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뎐(傳) 5] 풍각쟁이들의 거리 '호서극장'
[극장뎐(傳) 5] 풍각쟁이들의 거리 '호서극장'
  • 김홍정 (소설가)
  • 승인 2021.07.09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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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를 아는 사람들은 대개 제민천을 먼저 기억한다. 제민천은 남쪽 우금티를 잇는 주미산과 견준산에서 발원하여 북쪽 금강으로 흐르는 냇물로,『삼국사기』 백제 동성왕조에 범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는 기록이 있는 웅진천이다. 한때 제민천 주변은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둑을 이루고 늘어섰고, 서쪽 봉황산 기슭에는 감영, 도청, 법원, 경찰서 등 관공서가 위치하고, 동쪽 월성산 기슭에는 은행과 병원, 여관, 주점들이 즐비했고 저잣거리를 이루었다. 그 중앙에 극장이 위치한다. 1930년 3월 28일자 《매일신보》 최창규 기자의 공주 방문기에는 ‘1200호의 공주읍에 색주가만이 4백 호’란 기사로 미루어 공주 읍내가 어찌 보면 먹고 노는 거리, 다운타운처럼 보였겠다.

  실상은 다르다. 1970년대 공주 읍내에 공주사범대학과 공주교육대학, 공주간호대학이 있고, 8개 고등학교가 들어서 학생 수가 공주 시내 인구의 사분의 일을 차지한 적이 있으니 가히 교육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전국에서 공부하러 온 학생들로 하숙이나 자취를 했다. 부모님을 대신하여 하숙집 주인이 사춘기를 겪는 하숙생들의 이성교제를 철저하게 금하나 학생들은 하숙집 아주머니의 눈을 피하는 요령은 용케도 잘 터득한다. 학생들을 위한 놀이시설이 넉넉하지 않으니, 학생들은 주로 교회를 다니며 이성을 만났고, 이성교제를 위해 극장에 갔다. 부득이 중·고등학교에서는 극장출입을 학칙으로 금했고, 무단으로 영화를 보다가 합동순찰에 걸린 학생들은 그에 합당한 징계를 받고 전전긍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학생들은 극장 직원들의 협조로 순찰을 피했고, 순찰하는 선생들도 보고도 못 본 척했을 것이다. 몇몇은 재수 없이 걸려서 징계를 받아도 죄가 아니라고 우쭐대니 어쩔 수 없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는 중이다.

  학교도 한두 달에 한 번 명화 관람을 위해 학생단체입장을 허락했다. 그날을 기다리는 것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잇지 못하고 시내 직조공장에 취업해 밤낮으로 비단을 짜는 직조공장 여공들이 있었다. 학생들과 같은 사춘기 나이의 여공들은 비록 월급을 받아도 가계에 보태거나 오라비들의 학비로 보내고 나면 남은 돈이 없어 학생단체입장을 할 때 영화를 봤다. 다행히 극장이 공장과 골목을 사이에 두고 있으니 일을 끝내고 교대하자마자 밥을 거르고 극장으로 갔다. 단체 입장한 학생들에 대한 불편한 부러움이나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자존심은 둘째였고 그 시기 그 나이에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호사였다.

  공주의 극장 역사는 길다. 1913년 8월 기생조합이 설립되던 해, 신극을 공연할 금강관도 건립되었다. 중고제 판소리, 창극이 성황을 이루었지만 1930년대 두 차례의 화제를 겪으며 공주극장으로 변신한다. 1936년 5월 말 초호화 스타들로 구성된 오케이레코드 연주단이 공주극장에서 이틀간 공연했다. 입장료는 40~60전이었고, 이난영, 김해송, 고복수, 임방울 등 당대의 스타들이 공연했다. 〈오빠는 풍각쟁이〉를 작곡한 김해송은 공주와 인연이 깊다. 본명이 김송규로 평북 개천에서 유학 와서 공주고보를 다녔다. 향교 인접 동네에 사는 누이 집에서 살며 제민천을 따라 극장 앞을 지나 학교 갔고, 학교 수업이 끝나고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

  〈오빠는 풍각쟁이〉에 사용된 노랫말들을 보면, ‘풍각쟁이, 심술쟁이, 욕심쟁이, 깍쟁이, 트집쟁이, 핑계쟁이, 안달쟁이, 짜증쟁이, 엄벙땡(남의 눈을 속이는 이), 모주쟁이(늘 술을 마시는 이), 대포쟁이(허풍떠는 이)’란 말이 쓰였는데 대개 놀기 좋아하고 남에게 떠넘기기 좋아하는 성품을 말할 때 쓰인다. 하지만 원래 풍각쟁이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불러 생계를 잇는 떠돌이 음악인을 뜻하며 고려시대부터 이 땅에 있던 말이다. 이른바 ‘집시’라는 말과 그 뜻이 비슷할 것이다.

  〈총후의 자장가〉, 〈연락선은 떠난다〉, 〈다방의 푸른 꿈〉도 김해송이 작곡한 노래다. 아내 이난영이 부른 〈울어라 문풍지〉도 그가 작곡한 노래다. 매일 학교를 오가며 보던 극장은 어찌 보면 노래 잘하던 청년 김송규를 김해송으로 변신시켜 풍각쟁이 꿈을 펼쳤으리라. 그런 예술인의 꿈을 지닌 이가 김송규 하나가 아니다.

