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Theme] Fantasy - 문학
[1월 Theme] Fantasy - 문학
  • 이서영 (SF 판타지 작가)
  • 승인 2019.01.30 15: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입이 없는 비명, 오직 환상 속에 있는

 로즈 메리 잭슨은 『판타지 : 전복의 문학』에서 판타지에 대해 “금기된 것을 드러내는 상상력”이라고 정의내린 바 있다. 사회적으로 타당하게 설명 가능한 것이 아닌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자체로 이미 급진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존재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하는 이들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이들이다. 부정된 이를 언급하는 것은 질서에 대한 위반이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어떤 이들은 고개를 갸웃하게 될 것이다. 판타지는 적어도 00년대 이후 가장 잘 팔리는 서사 중 하나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마블 유니버스에 이르기까지. 왕좌의 게임은 또 어떤가.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서 별에서 온 그대와 도깨비가 전국을 쥐락펴락 하는 상황까지 왔다. 그럼에도 판타지가 위반의 서사가 될 수 있을까?

 확실하고 가능한 것과 불확실하고 불가능한 것 사이에 사변소설이 존재한다. 초현실적 가정을 아우르며 사고실험을 진행하는 이야기들. 흔히 사변소설로 분류되는 소설이라면 드라마 <시녀이야기>의 원작,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를 들 수 있겠다. 가능하지 않은 초월적 공간에 자리매김한 여성들은 여성에게 주어진 다양한 굴레들을 나눠가지면서 기이한 세계를 점유해나간다. 주인공은 재생산과 섹스를 담당하는 시녀 역할을 맡고 있지만, 트로피를 맡은 정실부인, 돌봄 노동을 맡은 하녀 등, 비현실적 세계 속에서 억압은 분화를 통해 극대화 된다. 다층적 억압들은 현실의 차원에서 뭉뚱그려져 있을 때는 제대로 눈에 띄지 않았다. 현실의 한쪽 경계를 무너뜨리는 순간 지금까지 보지 못 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조금 더 강력한 환상으로 고개를 돌려본다면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가 있다. 이 소설은 판타지를 통해 수많은 경계들을 드러낸다. 현실 속에서 주인공 코니는 성·인종·빈곤·계급에 이르는 다층적 굴레 안에 있다. 70년대 미국 사회에서 보았을 때는 당연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교차적 굴레가 초현실의 미래세계와 겹쳐지자 소설 바깥의 현실이 밝아진다. 차별은 단지 차별이 아니라 ‘기준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며, 신뢰받을 수 있는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언어가 없는 이들은 역사를 갖지 못하고, 기억을 축적하지 못한다. 유토피아의 미래세계와 디스토피아의 미래세계 사이에서 코니는 신뢰받지 못하는, 역사 밖에 선 자로서 고민하고 결정한다. 그 순간 판타지는 입이 없는 이들의 입이 된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 「블러드 차일드」도 초현실적 가정 위에 쌓은 견고한 비유들이다.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 벌레 같이 생긴 외계생명체의 아이를 낳게 된 남성들은 출산을 앞에 둔 여성들과 같이 질척하고 끔찍하며 아름다운 것들을 느낀다. 아이를 낳다가 숨지는 남성들, 아이를 낳는 게 두려워서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하는 삶, 그러나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을 종내에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그 과정은 당연하게도 완전한 폭력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주인공은 벌레를 닮은 외계생명체를 의지하고 아끼며, 이는 폭력적 임신을 시켜야만 하는 외계생명체도 마찬가지다. 주어지는 폭력의 형태와 무관하게 개별적 개체로서의 둘 사이에 흐르 는 것은 단순히 공포만이 아니다. 그 감정들 사이에는 로맨스와 에로티즘, 연대의식과 사랑이 복잡한 형태로 뒤얽혀 있다. 지극히 당연한 차원에서 결코 설명되지 않았던 것들은 판타지의 외피를 쓰고 설명력을 갖게 된다.

 현재 한국의 판타지 문학에서 가장 활발하게 읽히는 장르는 웹소설이다. 이 장르의 핵심적 공식은 즉각적으로 독자를 만족시키는 데에 있다. 과거나 이 세계로 떠나서 즉각적으로 성공하는 이야기는 입을 잃은 이들의 비명보다는 도리어 입을 누구나 가질 수 있다는 환상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웹소설, 싱숑의 『전지적 독자 시점』 속 주인공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야기로 판매되는 삶을 산다는 설정은 어떠한가. 이를 체제내화된 환상으로 읽어내야 할까. 인간의 삶이 ‘소비되는’ 현상은 현실 속에서는 흐릿하다. 그러나 ‘독자’가 소비하던 서사에 메타적 외삽이 되는 비현실성을 앞에 둔다면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세계를 메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거대한 자본 앞에서도 판타지의 내화됨을 말하기 저어되는 것은 판타지의 힘 때문이다. 만일 판타지 서사가 이토록 대중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조차 바로 위반 때문이라면 어떨까. 존재하지 않는 비명은 오직 환상 속에서만 메아리치니까.

 

 

* 《쿨투라》 2019년 1월호(통권 55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