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Theme] 산업혁명기를 비추는 판타지 게임, '룸'의 세계관
[1월 Theme] 산업혁명기를 비추는 판타지 게임, '룸'의 세계관
  •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 승인 2019.01.30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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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의 판타지는 외양이 전부가 아니다 판타지 기반 게임이라는 말은 최근 범위가 많이 좁아진 말이다. 휘황찬란한 갑옷, 실용성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무기와 장비, 전사와 마법사, 궁수들이 적을 썰어제끼는 검과 마법의 세계가 당대의 판타지 게임을 요약한다.
 현실이 아닌 공간을 다루는 판타지는 그러나 지금의 게임들처럼 그 외양이 본질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관이다. 현실과 다른 세계라는, 현실이 아니면서도 판타지 공간 안에서 독립적이고 또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법칙이 존재하는 세계의 근간이 판타지의 세계관이다.
 현실이 아니면서도 현실적이라는 세계관 안에서 비로소 판타지는 성립되며, 이는 규칙에 의해 형성되고 지배받는 게임 안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단지 검과 갑옷과 마법으로 판타지 게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협소한 이야기인 것은 이 때문이다. 명작 판타지 게임을 이야기하려면 그래서 지리한 판타지의 클리셰 바깥에서 현실과 가상의 차이를 통해 의미를 드러내는 작품을 짚을 필요가 있다.

루카스 아츠의 90년대 판타지 어드벤처 게임 <룸>

 1990년 미국의 루카스 아츠가 출시한 어드벤처 게임 <룸Loom>은 <원숭이 섬의 비밀> 등을 통해 일가를 이룬 루카스 어드벤처 게임의 한 갈래다. 포인트 앤 클릭이라는 방식을 통해 명령어를 선택하고 대상을 지정하면 상호작용이 일어나며, 이를 통한 플레이로 이야기를 밀어나간다. 시리즈 전체가 가상의 공간과 법칙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 중에서도 은 마법이 직접적인 소재가 되는 대표적인 판타지 어드벤처 게임이다.
 <룸>의 세계 안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집단은 국가가 아닌 길드다. 자연을 가공해 내는 기술의 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의 세계에는 각각의 기술을 중심으로 뭉친 직업인들의 길드가 생겨났고, 자신들의 기술과 그로부터 얻어지는 이윤을 지키기 위해 영토를 구입하고 군사력을 기르는 ‘위대한 길드의 시대’를 열어제꼈다.
 직업길드가 중심인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직조공 길드 출신의 인물이다. 좋은 품질의 천을 만들고자 했던 직조공 길드의 노력은 어느 순간부터 베틀에 실을 걸면 자동으로 천이 만들어지는 수준에 이르렀고, 심지어 만들어진 천은 치유의 힘 같은 마법의 힘을 품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섬유와 염료 없이도 천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경외를 넘어 공포를 느꼈고, 직조공 길드는 위협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섬 하나를 구입해 외부로부터 고립되는 선택을 한다.

 산업혁명기 기술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우화로서

 게임의 제목이 베틀을 상징하는 ‘룸LOOM’인 이유는 직조공길드의 중심에 자리한 자동베틀이 갖는 의미 때문이다. 실을 짜면서 터득한 기술은 실 없이도 천을 만드는 마법의 경지에 도달했고, 덕분에 직조공 길드원들은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플레이어는 게임 안의 여러 대상들과 마법을 통해 상호작용하면서 게임을 이끌어 간다.
 이러한 마법의 체계와 원리는 실제 세계로부터 가져온 모티프다. 마법의 대표 소재인 베틀은 현실에서 산업혁명기 대량생산을 이끌어낸 영국 면직물 공업에서의 자동 방직기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는 아서 C. 클라크의 과학 3법칙처럼 산업혁명으로부터 가져온 베틀기술의 모티프는 게임 속 판타지 세계관에서 마법의 일종으로 그려진다.
 <룸>의 판타지는 산업혁명기에 마법으로 보일 정도로 급격하게 발전하던 기술과 그로부터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우화로 작용한다. 직조공 길드의 사생아이자 은둔한 섬으로부터 나가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주인공 보빈Bobbin의 이름은 실패에 감긴 실을 가리키며, 마법으로 가득한 판타지 이야기의 출발점이자 산업혁명의 촉발점이었던 방직기술의 시작점임을 동시에 가리키는 판타지 – 현실의 연계점이다.

 게임에서의 판타지는 현실 세계를 비추는 또다른 시각이자 거울

 상업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디지털게임은 판타지 개념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새롭고 의미깊은 무언가를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대중에게 익숙해 부가 설명 없이도 풀어낼 수 있는 판타지의 요소들로 화려한 무기와 마법과 같은 판타지의 외적 양식들을 차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판타지가 실제 세계의 규칙과 질서를 우회하여 드러내는 용도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룸>처럼 현실세계의 우화로서 기능하는 판타지야말로 본래적 의미를 잘 활용하는 사례일 것이다. 화려한 그래픽이 아닌 세계의 규칙과 작동방식 그 자체가 본질에 가까운 디지털게임에 있어서 판타지의 의미는 세계관과 질서의 우화로서 유의미하다.

 

 

* 《쿨투라》 2019년 1월호(통권 5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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