표정이나, 한켠에 잘 수확한 농작물은 안고 데이빗의 심장을 체크하러 대도시로 길을 나서는 가족의 모습을 따라가는 카메라에서, 대사 없는 이 장면들에 많은 이야기를 심어주는 것 또한 이 Garden of Eden의 테마이다.

음악 감독 에밀 모세리

  특히 이 영화는 곳곳에 기독교적 심상들이 포진해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감독 자신이 ‘신의 계획’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을 돌아보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비록 영화가 섣불리 종교적 세계관을 권하고 있지는 않지만 극중 배역들의 이름이나 ‘폴’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 주는 장면들, 교회 장면, 미나리밭의 뱀 장면 등은 이 가족에게 지속적으로 손길을 내미는 신의 그림자를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 어떤 존재는 여러 테마 음악들을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음성을 통해 그 모습을 비춘다. 에밀 모세리와 콰이어의 목소리에 특별 효과를 덧입히거나, 신디사이저의 모듈레이션 등을 이용해 표현한 거룩하거나 기묘한 신의 음성, 혹은 천사들의 합창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소리들은 다양한 테마에서 다양한 얼굴로 가족의 삶에 개입한다. 꼭 특정 종교의 신이 아니더라도 구원에 대한 지속적인 기원과 그 기원에 응답하는 어떤 존재가 이 가족의 이야기를 관장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이 소리들 역시 영화의 서사를 완성해주는 또 다른 장치다.

 

 


서영호
음악가. '원펀치'와 '오지은서영호'에서 활동. 《쿨투라》 신인상 공모에 '영화음악평론'으로 당선. 주요 앨범으로 〈Punch Drunk Love〉, 〈작은 마음〉 등이 있다.

 

* 《쿨투라》 2021년 7월호(통권 8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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