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익숙한 길을 벗어나 경계를 넘어서다: 부산 이우환 공간과 예술가 이우환
[미술관 탐방] 익숙한 길을 벗어나 경계를 넘어서다: 부산 이우환 공간과 예술가 이우환
  • 김명해(화가, 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1.09.04 0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우환(李禹煥, 1936~ ) 작가는 국내 현존 작가 중 작품 가격이 가장 높은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동양사상으로 현대미술의 한계를 뛰어넘은 세계적 예술가로 오늘날 현대 미술사에서 분명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티스트이다. ‘이우환’이라는 이름보다 ‘LEE U FAN’이라는 이름으로 국제 화단에 더 통하며 ‘그리지 않는 그림’의 철학자로 일본과 미국, 유럽을 넘나들며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우리나라 미술관’ 검색을 하다 우연히 “이우환 공간”을 알게 되었다. 부산시립미술관 바로 옆, 새로운 미술관이 있는 걸 ‘왜 몰랐지!’ 하며 미처 알지 못한 사실에 대해 스스로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면서 ‘세계 거장의 작품을 빨리 봐야지’ 하는 반가운 마음에 부산으로 향했다.

관계항-길모퉁이, 철판·자연석, 2015

  “이우환 공간”은 부산시립미술관 별관으로 이우환 예술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는 장소로 2015년 4월 10일 개관한 미술관이다. 일본 나오시마의 “이우환미술관(2010년 개관)”에 이어 세계 두 번째 개인미술관으로, 이우환 작가가 직접 입지선정부터 건축 기본 설계와 디자인을 한 공간이다. 단순한 직육면체 모양의 미술관 건물은 콘크리트 골조에 앞면 유리로 되어 있어 깔끔하고 세련미가 느껴진다. ‘이우환 공간’은 대표작들을 나열하는 보통의 전시관과 달리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공간과 작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두를 함께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소망이 투영된 곳으로,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시공간은 1층과 2층이다.

  미술관 바로 앞마당 평평한 잔디에는 이우환 작가의 조각 작품 네 점이 설치되어 있다. 네모난 철판을 중심으로 배치된 네 개의 돌들이 도란도란 모여 앉아 뭔가를 논하는 것 같은 〈회의〉(2013), 돌 위에 철봉이 걸쳐있는 〈관계항〉(2015), 붉은 철판이 인상적인 〈관계항-길모퉁이〉(2015), 경계를 지음으로 드러나는 〈관계항-안과 밖〉(2016) 등 작품 모두 자연석에 철판(철봉)이나 스테인리스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 설치 작품들은 미술관 1층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조각 작품들과 같은 맥락이다.

  이우환 작가는 ‘한국단색화가’이기 이전에 1960년대 후반 일본의 전위적 미술운동인 모노하(物派)의 이론과 실천을 주도한 예술가이다. ‘모노(もの)’는 일본어로 물체 즉 물건을 뜻하는 단어로 이 미술운동은 실제 사물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을 통해 물질성을 부각시키고 사물과 시간, 공간, 관계로 접근하는 현대미술의 한 영역으로 알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우환 작가는 모노하를 “만드는 것에 제동을 걸고, 만들지 않은 것을 끌어들이는 시도이다. 즉 만드는 것과 만들지 않은 것을 관계시키는 획기적인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서양의 미니멀리즘과 동양철학을 결합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한 이우한 작가는 이질적인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여 만남과 무한을 중심으로 한 예술세계를 형성한 것이다.

회의, 철판·자연석, 2013

  나는 60년대 말부터 자연석과 철판을 연관 짓는 짓거리를 해 왔다. 자연석은 주먹만 한 크기라도 몇십만 년이 넘거나 어떤 것은 지구가 되기 전에 굳어진, 인류의 시간을 훨씬 넘어선 불투명하기 짝이 없는 그 무엇이다. 철판은 자연석에서 추출한 성분을 잠깐 만에 추상 형태로 재구성한 산업사회의 물질이며 아직 구체적인 물건이 되기 이전의 엉거주춤한 그러나 뉴트럴(neutral)하고 명백한 그것이다. 돌과 철판은 부자(父子) 관계에 있다. 이 관계를 만들어낸 자가 인간이니 돌과 철을 마주하면 자연과 산업사회가 이어진다. 그래서 돌과 철을 어우르면 인간은 그 앞에서 자연이나 우주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 아닌가. 어쨌든 나는 자연석과 철판 사이에 서면 어느덧 먼 과거와 아득한 미래가 함께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나를 발견하듯이 새로운 제시물이 떠오르기도 한다.
  -2009년 국제갤러리 개인전 카탈로그에 실린 글 중에서

