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Theme] Fantasy - 웹소설
[1월 Theme] Fantasy - 웹소설
  • 이융희 (작가 겸 연구자)
  • 승인 2019.01.30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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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웹소설, 웹소설 판타지

 골목 식당을 종횡무진하며 요식업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CEO가 있다. 백종원이다. 심지어 국정감사장까지 가서 요식업계를 대표해 이런저런 이야기까지 아끼지 않았다. 라디오 방송부터 각종 예능 프로그램까지, 백종원이라는 신드롬은 쉽게 가라앉지 않으리라.

 <골목식당> 프로그램을 주목해 살펴보면 그의 조언은 요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팔 것인지에 대한 조언이 훨씬 주를 이룬다. 그의 마인드는 철저히 상업주의적이다. 그 점이 백종원이라는 인물을 유니크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보면서 끊임없이 웹 소설을 떠올린다. 왜냐하면 그가 요리와 요식업을 분리하는 것처럼, 글쓰기와 웹소설 시장, 상업장르문학은 구분되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웹소설 지망생이, 연구자가, 공모전을 열고 국가의 예산을 탄 지원사업을 여는 출판사나 멘토란 사람들조차 이 두 가지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물론 백종원은 맛있는 요리, 좋은 요리를 논외로 치부하지 않는다. 그것은 요리 사업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고민 방법의 차이이다. 가성비안에서 어떻게 최적화된 맛을 끌어낼 것인가가 중요하다. 10만원 짜리 고급 떡볶이가 아무리 맛있어도 초등학교 앞 분식점에서 해당 메뉴를 내놓으면 누가 사고 누가 먹을 것인가.

 그렇기에 웹소설 시장의 많은 창작 아카데미들이 ‘좋은 글을 쓰는 법‘을 강의하는 것이 마뜩찮다. 그들은 분명 자기가 생각하는, 또는 알고 있는 ‘좋은’글을 가르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데뷔로 이어지진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교육장은 웹소설이라는 대상을 물신화한다. 이것은 현재 웹콘텐츠를 둘러싼 저널리즘의 관점과 놀랍도록 일치하다.

 과열된 경쟁체계에서 ‘근무 공간의 불필요‘, ‘네트워크 기반의 팀 불필요‘, ‘투자자금 불필요’ 라는 조건의 웹소설 창작 조건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더군다나 수많은 데뷔의 공간은 큰 노력 없어도 ‘내 이야기’를 출판할 수 있다는 환상마저 충족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소 출판사들이 아마추어를 착취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지점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종이책 몇 권을 낸 올드한 작가를 섭외해 강의를 대충 설립한다. 이렇게 무성의한 강연은 이수 과정을 거치고, 지원금을 받으면서조차 성공하지 못하는 수많은 작가를 양산하며 시장의 물신화를 가속화한 다. 현재 많은 아카데미 시스템이 양산하는 건 구조를 추앙하고 하층 바닥에 누적되는 패배자들이다.

 이건 일종의 텍스트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웹소설 작가들의 작업환경과 작업량은 수없이 출간된 메타 웹소설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문필드 작가의 『포텐 폭발, 김작가』나 사략함대 작가의 『기획에 산다』 같은 작품이 그렇다.

 "해당 작품들은 인기 없는 작가인 주인공이 초능력을 얻어 인기작가가 되는 내용을 다룬다. 현업의 작가들이 ‘인기 작가가 되려면’ 갖추어야 하는 능력이 무엇이냐는 대답을 작품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 능력이 무엇일까?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문장력? 묘사력? 주제의식?

 그렇지 않다. 두 작품이 제시하는 초능력은 공통적인데 '유행 파악하기', '짧은 시간 많은 양의 글쓰기' 등이다.

 끊임없이 동일한 퀄리티의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는 능력. 그리고 무엇이 잘 팔릴 것인지 보는 능력. 이것은 앞서 말한 백종원의 이야기와 다를바 없다. 작가는 창작자인 동시에 기획자이고 마케터인 동시에 편집자이고 고객센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작가들의 말을 뒤집으면 그 이면엔 우리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메시지다. 판타지 웹소설이 가장 선두에서 웹소설이란 환상을 걷어내고 있다.

 

 아직도 많은 공간에서 웹소설을 제대로 독서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제2의 인생을 출발할 수 있다는 꿈만 꾸며 타자를 두드린다. 웹소설이란 판타지는 이렇게 무지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착취하며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 얼마나 허망한가.

 

 

* 《쿨투라》 2019년 1월호(통권 5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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