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라이프 05] 슬기롭게 의사를 이야기하는 방법
[MZ 라이프 05] 슬기롭게 의사를 이야기하는 방법
  • 함은세(본지 객원 기자)
  • 승인 2021.08.08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사(=)양반

  자녀들을 발판 삼아 신분상승을 원하는 상류층 부모와 그로 인해 무한경쟁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아이들을 다룬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청소년기의 학업적 성취를 상징하는 것은 ‘서울대 의대’다. 극 내에서 부모들은 자녀를 서울대 의대에 보내기 위해 자본 투자는 물론이고 그늘진 일을 시도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듯 현 대한민국 사회에서 ‘의사’는 성공한 삶의 표본이자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쥘 수 있는 직업으로 자리잡았다.

  실제로 의사는 중고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전문직이다. 전교생 중 가장 공부를 잘하는 한두 명만이 의대 진학을 권유 받고, 학교에서는 마치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듯 매년 의대생 배출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평소 꾸준히 공부해오던 학생들이 진학을 통해 본인들의 노력을 인정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의사라는 직업의 ‘신격화’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한편 그 원인이 공익적인 일에 종사해서가 아닌 단순히 ‘입시 성공’의 증표가 되어서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오늘 이야기 할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더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직업이 의사일 뿐인 평범한 사람들”. 율제 병원의 다섯 친구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문장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tvN

  Just human

  필자는 〈응답하라 1997〉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그 당시 필자는 초등학생이었는데, 방영 시간대가 밤이라 혼자 거실에서 TV를 볼 수가 없어(늦게까지 TV를 보면 할머니께 엄청 혼났다.) 매번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은 후 휴대폰에 이어폰을 연결해 화질이 엉망인 dmb로 몰래 본방송을 시청했다.(휴대폰 기종까지 기억난다. 폴더를 닫으면 ‘딱’하고 소리가 나는 분홍색 캔디폰이었다. 그 소리가 엄청 커서 실수로 폴더가 닫히는 바람에 할머니께 본방사수를 들켰던 기억도 두어 번 정도 있다.) 학교를 다녀오면 항상 노트북으로 같은 회차를 몇 번이나 돌려봤고, mp3에는 주인공을 맡은 배우 두 명이 참여한 OST를 다운 받아 남동생과 화음을 넣어가며 수백 번씩 따라 불렀다. 아직도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사랑하는 드라마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응답하라 1997〉를 외칠 것이다.

  그리고 나를 〈응답하라 1997〉의 짱팬으로 만든 건 그 작품이 품고 있던 따스한 인간애였다. 강력한 갈등 요소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끄는 타 작품과 달리 〈응답하라 1997〉은 성별, 나이, 관계 등 무수히 많은 것을 초월하고 서로를 응원하고 사랑하며 똘똘 뭉쳐 살아가는 사람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내는 작품이었다.

  그렇게 언제나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면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온기를 녹여내던 신원호 감독과 이우정 작가의 탁월한 능력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통해 정점을 찍었다. 물론 전작 〈슬기로운 감빵생활〉 역시 교도소를 배경으로 해 캐릭터와 스토리의 특수성이 짙었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경우 스토리적 특수성은 덜어내고, 대신 이제껏 장르물의 주요 소재가 되거나 ‘엘리트’ 캐릭터를 설명할 때 자주 이용되었던 ‘의사’라는 직업을 메인으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궤를 달리한다.

