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Theme] 미대 오빠, 경영대 언니, 외국인 유학생: 드라마의 다양한 얼굴 '학과'
[9월 Theme] 미대 오빠, 경영대 언니, 외국인 유학생: 드라마의 다양한 얼굴 '학과'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1.09.0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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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tvN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얼굴과 몸, 그리고 재능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다면 다음 생에선 춤추는 걸 업으로 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굳이 이번이 아니라 다음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필라테스를 하면서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당혹스러움이란.

  그래서였다.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일흔 살 덕출이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꿈인 발레를 뒤늦게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계속 마음을 졸였다. 그가 발레를 잘 해도 문제, 못 해도 문제였다. 잘하면 수십 년 동안 아까운 재능을 썩힌 꼴이 되니 안타깝고, 제대로 못 하면 발레를 고이 품어온 그의 지난 세월이 안쓰러워 마음 아플 것이었다. 시작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덕출의 간절한 소망과 달리, 비슷한 꿈을 간직한 나의 마음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시행착오를 무한정 감수하기에 우리 인생은 너무 짧고 나의 마음은 유리알 같이 연약했다.


  그리하여 준비하였다. 대학 학과별 캠퍼스 드라마 컬렉션. 드라마의 묘미는 역시 자유로운 간접체험에 있다. 코로나19 탓에 캠퍼스를 밟아보지도 못한 대학생들을 향한 다정한 위로였을까. 2021년 여름 캠퍼스 드라마 세 편이 비슷한 시기에 방영되어 폭넓은 대리경험의 장이 마련되었다. 드라마 속 또 다른 ‘나’는 어떤 학과에서 어떤 전공을 하며 어떤 하루를 살아가는지 자유롭게 상상하며 마음껏 누려보기 바란다.

출처_JTBC
출처_JTBC

  〈알고 있지만〉과 조소과, 그리고 금단의 사랑

  〈알고 있지만〉의 남녀 주인공은 예술대학 조소과에 재학 중인 스물세 살 대학생이다. 실용과 효율의 잣대로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극단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예술을 전공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금기에 도전하는 혁명적인 도발에 가깝지 않을까.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니까. 쓸모없음의 무용(無用)으로 자신의 유용함을 증명하는 것이 예술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니까 말이다.

  사랑 없이 연애만 하고 싶은 여자와 가볍게 썸만 타고 싶은 남자의 ‘사랑 없는 사랑’. 아, 얼마나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사랑인가. 이쯤 되면 왜 제목이 ‘알고 있지만’인지 다들 눈치챘을 것이다. 새드엔딩인 걸 알면서도 시작하는 운명적 사랑. 위험한 걸 알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사랑. 그것이 바로 <알고 있지만>의 아름답고 쓸모없는 예술이란 이름의 사랑이다.

  다른 여자의 립스틱을 지우지도 않은 채 사실은 너와 키스하고 싶었다고 유나비에게 속삭이는 박재언. 그리고 그 입술에 자기 입술을 충동적으로 포개는 유나비. 아, 이때 스스로 헬게이트를 열었다는 유나비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오고… 역시 남자는 나쁜 남자가 매혹적이고, 예술은 금기를 깨고 위태롭게 빛날 때 가장 아름답다.

  물론 쓸모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최악의 미대 오빠도 있다. 유나비의 첫 남자친구이자 연상의 조각가.

  그는 전시회에서 유나비의 신체를 외설적으로 묘사한 작품에 ‘나비’라는 제목을 지어 출품하고는 관객들의 따가운 시선에 유나비가 괴로워하자 이해심과 신뢰가 부족해 오해하는 거라며 오히려 화를 낸다.

 가스라이팅의 귀재인 그가 수시로 다른 여자에게 작업을 거는 건 당연지사. 열심히 작업하는 줄 알았더니 그 작업이 이 작업일 줄이야. 아. 이놈의 뮤즈 타령.

출처_KBS
출처_KBS

  〈멀리서 보면 푸른 봄〉과 경영학과, 그리고 평범함의 덫

  만약 신이 있다면 〈멀리서 보면 푸른 봄〉을 보고 절망하지 않을까 싶다. 지구상의 모든 청춘이 이리도 고된 삶을 살고 있단 말인가. 여준, 남수현, 김소빈, 드라마에 나오는 세 명의 경영학과 학생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모두 힘들어한다. 만약 세상 만물을 창조한 신이 기업 CEO였다면 소비자 만족 하락과 판매 부진으로 경영권을 내놓아야 했을 것이다. 아.

