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Theme] 음악과 판타지
[1월 Theme] 음악과 판타지
  • 성기완 (뮤지션, 시인, 밴드 트레봉봉 멤버)
  • 승인 2019.01.30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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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은 ‘없음’의 표현이다. 음악의 재료인 소리는 물건처럼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음파는 그저 공기의 결일 뿐이다. 공기의 결은 출렁이고 사라져 버린다. 사라진 소리의 여백을 또다른 공기의 물결이 채운다. 그랬다가 다시 사라진다. 시간의 낭떠러지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소리의 폭포. 음악은 본질적으로 사라짐의 예술이다. 그래서 음악은 쉼표의 예술이다. 그 없음의 심연이 음표들의 리듬, 존재감, 의미를 드러내 준다.
  판타지 또한 ‘없음’의 표현이다. 판타지는 어원적으로 ‘헛것이 보인다’는 뜻을 품고 있다. 헛것, 환상은 현실, 실재와 대비된다. 판타지는 상상이 빚어낸 신기루다. 현실은 있는 것들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것을 벗어나면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있는 것들에 갇혀 있다. 반면 환상은 있음의 영역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환상은 있음의 속박을 탈출한 프로메티우스가 전해주는 있음 너머의 메시지다.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를 굳힌 판타지 문학은 바로 그 메시지를 받아적는다. 판타지는 현실의 법칙들이 굳건하면 할수록, 그 속박에서 해방되고파 하는 존재의 강렬한 충동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없음’이 ‘존재하지 않음’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없음은 단지 우리가 감지하지 못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우리의 감각 너머로 존재하는 세계들은 분명히 있다. 아니,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내가 기억 못한다고 해서 나의 아가 시절이 없는 것이 아니듯,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음악은 없음의 표현이면서, 바로 그 ‘감지되지 않는 영역’의 어렴풋한 드러냄이다. 감지되지 않는 영역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잊어버린 세계일수도 있다. 음악은 ’기억나지 않는 것’의 표현이기도하다. 음악은 기억할 수 없는 시간으로 나를 데려다 준다. 그것은 암중모색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공기의 결을 움직여 깨워 내 영혼이 그 물결을 타고 망각의 세계로 날아간다. 음악은 ‘망각’의 예술이다.
  망각이란 무엇인가. 잃어버린 기억이다. 나는 아메바 시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수정체가 되어 단 하나의 세포에서 두 개의 세포로 나눠지던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 원초적 상태와 지금의 내 몸뚱아리는 시간적 연속선상에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시간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다. 그 시간의 나를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현실의 언어들은, 보이는 것들의 논리는 빛을 잃는다. 그 빛을 잃은 심연을 우리는 망각이라고 부른다. 음악이 비춰주는 구역이 거기다. 뚜렷한 형상 대신 어렴풋한 느낌이 떠오른다. 그 느낌들이 공기의 결을 타고 춤춘다. 그게 음악이다.
  비틀즈가 <Strawberry Fields Forever(영원한 딸기밭)>를 노래한다. 그 딸기밭은 어렸을 때 본 흔한 들판일 수도 있고 익숙한 고향땅일 수도 있다. 그 공간을 다시 방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영원의 수평선 너머로 떠나보낸 시간들이 있다. 다시 오지 않을 그 시간들. 손가락 빨고 젖먹던 시절을 지나 들판에서 뛰어 놀던 그 순수한 시간들. 영원한 딸기밭은 공간적인 좌표가 있는 어느 지점이라기 보다는 시간적인 개념이다. 음악은 우리가 바로 그 시간들을 헤엄쳐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자꾸 자꾸 환기시킨다. 영원한 딸기밭을 노래하면 할 수록, 그 시간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우린 옛날 노래를 듣는다. 나이 먹을 수록 더 어려서 듣던 노래들에 정이 간다. 그 노래를 수백 번도 더 흥얼거렸고 수십 번도 더 불러봤다. 그렇게 마음 속에 새겨진 노래는 아무리 불러도 지겨워지기는 커녕 더욱 절실해진다. 모든 노래는 그렇게 마음 속의 아리랑이 된다. 그렇게 반복할 때 우리는 ‘도취’된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말한 바로 그 도취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외친다.

 ‘너는 내 맘에 든다. 행복이여! 순간이여! 찰나여!’

 그래서 음악은 결국은 끝나고말 행복한 사랑의 순간을 표현한다. 음악은 그래서 본질적으로 에로틱하다. 절정의 순간은 말로는 설명이 안된다. 음악은 그런 면에서 설명할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기원을 표현하는 유일한 예술 형태일 것이다.
  판타지는 음악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그 모호한 세계에 근접하려는 시도다. 우리는 환상을 통해 설명할 수 없는 내용들을 들춰내고자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꿈의 세계다. 잠을 깨서 현실로 돌아오면 연기처럼 사라지는 꿈의 장면들이다. 꿈의 장면들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나는 날아오르고, 갑자기 추락하기도 하며 둥둥 떠있기도 하다. 두렵고도 흥분되는 공중부양을 꿈의 장면들은 어렵지 않게 보여준다. 이 자유로운 꿈의 장면 속에서 우리는 종종 유년으로 돌아간다. 어려서 뛰어놀던 허름한 동네의 골목이 나타나기도 하고, 서늘한 그림자가 어린 뒷동산이 펼쳐지기도 한다. 어린 시절은 얼마나 환상적인가! 어린이들은 모든 것을 믿는다. 그 세계는 한없이 열려 있는 꿈의 세계다.
  방금 떠오른 어떤 선율을 흥얼거려본다. 미레도-(낮은)미, 레도시-미... 어디서 들은 멜로디일까. 이 멜로디는 어느 세계로부터 내 상상 속으로 들어오신 걸까. 누가 이 멜로디를 들려주었을까. 신비스럽다. 아름다운 멜로디를 전해주는 나의 뮤즈, 하늘 저편에 퍼플의 아침노을이 떠오를 때 꿈 속을 유영할 나의 사랑이 이 선율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성기완
1967년 서울 출생. 1994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으며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 『유리 이야기』 『당신의 텍스트』 『ㄹ』과 산문집 『장밋빛 도살장 풍경』 『홍대앞 새벽 세시』 『모듈』 등이 있다.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의 멤버로 네 장의 앨범을 발표했고 앨범 《Dreamtalk》으로 2013년 한국 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앨범상 등 세 개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제 1회 김현문학상 수상.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아프로 아시안 퓨전밴드 앗싸(AASSA - AfroAsianSsoundAct)와 밴드 트레봉봉으로 활동중이다.

 

 

* 《쿨투라》 2019년 1월호(통권 5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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