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태양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10월 Theme] 태양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 최창근
  • 승인 2018.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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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과 강릉
ⓒ태양의후예
ⓒKBS2

  철없던 유년시절,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모르고 까무룩하게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다. 그때 잠결에 무심코 보았던 드라마가 <아씨>였을까 아니면 <여로>였을까.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틈틈이 몰래몰래 챙겨보던 김수현의 <사랑과 진실>과 나연숙의 <달동네>, 김정수의 <전원일기> 그리고 TV문학관 시리즈는 잊을 만하면 꺼내보는 내 마음의 보석상자였다.
  그 후로 다큐멘터리 영화만큼이나 애청하던 밤하늘의 별과 같은 그 무수한 드라마의 목록들. 송지나의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 주찬옥의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김운경의 <서울의 달>, 노희경의 <거짓말>과 <바보 같은 사랑>, 인정옥의 <네 멋대로 해라>와 <아일랜드>, 김도우의 <눈사람>과 <내 이름은 김삼순>, 박연선의 <연애시대>와 <청춘시대> 그리고 최근의 정성주의 <아내의 자격>과 <밀회>, 김은희의 <시그널>, 유보라의 <눈길>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제목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맛깔나는 명품 드라마들을 꼬박꼬박 챙겨보며 한 세월이 흘러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그렇게 청춘이 쓱 지나갔다. 그 끝에 김은숙의 드라마가 존재한다.

ⓒ도깨비
ⓒtvN

  <시크릿 가든>이나 <신사의 품격>, <태양의 후예>, <도깨비>가 그랬던 것처럼 요즘 <미스터 션샤인>이 장안의 화제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듯 이 모든 드라마를 쓴 사람이 김은숙이다. 2001년에 데뷔작을 무대 위에 올리며 문단과 연극계에 발을 디딘 나는 같은 해에 대학로의 작고 아담한 극장에서 공연됐던 김은숙 작가의 <정인情人>을 우연히 관람하러 간 적이있었다. 김 작가가 드라마를 쓰기 전에 먼저 희곡으로 데뷔했던 시절의 작품이다. 작가의 희곡을 무대 위에 올렸던 연출가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상하게도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로 만난 30대 남녀의 러브스토리인 이 짧은 연극 한 편에 오늘날 ‘로코(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라 불리며 한국 드라마계의 대표적인 작가로 확고하게 자리를 다져가고 있는 김은숙의 모든 것이 녹아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뭐 그냥 그렇고 그런 뻔한 사랑 이야기겠지!’ 했다가 한번 빠져 들면 좀처럼 헤어날 길 없는 기이한 마력을 내뿜는 김은숙표 드라마는 아주 오래전에 썼던 <정인>이라는 희곡에서부터 이미 그 매력의 씨앗이 촘촘하게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러나 희곡과 드라마는 언뜻 그 구조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장르의 문학이다. 뛰어난 시인이라고 해서 똑같이 뛰어난 소설을 쓸 수 없듯이 작가마다 자신에게 잘 맞는 장르가 있는데 김은숙은 무대보다는 방송에서 자신의 역량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작가임은 틀림없는 듯하다.

ⓒ신사의품격
ⓒSBS

  사실 나는 사적인 자리에서 김 작가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처음 연극을 접했던 연극학교의 스승이었던 이만희 선생님(영화 <만추>의 감독이 아닌 <피고지고피고지고>의 희곡작가)을 통해 김 작가가 선생님의 희곡 <돌아서서 떠나라>를 <연인>이라는 드라마로 각색할 때 같이 만났던 얘기를 전해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김 작가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다니던 학교는 달랐지만 우리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예로부터 뛰어난 작가와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해서 ‘문향’으로도 회자되는 강릉 출신의 동료 작가들(그러니까 신사임당의 후예들!)이 있다. 고등학교 동기였던 영화감독 김성훈을 비롯해서 시인 김선우, 소설가 김별아, 희곡작가 김광탁들은 그 시기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문단과 연극판에 나와서 서로 인사를 나눈 사이이다. 활동하는 분야는 모두 다르지만 다들 각자의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그 화려한 작가군단에 김은숙 작가까지 들어오면 그야말로 ‘강원도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파워를 구축하는 셈이다.
  재밌는 점은 언제부턴가 그녀의 드라마 안에 내게도 익숙한 동해안의 풍경과 장소가 작품의 배경으로 곧잘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강릉을 중심으로 산 좋고 물 맑은 강원도의 자연, 숨은 비경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김은숙의 작품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직업적으로 성공을 하고 난 다음에도 고향을 잊지 않는, 혹은 고향을 배려하는 작가의 마음씀씀이가 돋보인다고 해야겠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녀가 나서 자란 낭만의 시원인 ‘강릉’은 그리고 그 강릉을 품고 있는 ‘강원도’는 수많은 작가들의 영감의 원천인 공간인것을.
  드라마작가로서의 김은숙은 동시대의 트렌드를 꿰뚫어보는 대중적인 감각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감각과 재능은 작가의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이겠지만 타고난 천품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할 터이다. 절대적이고 운명적인 사랑, 현실을 초월한 판타지에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적 요소가 뒤섞이면서 한 시기의 흐름이나 유행을 따라잡는 빼어난 눈썰미와 맵시가 그녀의 작품을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희곡을 쓰고 시나 소설을 무대 위에 올리는 일이 주업인 나로서는 앞으로도 김 작가가 그녀의 자리에서 오래도록 꾸준하게 좋은 작품을 써주기를 인접 분야에 종사하는 창작자의 한 사람으로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좋아하고 즐겨보는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도 바랄 뿐이다.

 

 

* 《쿨투라》 2018년 10월호(통권 5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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