관계항-좁은 문, 2015, 전시전경ⓒ부산시립미술관

  1층 전시실로 바로 들어서면, 균열이 생긴 유리판 위에 올려진 커다란 돌! 아니, 유리판에 돌을 떨어뜨려 균열이 가게 만든 작품, 바로 유명한 〈관계항-지각과 현상〉(1969)이다. 이 조각은 〈관계항(relatum)〉시리즈 초기 작품으로 도록이나 사진으로만 보다 실제 작품을 접하니, 순간 놀랍고 경이로웠다. 앞쪽으로 향해있는 돌의 면엔 연주홍빛 화석 같은 문양이 어렴풋이 드러나 보이며 ‘찌지직∼’ 소리를 내며 갈라졌을 두꺼운 유리판이 전부다. 이질적인 두 재료의 만남과 결합,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옆 전시실 〈관계항-좁은 문〉(2015)은 두 개의 돌덩이에 의지한 대형철판이 좁은 문을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바닥에 흰 자갈이 깔려있어 작품 주위를 관람할 때마다 들려오는 자갈 소리와 함께 작품의 관계성을 상상해 본다.

  또한 둥글게 나열된 여섯 개의 돌 사이사이 짧은 철봉들이 연결된 듯 놓여있는 작품 〈관계항〉(2015)과 벽면에 목탄으로 드로잉하여 자연석과 철봉으로 배치한 〈관계항〉(2015), 철판 위에 자연석을 올려놓은 〈관계항-침묵A, B〉(2015) 등 미술관 외부와 내부 1층에 설치·조각되어 있는 작품들이 이러한 모노하 작품들이다.

관계항, 2015 ⓒ부산시립미술관

  현재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 작품들은 미술관 건립과 동시에 작품 설치를 겸했다고 한다. 이우환 작가는 원래 작품이 놓이는 장소와 대화하며 작품의 발상을 얻는 예술가이다. 그의 작품은 사물과 공간, 주변 오브제의 관계를 중시하며 대상주의 관점의 닫힌 의미 체계의 오브제를 뛰어넘어 외부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울림을 통해 열린 ‘관계의 장’을 창출한다.

  일렬로 나열된 전시장이 벽 하나로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시실과 전시실 사이에 작은 빈 공간들이 있다. 다른 전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알고 보니, 이 공간은 다목적 공간이 아니라 벽 하나가 공간을 구획하는 역할을 하지 않고 전시 공간에서 다른 전시 공간으로 이동할 때 자신이 느낀 감동, 감성 같은 것들을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는 의미를 되새겨 보는 그런 공간으로 이우환 작가가 고안했다고 한다. 때문에 작품과 공간은 공간 자체가 특별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미술관 측은 설명한다. 그래서 미술관 명칭이 “이우환 공간”이라 했나 보다.

바람과 함께 오른쪽.1988 왼쪽.1990 ⓒ부산시립미술관

  2층 전시실에는 이우환 작가의 대표 회화작품 13점이 전시되어 있다. 1970년대 〈점으로부터(From Point)〉, 〈선으로부터(From Line)〉 시리즈로 시작하여 80년대 〈바람〉, 90년대부터 현재까지는 대형 캔버스에 한 번의 붓질을 담은 〈조응(Correspondence)〉, 〈대화(Dialogue)〉 시리즈를 통해 존재와 사물, 공간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표현하며 자기만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마련했다.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연작은 붓 끝에 묻은 안료가 다 소모될 때까지 점과 선을 반복해 그으면서 행위의 흔적과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집중력과 규칙성에도 불구하고 선의 움직임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간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미묘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단아하고 차분한 느낌이다.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통해 무한의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이다.