  예산에서 공주영명학교로 진학한 방인근은 같은 학교 출신 성악가 안기영의 이야기를 각색한 소설 『방랑의 가인』을 썼다. 그들은 극장 인근 감리교회를 다녔다. 〈하숙생〉의 작사가 김석야도 본명은 김형근으로, 천안에서 공주사대로 진학하여 극장 주변에서 살았다. 염무웅 평론가는 극장 인근 공주사대부고를 다니며 호서극장 다리 건너 사는 시인 조재훈(공주대 명예교수)에게 문학을 배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장편소설 『망이 망소이』를 쓴 심규식 소설가도 전남 곡성에서 나서 광주를 거쳐 공주사대로 진학했다. 극장 인근에 사는 국문과 동기생 조동길(공주대 명예교수)의 집에서 하숙하며 수시로 영화를 보러갔고, 그 호서극장에서 연극을 공연했고 마침내 소설가의 꿈을 이뤘으리라. 나태주도 서천에서 공주로 유학 와서 공주사범학교에서 공부했고 제민천 인근에 살며 제민천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다. 극장 인근에 그의 풀꽃문학관이 있다. 연극에 꿈을 둔 오태근은 연극동아리를 결성해 단원들과 영화상영이 없는 시간대에 극장에서 연극 연습을 했고, 극단 ‘젊은 무대’를 만들고 공연했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연극제를 유치했다.

  공주의 극장은 1963년 이후 당시 충남의 최신 시설로 건축한 호서극장이 그 뒤를 잇는다. 수시로 가수와 배우들이 몰려와 극장쇼를 공연하여 젊은이들 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을 홀려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극장쇼가 있던 날 악단 단원들은 극장 2층 난간에 걸터앉아 나팔을 불었고, 구경꾼들이 일찍부터 나와 줄을 섰다. 입장료가 없는 이들은 그저 극장 앞을 서성대다가 운이 좋으면 아는 이를 만나 막걸리 한잔 얻어 마시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호서극장 벽에 그린 포스터

  호서극장 인근에 살던 내 선・후배, 또래 친구들은 대개 극장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부모님들이 극장에서 일을 하거나, 혹은 친구들 본인이 수시로 극장 일을 거들어주고 용돈을 벌었다. 영화 포스터를 붙였고, 극장 청소를 거들었고, 매점에서 근무하거나 간판실과 영사실의 보조 역할을 했다 .

  초등학교 시절 〈공산성의 혈투〉를 공주에서 촬영한다는 소문을 듣고, 영화배우를 볼 수 있다는 호기심으로 몰려다녔다. 박노식과 허장강의 모습은 늘 화제였다. 공주시내 학생들이 군사 역할을 하는 엑스트라로 참여했다. 실제 영화를 관람하며 자신들의 모습을 찾아낸 동네 형들은 마치 영화배우나 된 것처럼 우쭐댔다. 그들 중 몇은 한 전투 장면에서 그럴듯하게 죽었다가 잠시 후 다른 장면에서 살아나서 뛰어다니는 장면을 기억하며 불사조인양 자랑했다. 남들의 눈에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무용담은 지금도 이어진다. 호서극장 간판주임이 허물어지는 호서극장 벽에 동네 사람들 요청으로 <공산성의 혈투> 그림을 그렸다.

  극장 인근에 살던 나는 그 동네의 학교에 다녔다. 동네 사람이 극장 주인이고 직원이니 고개 한번 숙이면 영화는 늘 무료일 터. 고등학교 2학년 때 체육 수업을 빼먹고 두 친구와 호서극장으로 달렸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으나 청소년관람불가여서 학교단체관람은 기대할 수 없었다. 학생들은 단속을 피해 달아날 곳은 영사실밖에 없어 대개 2층 구석에 자리를 잡고 1층 중간은 어른들 차지였다. 어른들 자리까지 단속하랴 여기고 중간 줄에 자리를 잡았다. “재미있냐?” 속삭이는 목소리는 익숙한 학생과장이다. 다음날 학생과로 출두했다. “야 임마, 영화는 다 봤냐?” 다 볼 수가 없을 것은 뻔한 일. “어차피 걸린 거 영화나 다 보고 오지.” 우리는 수업을 빼먹은 괘씸죄가 더해져서 정학 5일을 받고 교장실 복도에서 공부해야 했다. 정학 기간을 채운 이후에도 우리는 〈화녀〉를 봤고, 〈대부〉도 봤다. 나는 소설가가 되었고, 함께 걸린 친구는 평론가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교사이면서 청소년 연극 극단을 운영한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참 어수선했다. 학생들은 우여곡절 끝에 만든 연극 동아리는 공연도 못하고해체를 반복했다. 젊은 학생들은 연극 대사에 시국을 성토하는 대사를 끼워 넣었다가 그 대사 때문에 동아리 승인을 취소당하고 강의실에서 연습하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결국 동네 아저씨인 지배인의 도움으로 연습은 으레 영화 상영이 종료된 이후 극장무대를 빌려 사용했다. 통행금지 때문에 연습 후 극장에서 자고 학교로 갔다. 그렇게 연습한 연극 〈환절기〉를 무대에 올리지도 못하고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에 남은 회원들이 학교 밖으로 나와 대학 연합 극단을 만들었다. 인근 학교 선생님들도 참여하여 〈에쿠우스〉를 올렸다. 공연에 목마른 학생들이 극장으로 몰렸다. 그 시절은 그랬다.

  호서극장은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사양길로 접어들어 마침내 문을 닫았다. 나는 호서극장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소설로 엮기로 하고 2년여 작업 후 연작소설 『호서극장』을 발표했다. 마침 공주시는 호서극장을 재개발하여 지역 문화플랫폼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몰려들어 다양한 의견을 말하고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길 원했다. 요즘 버드나무 하나 남지 않은 제민천을 걷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제민천 거리에 옛 하숙문화를 되살려 하숙촌도 만들고, 극장거리를 재현하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극장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 《쿨투라》 2021년 7월호(통권 8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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