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Theme] 붓으로 부린 마법과도 같은 판타지의 재미
[1월 Theme] 붓으로 부린 마법과도 같은 판타지의 재미
  • 안재영 (미술평론가, 광주교대 교수)
  • 승인 2019.01.30 17: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대미술의 수많은 이즘ism들 중에서 표현미술expression, 추상미술abstraction, 환상미술fantasy 세 가지 정도를 주요 사조로 구분해보고자 한다. 표현미술은 자신 및 세계에 대한 미술가의 정서적 태도에 중점을 둔다. 추상미술은 미술 작품의 형태적 구성을 강조하고, 환상미술은 상상력의 세계를 탐구한다. 이들 사조는 어떤 특정한 양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의 기본 태도에 따르는 것이다. 표현주의 화가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의 공동사회이며, 추상미술 화가의 경우는 실재의 구조이며, 환상 미술 화가의 경우는 개성적인 인간 심리의 미묘함이다.

 오늘의 중점 화두인 판타지fantasy는 말 그대로 ‘환상’이라는 뜻이다. 이를 미술장르에서는 가공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거나 초현실적인 존재 또는 사건을 다루며 실제로 환상에 빠지는 듯 느낌을 갖게 표현한다.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것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 그런것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한 미술작품을 일단 판타지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판타지는 정해진 형식이 없이 자유롭게 만들어지는 작품이다. 그래서 판타지란 명칭은 소설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 등에서도 자유롭게 만들어진 작품들을 일컫는다. 미술에서 우연히 불러온 환 상은 현실을 뛰어넘어 이상으로 다가가는듯한 착각을 유도한다.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 곧바로 현실이 되는 세상, 현대미술은 미술 포토숍Photoshop같은 간단한 프로그램으로 상상보다 더 자유로운 변화를 즐길 수 있다.

 판타지 작가들은 현실을 뛰어 넘고 상상의 세계를 구현하며 인간의 창의력, 창의성에 대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속세를 떠나고 싶은 사람들의 이상향이 되어준 조선초기의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자연과 함께 하고픈 욕망, 도가적 사상을 반영해주는 판타지를 만들었고, 스페인의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불신으로 현실그대로의 것을 뛰어 넘고 이성과 반대되는 ‘꿈’에 대한 모티프를 통해 서양의 판타지를 만들었다.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쿠쉬(Vladimir Kush, 1965~)의 <바람>은 동화 같은 표현처리를 위해 파란색을 베이스로 사용하였다. 이 작품에 등장한 셔츠는 쿠쉬가 실제 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펄럭이는 셔츠를 이용해 불안감을 표현했다. 새파란 빛이 캔버스를 가득 채운, 당시 쿠쉬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환상적인 작품이다.

 블라디미르 쿠쉬Vladimir Kush는 뛰어난 상상력과 몽환적인 동화적 표현으로 세대와 시대를 아우르는 판타지 작업들을 구사한다. 그는 은유적 사실주의Metaphorical Realism을 추구하여 관람객에게 다양한 해석과 스토리를 상상하도록 전달한다.

 은유적 사실주의는 사실주의화법Real과 은유화법Metaphor의 합성어다. 그의 은유적 표현은 환상으로 빠져들게 하고 자유롭게 작품을 상상하게 해주고 그의 작품은 굳이 설명을 보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생각으로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작품 세계에 놀라게 된다.

 판타지 소설의 원조는 그리스 로마신화라고 볼 수 있듯이 한국의 판타지를 서書와 화畵를 아우르는 필묵의 그림과 민화에서 보게 된다. 조선민화는 서와 그림의 결합이 만들어 내는 융·복합적인 조형공간, 원근법적 질서를 탈피한 역원근법의 구성, 다시점多視點으로 대상을 전복하고 해체시키는 공간경영, 수묵과 채색의 비유기적 조합, 전범이 없는 자유로운 필획 등으로 한국미술의 현대성을 뚜렷하게 각인시키면서 전통 서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보여준다. 이를 조형적 참신성, 공간과 시각의 자유로움, 해학과 포용이 담긴 민화 까치호랑이에서 찾을 수 있다. 17-19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까치 호랑이는 우리나라 호랑이 그림을 대표하는 그림이다.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며, 추상적인 표현과 다양한 채색으로 조선후기 민화다.

 민화의 까치호랑이에는 김홍도의 맹호도가 전해 주는 뛰어 오르는 듯한 생동감과 유연함, 터럭까지 흔들리는 듯한 생동감은 사라졌다. 그 대신 호랑이는 까치의 친구로 전락했고 그믐달이 걸린 소나무 아래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다. 전형을 찾을 수 없는 혓바닥과 마름모형의 눈동자, 두 다리의 생경함은 바위산을 딛고 선 모습에서 사실과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 주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 세계는 바로 까치와 호랑이가 친구로 지내고, 산과 나무가 조화를 이루는 기쁘고 재미있는 판타지fantasy의 공간이다.

 현대미술가 박민준은 마술처럼 몽환적인 그만의 작품세계를 통해 다양한 해석과 감성을 공유하는 흥미로운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현실적인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세계 안에서만큼은 벌어지는 모든 마술적인 일들이 충분히 납득 가능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판타지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와 그 안의 상상 속 인물들 이야기를 다룬다.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마술적 인물들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의 작품 <판테온Pantheon>은 서커스단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강렬한 색감과 독보적인 캐릭터들이 단박에 시선을 끈다.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네 가지 색과 동양과 서양을 상징하는 동물들, 역동적인 움직임 등이 어우러지면서 형식상의 구애를 받지 않은 자유로운 감성과 생각의 흐름에 따라 작곡된 낭만적인 악곡의 판타지아fantasia의 분위기를 배가 시킨다.

 <판테온Pantheon>의 그림을 보면 작가의 상상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캐릭터들의 개성이 넘친다. 맹인 곡예사부터 사람과 대화하는 파란 원숭이, 복화술을 하는 꺽다리 관장, 머리에서 나무가 자라는 동물 등 화려하고 성대한 축제가 한바탕 벌어진다. 이처럼 판타지는 갑갑하고 무거운 현실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삶의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엄격한 질서로 인한 고통을 뛰어 넘는다.

 판타지를 통해 예술은 우리들에게 숨을 쉴 수 있는,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세계를 제시해 준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시대가 흐르고 많은 것이 변화했지만 아직도 수많은 미술가들은 판타지 구현에 애쓰고 있다. 시대와 상관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판타지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술은 이러한 부분에서 순기능을 맡고 있다. 미술이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예술을 욕망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쿨투라》 2019년 1월호(통권 55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