ⓒtvN

  하지만 신원호-이우정 콤비가 주인공인 율제 병원 5인방을 통해 의사를 묘사하는 방법은 ‘직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가지각색의 인간사와 다양한 이들이 뒤섞여 사는 사회의 여러 잔상을 보여주는 작업을 수월히 하기 위해 가져온 설정에 가깝다. 이익준, 채송화, 안정원, 양석형, 김준완은 직업만 의사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드라마는 그들을 대의를 위해 사는 엄청나고 위대한 존재로 보여주지도, 명예롭고 성공한 인생을 거머쥔 탄탄대로의 고학력자들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어찌 보면 약간은 유치하고 초라하기까지한, 복합적인 고뇌가 묻어있는 평범한 개인의 삶으로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여타 의학 드라마와 달리 생사를 넘나드는 의료 현장을 긴장감의 요소로 사용하는 법도 없다. 마치 〈응답하라 1994〉 속 캐릭터들이 명문대생인 게 극중 배경에 신촌 대학가를 더 편하게 집어넣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의 ‘의사 생활’ 또한 그저 개인의 삶을 엮어낸 여러 조각들 중 하나일 뿐이다.

  엘리트주의가 당연해지고 가난과 약자를 향한 혐오가 팽배한 이 시대에,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엘리트의 정점에 위치한 직업군을 그려내는 방식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율제 병원 친구들은 치열한 입시 경쟁을 넘어 뛰어난 두뇌를 통해 인간 승리를 이뤄낸 존재들보다는 ‘그냥 의사’에 가깝다. 그와 동시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주변인이다. 길거리를 지나갈 때에 황금빛 후광을 내뿜는 이들이 아니다. 이와 같은 접근은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고학력 상류층 엘리트’에게 향하는 동경 대신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친근함을 경험하게 해주는데, 특히 매스 미디어 전성시대를 살아가는 MZ세대, 그중에서도 입시경쟁의 일원인 어린 학생들의 의사에 관한 인식을 잔잔하지만 엄청난 폭으로 변화시켰다. 젊은 세대의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향한 지지의 목소리는 전부 그들이 가진 ‘휴먼 라이프’에 대한 것이다. 그 누구도 “의사생활”에서 “의사”에만 집중하는 법이 없다. “생활”에 집중하거나, 혹은 “의사생활” 전체에 집중한다. 엇나간 계급상승의 욕망이 널뛰는 대한민국의 화려한 암흑기를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많은 청년들 안의 원초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차분하고 평화롭게 가라앉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매력적인 이유다.

ⓒtvN

  슬기로운, 너무나 슬기로운

  가끔 다른 사람들과 한국 사회의 교육 시스템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그럼 자퇴를 권유하고 싶으세요?” 나는 그 질문을 받으면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사람이 의사가 되고 싶어서 의대를 지망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것이 가장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하나의 길과 하나의 직업, 하나의 꿈만이 노력을 증명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의 표본이라고 생각하죠. 저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슬기로운 의사생활〉처럼 특정한 삶을 과도하게 우월시하지 않고 평범한 개인 안의 많은 가능성과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이렇게 예시로 ‘슬의생’을 꺼낼 때마다 생각한다. 정말이지 완벽한 제목이라고. 이보다 더 슬기롭게 인생을 말하고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작품은 없을 거라고.

  지금의 한국 사회는 여러모로 병들어 있지만,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수준은 그야말로 심각하다. 빈부가 개인의 노력의 정도에서 비롯된다는 의식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전보다 훨씬 많은 삶의 예시를 보고 자라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도리어 이전에 비해서 더 거대하고 과잉된 차별적 시각에 익숙해져 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런 MZ세대에게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삶의 배경과 직업과 학력 등은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요소라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닌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적당한 온도와 속도로 일러주고 있는 셈이다. 거칠게 액셀을 밟고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찾는 무모한 태도에 서서히 잠식되어가는 이들이 늘어나는 2021년을 살아가는 스무 살 청년으로서, 율제 병원 5인방과 그들의 세상 속 부족하고 서투르지만 따스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안겨준 신원호와 이우정 콤비의 슬기로움에 박수를 보내는 오늘이다.

 

 


함은세
고등학교 자퇴한 걸 자랑하고 다니는 02년생. ‘인생 재미있게 살기 프로젝트’ 라는 명목 하에 삶을 모험하며 세상을 읽는 눈을 키우는 중이다.

 

* 《쿨투라》 2021년 8월호(통권 86호)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