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Theme] 슬기로운 기승전결
[8월 Theme] 슬기로운 기승전결
  • 이효진 (방송작가)
  • 승인 2021.07.30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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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지극히 평범한 표현이지만, 이 말이 딱 적당하다). 혹시 흐름을 잊어버릴까 봐 몇 번의 정주행도 서슴지 않았다(깊은 밤, 눈이 감기는 순간에도 넷플릭스는 플레이되고 있었다). 휴대전화 벨소리는 쿨의 〈One Summer Drive〉, 여자 주인공이 캠핑을 떠나며 신나게 부르던 노래다(주인공의 모습과 내 모습이 겹치며 마치 일상을 탈출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기에 벨소리로 당첨됐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생〉) 시즌2를 대하는 나의 ‘준비자세’다. 그리고 시즌 2가 방송되던 날, 일하다 말고 ‘본방사수’를 감행했다. 뭔가에 잘 빠져들지 않는 내가 이렇게 ‘덕심’이 생기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너의 매력,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거니?”

  사실 〈슬의생〉은 정통적인 스타일의 드라마는 아니다. 이야기가 툭툭 끊어진다. 익준(조정석 역)이가 진료하는 모습을 보여주다 말고, 준완(정경호 역)이 연애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다가 정원(유연석 역)이가 어머니를 만나더니, 송화(전미도 역)가 수술을 한다. 그리고 석형(김대명 역)은 혼자 예능 프로그램인 〈신서유기〉를 본다. 회차가 진행될수록 점점 빠져들게 하는 드라마의 기본적인 구조와는 확실히 다르다. 매회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갖는 시추에이션 드라마의 형식을 띠지만, 중심 스토리는 보이지 않고 한 회차에도 에피소드가 너무 많다.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분명(?) 이래야 한다. ‘기승전결’이나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과 같은 이야기의 구조가 보여야 한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기본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단순히 에피소드의 나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슬의생〉에도 기승전결의 스토리텔링 구조가 분명 존재한다. 단, 시청자가 착각하게 되는 요인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이 드라마만의 가장 독특한 매력이다.

  대부분 드라마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서브 캐릭터가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하나의 집단을 배경으로 진행되더라도 그 속에는 중심인물이 있다. 시추에이션 드라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 회에 활약하는 캐릭터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슬의생〉은 달랐다. 서울대 의예과 출신 99학번 동기들이자 율제 병원의 교수인 ‘99즈’ 5인방이 매회 주인공이다. 단 한 명의 에피소드라도 빠지는 경우가 없다. 단순히 수치화해서 살펴본다면, 90분이라는 시간 동안 주인공 한 명당 약 18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 거기에서 다섯 명이 함께 모이는 시간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간을 제외하면 한 명당 15분 내외의 시간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5인방 각각의 에피소드가 한 회차에 마무리된다. 즉 다섯 개 에피소드의 기승전결이 함께 진행되는 구조다.

  시즌2의 2회만 봐도 그렇다. 석형은 조산의 기미가 있는 산모의 수술을 하고, 준완은 심장에 이상이 있는 아이에게 ‘바드’라는 보조 장치를 단다. 송화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의 뇌를 수술한다. 익준은 두 번이나 간이식 수술을 했으나 또 술을 마신 환자를 진료하고, 정원은 수술 후 실밥을 뽑기 싫어하는 아이를 진료한다. 5인방의 수술과 진료가 진행되기 전과 진행 상황, 진행 후의 과정이 모두 펼쳐진다. 거기에 아침 출근길의 모습도 보이고, 함께 모여 라면과 딸기를 먹으며 정원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장면도 있다. 석형의 전 아내와의 관계도 들어간다. 준완과 장거리 연예 중인 익순(곽선영 분)과의 통화도 빠질 수 없다. 마지막에 송화가 보호자의 소개팅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다음 회차의 ‘떡밥’을 투척하고 끝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출근 모습(기), 수술과 외래 전 준비(승), 수술과 외래의 상황(전), 이후 결과(결)의 구조를 바탕으로 이 모든 내용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간단하게 이야기만 해도 숨이 찬데 드라마가 진행되려면 매번 바쁠 수밖에 없다. 정보를 전달할 것인가, 감동을 줄 것인가, 이야기를 진행시킬 것인가, 캐릭터를 보여줄 것인가…. 작가는 시퀀스별로 핵심만 짚어 명쾌하게 던져준다. 결국, 형식적인 변화로 단조로움을 극복하며 ‘잠시 후’ 펼쳐질 상황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청자는 살짝 흐름을 놓쳐도 괜찮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99즈 밴드의 노래를 들으면 그 회차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정리된다. 시즌2의 2회에서는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연습했는데, 대명이 부르는 노랫말이 곧 주제였다.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홀로 설 수 있을까

  누군가는 시트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르로 보는 시트콤이라고 하기에는 무겁다. 의학적인 정보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펼쳐지는 에피소드도 드라마적인 깊이가 있다. 의학 드라마로 분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병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5인방의 우정 이야기에 가깝다. 혹자는 미국의 의학 드라마인 〈그레이 아나토미〉의 구성과 같다고 한다. 여러 주인공의 에피소드가 같이 진행되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다섯 친구의 진한 우정과 감초처럼 들어가는 웃음 코드는 확실히 시트콤의 이미지에 가깝다(이야기하다 보니 뫼비우스의 띠를 돌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결국 ‘퓨전 의학 드라마’ 정도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의학 시트콤 드라마’라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까. 그만큼 〈슬의생〉은 지금의 드라마 분류로는 규정지을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감독과 작가는 ‘어떻게 하면 재미있을까’만 본능적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눈길을 계속 붙잡아 두는 노하우를 모두 쏟아부은 것 같다. 결국, 기존의 드라마 문법을 따르지 않는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나만의 콘텐츠를 마음껏 생산해내는 ‘유튜브 시대’와 참 많이 닮았다. 물론 정통 드라마의 관점에서 볼 때는 여러 가지로 ‘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금만 길어지고 늘어지면 참지 못하는 이 시대의 시청 패턴과 그들의 전략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슬의생〉은 코코넛 워터 같은 맛일지도 모르겠다. 극적인 찐함이 없어 밍밍한 것 같으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맛이 있는 깔끔함. 그래서 계속 찾게 되는 ‘시그니처 음료’. 올여름 ‘〈슬의생〉의 맛’에 푹 빠질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목요일이다. 본방사수를 포기하고 일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눈물을 머금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음 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오늘도 〈슬의생〉 속으로 풍덩 뛰어들 ‘준비자세’는 매우 완벽하다.

 

 


 

* 《쿨투라》 2021년 8월호(통권 8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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