멀리서 보면 푸른 봄, 즉 가까이서 보면 푸른 봄이 아니란 말 아닌가. 청춘이란 게 꿈과 희망이 넘치는 푸른 빛 같지만, 알고 보면 각각 자기 몫의 고민과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혹한 학대를 받으며 자란 풍요 속 빈곤의 ‘여준’과 과도한 알바로 인해 실신까지 한 절대빈곤의 ‘남수현’. 두 사람은 그래도 드라마에서 종종 봤을 법한, 그래서 그들의 고민이 심각하기는 하나 익숙한 감이 없지 않은 캐릭터다.

  하지만 김소빈은 좀 다르다. 너무나 평범한 나머지 취업할 때 내세울 게 하나도 없어서 고민인 경영학과 3학년이라니. 이를 어찌할꼬. 드라마 주인공 맡기에도 좀 밋밋하지 않은가 싶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회사에 제출하는 자기소개서에도 우여곡절 끝에 성취해낸 성장 서사가 꼭 필요하다. 극복을 위한 고난과 성공을 위한 실패. 고난과 실패까지도 아낌없이 매력자본으로 활용되는 극단의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의 비애랄까.

  〈멀리서 보면 푸른 봄〉에는 드라마 배경이 되는 경영학과 수업 풍경이 자주 펼쳐진다. 그중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대학 생활의 꽃 ‘팀플’이다. 여러 명이 하나의 팀이 되어 최선의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팀 프로젝트. 좁은 울타리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또 하나의 작은 지구랄까. 하지만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팀원끼리 말싸움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나중에는 감정이 격해져서 몸싸움까지 발생하는데…

  〈멀리서 보면 푸른 봄〉은 기존 캠퍼스물과 달리 생계, 진로, 가족관계와 사랑, 다양한 문제로 고민하는 20대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칭찬이 칭찬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랄까. 아. 인생은 리콜이 안 되나요.

  〈내일 지구가 망했으면 좋겠어〉와 국제 기숙사, 그리고 한국어 패치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는 한국에서 대학에 다니며 국제 기숙사에 사는 외국인 학생들이 주인공인 재미난 시트콤이다. 드라마 보다가 몇 번 웃었다. 근데 그건 재미난 에피소드 때문이 아니라 배우들 덕분이었다. 출연진 대부분이 진짜 외국인으로 한국말을 ‘지나치게’ 잘한다. 한국어로 욕을 너무나 찰지게 발음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학생 중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은 ‘민니’다. 한국드라마의 매력에 푹 빠져 한국으로 유학 온 태국인 유학생. K콘텐츠학과 2학년인 민니는 한국어 패치를 장착한 무늬만 외국인이다. 토종 한국인인 나도 따라 하기 힘든 20대 한국 대학생들이 쓰는 유행어나 신조어를 정말 잘 구사한다. 잘생긴 한국계 미국인 제이미를 보고 “개멋있어. 개존잘”을 연발하고, 〈사랑의 불시착〉으로 익힌 북한 사투리를 대사 한 글자도 안 틀리고 그대로 재현해낸다.

  자신이 호감을 가진 훈남 제이미가 기숙사 한국인 조교 박세완과 가깝게 지내자 불만을 토로하는데, 이때 민니는 한국드라마의 패턴을 꿰고 있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고급 멘트를 쏟아낸다. “한국드라마 개짜증나. 드라마 남주는 꼭 너 같은 찌질이 여자애를 좋아하고 나 같은 예쁜 애는 맨날 나쁜 년이더라.” 아, 질투하는 모습조차 귀엽고 사랑스럽다.

출처_넷플릭스
출처_넷플릭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는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 최초의 한국시트콤으로 가장 한국 시트콤스러운 캐릭터을 손꼽자면 금발 머리 미국인 ‘카슨’을 들 수 있다. 명품 선글라스보다 고추장을 더 소중히 여기는 카슨은 맨날 ‘나 때는 말이야’를 입에 달고 사는 꼰대 여학생이다. 그녀는 화가 날 때마다 ‘엠병’하고 거칠게 툭 한 마디 뱉고는 인상을 쓴다. 예전에 사귄 한국인 남자친구에게 배운 말이라는데… 어딘가 모르게 카슨에게서 군대 다녀온 ‘복학생 선배’의 느낌이 솔솔 풍긴다. 역시 외국어 빨리 배우는 지름길은 연애,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은 욕, 그것은 ‘국룰’인 듯하다. 아, 빠가야…

 

 

 


김민정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으로 문학과 문화를 분주히 오가며 나만의 장르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드라마 인문교양서 『당신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가요』 『당신의 밤을 위한 드라마 사용법』 에세이 『언니가 있다는 건 좀 부러운 걸』 소설집 『홍보용 소설』 이 사람 시리즈 『한현민의 블랙 스웨그』 등이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 《쿨투라》 2021년 9월호(통권 8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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