점으로부터, 1974, 부산시립미술관제공

  암청색 무기안료 가루를 아교에 때로는 기름과 섞어 완전히 착색될 때까지 놓아둔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붓에 물감을 듬뿍 묻히고는 바닥에 놓은 캔버스에 점을 찍는다. 화면의 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진행하며 차례차례 점을 찍는다. 처음에는 붓 자국이 짙지만 차차 흐려진다. 계속 진행함에 따라 흐릿해진 점들이 점차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면 나는 붓에 물감을 묻혀 붓 자국을 계속 되풀이해서 찍어 나간다.
  - 《이우환: 회화 1973-2001》 Kunstmuseum Bonn 2001 전시도록 중에서

  텅 빈 공간 한쪽 벽에 찍힌 평평한 붓자국. 작품 〈대화〉는 집중을 다해 조심스럽게 흔적을 남긴 작가의 작업행위가 연상된다. 또한 무채색 뿐만 아니라 명도와 채도가 드러나는 색으로 변화시킨 〈대화〉 시리즈도 있는데, 대형 캔버스 위에 채색된 안료의 두께만 보아도 말리고 칠하는 반복된 과정을 거침으로써 오랜 시간과 수고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관계항 2015 철봉, 자연석

  나는 붓에 물감을 머금게 하고 호흡을 멈추고 캔버스의 정해놓은 위치로 한숨에 내려선다. 캔버스에 붓이 닿자마자 필드는 일변한다. 조용히 힘차게 붓을 움직일수록, 언저리에 소스라이 파문이 일어나고, 캔버스는 터트림의 장이 된다. (중략) 그리는 것과 그리지 않는 부분이 부딪혀 상호자극하고 화면공간이 열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여백현상이라 부른다. 그것은 어떤 터트림에 의해 대상과 필드가 서로 관계하여 생생하게 열리는 공간을 말한다. 여백은 존재가 아니라 관계로 생기는 반향의 현상인 것이다.
  - 《현대문학》 2020년 1월호 「여백천리」 중에서

  1990년대 이전까지 여러 개의 점이나 선이 등장하던 것과는 달리 캔버스에 점이 한 개나 두세 개만 찍힌 아주 간단한 구조로 변화했다. 작가는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호흡과 자기수행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도의 집중력으로 치밀하게 계산하여 작업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결과로 얻어진 작품은 조용한 긴장감과 미묘한 여운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의식 너머에 있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 문제 제기를 하며 작품을 통해 점과 선의 개념, 의미, 관계, 무한한 시공간 개념을 담고자 했다. 동양철학을 토대로 작품에 임하는 명확한 이론과 논리를 바탕으로 여백과 절제미가 드러나는 세련된 작품들을 탄생시켰으며, 국제미술 흐름 속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와 추이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내며 고유한 예술 세계를 전개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물감을 갠다거나 캔버스를 맨다거나 그림을 붓으로 그린다거나 이것은 아주 고전적인 일이지만, 아주 로테크. 하이테크가 아니고 아주 힘겨운 것을 일부러 찾아서 고생하는 건데 지금 젊은 애들이 보면은 ‘지겹고 그거 뭐 그렇게 고생해야 하나.’ 나는 그 고생을 사서 합니다. 사서 하기 때문에 내가 작업한 그 과정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고 내 삶이예요. 그건 나에 있어서는 절대에 가까울 정도로 중요한 삶의 순간입니다.
  - KBS 특집 다큐 〈예술가의 초상-제1편 무한을 드러내다 이우환〉 인터뷰 중에서

  2층 전시실 한쪽 공간에 이우환 작가 다큐 영상이 상연되고 있었다. 한참을 앉아 작가의 미술철학과 그를 바탕으로 작업에 임하는 모습, 세계 유명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등등 무한의 예술세계에 빨려들 듯이 시청하면서 앞으로의 행보와 새로운 작품을 기대해 보게 된다. 이우환 작가의 작품은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들에게는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작가의 작품 의도나 전시구성을 알고 보면 더욱 풍부하고 풍요로운 감상을 즐길 수 있다.

 

 


참고자료
부산시립미술관 https://art.busan.go.kr
『Lee Ufan - 무한의 예술』 김복기, (주)에이엠아트, 2020

 

* 《쿨투라》 2021년 9월호(통권 87호)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