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뎐(傳) 6] 대구 사보이 극장
[극장뎐(傳) 6] 대구 사보이 극장
  • 김전한 (시나리오 작가, 영화 감독)
  • 승인 2021.08.08 0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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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60년대 미국 와이오밍 주

  두 남자는 일자리를 찾다가 처음 만났다. 두 남자의 일은 양치기였다. 처음 두 남자의 시선은 무덤덤하였다. 두 남자는 양들을 끌고 함께 산으로 갔다. 두 남자는 그곳에서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 불현듯 사고같은 사랑이었다.

  한 남자는 마음 표현이 수월하였고 다른 남자는 감정 표현이 미숙하였다. 그 산은 여름에도 눈 폭풍이 내렸다. 뒤죽박죽의 계절이었다. 두 남자의 감정 또한 종잡을 수 없었다. 얼떨결에 나눈 동성애가 당황스러웠다. 계절이 지나가고 두 남자는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각자 제 갈 길을 떠났다.

  감정표현이 허술하였던 한 남자는 허적허적 길을 가다가 오열이 터져 나왔다. 떠나 버린 다른 남자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제서야 그는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그러거나 말거나.

  한 남자와 또 다른 남자는 각자 결혼을 하였다. 아이가 생겼다. 그 산에서 나누었던 사랑은 희미해졌나 싶었다. 두 남자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두 남자의 결혼 생활은 그럭저럭 행복하였다. 그러나 그 행복은 가짜였다.

  한 남자는 진짜 행복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그 옛날 여름 폭풍의 산에서 나누었던 사랑을 찾아 떠났다. 잊어버렸나 싶었는데 결코 잊히지 않는 사랑이었다. 두 남자의 사랑 불씨는 다시 타올랐다. 삶의 이유는 오직 그 사랑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사랑 때문에 행복하였고, 사소한 사랑싸움을 나누었고, 토라지고, 어린애처럼 울고, 웃고,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 세월은 성큼성큼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남몰래였다.

  그곳은 청교도의 나라 미국이었다. 금지된 동성애는 그들을 지옥 속으로 몰아넣었다. 한 남자는 이혼을 했고, 다른 남자는 풍속 살해를 당했다. 저 혼자 남은 남자는 죽은 연인의 피 묻은 셔츠를 보며 눈자위 가득 눈물을 글썽였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났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2

  보고 있던 나는 가슴이 먹먹하였다. 먹먹한 가슴 아래로 어떤 기시감이 스멀스멀 번져 나왔다. 저 풍경, 저 슬픔, 저 막막함. 어디서 봤더라? 가만히 기억들을 모아보았다. 압도적인 풍경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아닌 어느 컴컴한 그곳이 떠올랐다 .

  # 3 1973년 대한민국 대구.

  사보이 극장을 네이버에 물어보면 다음과 같이 대답해준다.

  ‘1881년 10월 개관(開館)되었으며, 20세기 초엽까지 길버트 공연으로 명성을 떨쳐 사보이 오페라’라는 용어가 생기게 되었다. 그 후 바커에 의해 셰익스피어극과 B.쇼의 희곡 등을 공연하다가 1929년 개축을 거쳐 1930년대 중반까지 ‘사보이 오페라’를 부활 공연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주로 희극을 상연한다.

  감히 말하건데, 내 문화의 숙주도 사보이 씨어터였다.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들이 할리우드 키드였던 그때 나는 영국문화에 젖줄을 대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들의 극장 등급 분류법은 다음과 같다 .

  대구 시내의 만경관은 일류.
  동성로 송죽극장은 이류.
  자갈마당 동아극장은 삼류.
  대명동 미도극장은 사류.
  비산동 오스카(오오...오스카라니!)극장은 오류.

사보이 극장 옛터

  서문시장부근, 바로 문제의 그 사보이 극장은 등급 외, 단독 명사를 가졌다.

  ‘사보이 극장은 오류에도 못 드는 따라지극장’

  국민학교 고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운동장 철봉대에 나방 고치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기를 좋아했던 시절이었다. 뒤집혀 달려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이니, 석양이니, 뭐 그런 가당찮은 단어들을 떠올리며 혼자 놀았다. 철봉 놀이가 심심해지면 슬슬 발길을 옮겼던 그 곳. 따라지 극장, 동시상영 두 프로에 일금 30원. 사보이 극장이었다. 30원을 매번 끊을 능력은 안 되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 극장을 매일 갈 수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본다.

  월담치기, 개구멍치기, 창문치기 등등이 있었을 텐데, 기억이야 나지만 그 부분 기억나지 않는다 치고.

  어떨 땐 잘못 뛰어들어 검표원 떡대 아저씨한테 쫓기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만화영화 〈톰과 제리〉의 아슬아슬한 활극이 되었다. 미로같은 극장 복도, 화장실, 헥헥거리며 돌고 돌다가 스크린 뒤편으로 튕겨 들어갔을 때였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스크린 뒤쪽으로 투영되던 뒤집혀진 황홀경. 벌렁거리는 심장, 후들거리는 발길 조심스레 옮겨서 마침내 객석까지 진입했던 그 희열. 악착같이 색출하지 않고 그쯤에서 슬그머니 사라져주었던 검표원 떡대 아저씨. 객석 뒤쪽에 관람석(?)이라는 것이 양쪽에 있었다. 세 개의 계단을 올라가 객석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감옥의 파수대 같은 공간이었다. 대개는 경찰이나 학생주임 교사들의 감시공간이었다. 그러나 사보이 극장은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그 파수대는 늘 비어 있었다. 난 그 파수대에 앉아서 스크린보다는 객석의 움직임에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사실 난 영화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 앉은 십여 명의 남자 관객들. 그 극장에는 모두 남자만 있었다. 좌측 끝 사내가 슬슬 우측으로 이동한다. 우측 끝 남자도 낌새를 느끼고 좌측으로 이동한다. 둘은 잠시 어깨를 기대는가 싶더니 우측 남자가 벌떡 일어난다. 그러면 이번엔 뒤쪽 남자가 좌측 남자에게로 다가간다. 잠시 영화에 시선 뺏겨 있다가 객석을 내려다보면 어느새 남자들의 위치는 많이 바뀌어 있다. 사랑이 시작된 커플. 큭큭큭, 소리 죽여 흐느끼는 남자. 거절당한 남자의 또 다른 시도. 게이 바가따로 없었던 시절, 동성애자들의 유일한 해방구였던 대구 사보이 극장.

대구 근대사박물관

  그곳에서는 아무도 영화를 보고 있지 않았다. 곧추세운 안테나로 부지런히 짝짓기에 열을 올렸던 그 남자들. 빛이라곤 스크린과 비상구등, 금연 탈모 등만이 깜빡이던 그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채 그리운 반쪽을 향해 몸부림쳤던 그 남자들 . 파수대의 나는 헤아려본다. 오늘은 몇 쌍이나 성공하여 손을 잡고 나갈까? 켜켜이 묵혀진 밀도 높은 지린내. 쉼 없이 삐걱이던 나무 의자 소리. 쭈웁쭈웁 극장 안을 가득 채웠던 절실했던 키스 소리. 오랜 세월, 내 기억을 공명시키는 그 소리와 냄새들. 대구 유일의 이반 공간 사보이 극장. 누추하고 슬픈 사랑의 공간.

  대구 Savoy Theatre!

 

 


김전한
시나리오 작가.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외 다수의 작품을 썼다. 다큐멘터리 영화 〈시인들의 창〉 연출 (현재 후반 작업중).

 

* 《쿨투라》 2021년 8월호(통권 8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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