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라이프 04] 우리에게는 더 많은 장항준과 윤여정이 필요하다.
[MZ 라이프 04] 우리에게는 더 많은 장항준과 윤여정이 필요하다.
  • 함은세 (본지 객원 기자)
  • 승인 2021.07.09 0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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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찔한 사이다

  유튜브나 SNS의 제목에 들어갔을 때 일정 수준 이상의 조회수를 보장하는 단어를 꼽자면 나는 무조건 ‘사이다’를 떠올린다. 답답하거나 열 받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것에 대응하여 속을 후련하게 하는 경우 등을 표현하며, ‘사이다처럼 속을 뻥 뚫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인용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사이다’가 일종의 밈(meme)이자 신조어처럼 여겨졌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하나의 명사 수준으로 대중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그만큼 이 단어의 사용이 빈번해진 덕분이다.

  그중에서도 ‘사이다’라는 말이 유난히 자주 보이는 곳은 드라마와 영화 클립 영상의 댓글에서이다. 말도 안 되는 급전개, 절대 빌런의 악행 등이 벌어지면 “제발 사이다 좀…”, “사이다 기다린다.” 같은 댓글이 줄을 잇는다. 물론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무례한 이들이 벌이는 황당무계한 사건들을 촬영한 영상, 혹은 그것을 묘사한 글들이 올라온 후에는 언제나 필수 요소처럼 ‘사이다’에 대한 요구가 빗발친다.

  그러나 최근, ‘사이다’를 갈망하는 대중의 욕구가 왠지 엇나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무례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이다’로 여기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또한 그 심리를 이용해 자극적인 콘텐츠를 생산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도 정말 “한 바가지”는 된다. 소셜 미디어에서 ‘사이다썰’을 가장한 도 넘은 행위들이 끊임없이 유포되고 재생산을 거듭하는 이유 역시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탓이다. 더 문제적인 사실은, ‘선’과 ‘배려’를 향한 조롱과 폄하가 무척 “쿨하게” 인식되는 중이라는 부분이다. 나는 이 흐름을 말 그대로 ‘이기심을 무기로 삼는 사회’의 태동인 동시에 ‘혐오가 보편화된 시대’의 발현이라고 보고 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함’

  이런 놀랍고 섬뜩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숨통을 트이게 만드는 건 바로 ‘묵묵한 선함’을 보여주는 이들의 등장이다. 아니, 그들을 향한 ‘주목’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미디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왔으나 이전에는 그리 많은 관심을 끌지 못했던 담백하고 선한 태도의 공인들이 뒤틀린 ‘사이다’를 해소할 깊고 삼삼한 ‘숭늉’처럼 대중의 마음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예시의 가장 적합한 인물 두 명이 영화감독 장항준과 배우 윤여정이다. 상당히 낯선 조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장항준과 윤여정에게 가장 큰 지지를 보내는 게 바로 MZ세대고, 그 지지의 원천은 두 사람이 보여준 솔직하고 가감 없으나 무례하지 않은 면모에서 비롯된다.

ⓒSBS

  우선 장항준을 향한 MZ세대의 애정은 흥미롭게도 장항준이 본인의 배우자이며 유명 드라마 작가인 김은희를 대하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됐다. 평소에도 재치 있는 입담으로 방송에 출연할 때마다 큰 재미를 선사했던 그지만, 실질적으로 그를 둘러싼 호의적 여론이 생성됐던 건 그가 소위 ‘자신보다 잘 나가는’2 배우자에게 자격지심을 보이거나 무례한 언행을 일삼는 것을 유머로 포장하는 대신 너무나도 순수하게 “김은희씨는 저희 집 가장이에요.”라며 당당히 외친 덕분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도 듣게 되는 배우자에 대한 이야기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명랑하게 풀어낸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을 기분나쁜 농담의  주제로 삼는 법이 없는 그가 다른 이들을 언급하고 민감한 주제를 논할 때에도 재기발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선을 지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것이 장항준이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낮추는 화법을 사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의 ‘쿨함’은 풍부하고 건강한 자존감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더더욱 매력적이다. 장항준에게 뒤따라 오는 수식어 중 하나가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인 것만 봐도 대중들의 인식이 동일함을 느끼게 된다.

  윤여정 신드롬도 마찬가지다. 지난 호(6월호)에서 다뤘듯이 윤여정은 현재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선생님’이고 ‘선배님’이다. 본인보다 한참 어린 후배 배우들과 함께 출연한 예능, 특히 <윤스테이>를 보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심지어 제작진들보다도!) 가장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본인의 의견만 앞세우고 후배들을 ‘권위자로서’ 곤란하게 만드는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이 완벽하지 않음을 계속해서 강조하며, 스스럼없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함께 촬영에 참여하는 제작진과 배우들을 ‘후배’가 아닌 ‘동료’로 존중하고 진정한 ‘어른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런 그의 당당함의 뿌리 또한 세월에 걸쳐 다져진 노련하고 성숙한 내면이다. 명징하고 세련된 ‘진짜 품위’의 대명사와도 같은 윤여정을 볼 때면 소위 ‘어른’으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이들의 면면이 결국은 잘 포장된 몰상식함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한다. 기성세대가 보여주는 거칠고 각박한 태도에 지친 청년들 사이에서 윤여정이 마치 한 줄기 빛과 같이 떠오른 건 실로 예정된 현상이다.

  각박함과의 타협은 안녕

  바빌로니아 제6대 왕인 함무라비가 만든 이후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연구와 논의의 대상이 되는 ‘함무라비 법전’에서 가장 유명한 조항은 단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Lex Talionis)’일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행위의 정당성을 설명할 때 인용되는 조항이지만, 이 조항에는 사실 “필요 이상의 복수를 행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대한민국은 그 구절을 그저 ‘사이다’의 원시적 개념으로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 전반에 약자와 소수자, 그늘과 다름에 대한 공포스러운 수준의 증오와 멸시가 팽배하고, 잔혹한 미움의 표출에 의문을 제기하기는커녕 그런 혐오가 빚어낸 다툼을 즐기기까지 한다.

ⓒ판씨네마

  그렇기에 장항준과 윤여정이 보여주는 ‘담백하고 소탈한 선함’, 그리고 그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대중들의 증가는 중요한 사회적 맥락이다. 단단한 자존감이 바탕이 된 그들의 사소한 다정함은 번지르르한 말로 잘 꾸며낸 화려한 거만함보다 훨씬 아름다우며, 그릇된 방식의 ‘사이다’와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쿨함’이다. 또한 그런 선함을 귀하게 받아 들이는 순간부터 모두가 존중받고 이기심이 무기가 되지 않는 세상이 열리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며 평소보다 더 많은 고민을 했다. 나 역시 이성적 태도를 명목 삼아 내 안의 이기심을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지 몇 번이나 되돌아보았고,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눴던 내 또래의 MZ세대 친구들 또한 삭막함이 디폴트(Default)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회의감을 내비쳤다. 이 글은 나도 모르게 각박함과 타협하던 근래의 시간들을 반성하며 남기는 고해성사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글은 장항준 감독과 윤여정 배우를 비롯해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선함을 되새기게 만드는 사회 곳곳의 이웃들에게 짤막한 편지를 띄우며 마무리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잔잔한 선함이 기나긴 위로가 되었습니다.”

 


1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정확한 예시가 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어린이에 대한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준 한 여성의 일화가 화제가 되었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카페에서 글쓴이가 가지고 있던 포토카드를(아이돌 앨범을 구매하면 앨범에 들어있는 일종의 특전) 찢었고, 글쓴이는 아이를 혼내는 대신 포토카드를 함께 찢으며 촉감놀이를 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대한 반응 중 꽤 많았던 것이 글쓴이가 ‘천사병’에 걸려 보여주기식 선행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2 필자의 의견이 아니다! 장항준 감독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직접 사용한 표현이다.

함은세
고등학교 자퇴한 걸 자랑하고 다니는 02년생. ‘인생 재미있게 살기 프로젝트’ 라는 명목 하에 삶을 모험하며 세상을 읽는 눈을 키우는 중이다.

 

* 《쿨투라》 2021년 7월호(통권 8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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