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문화평론] 한중문학에 나타난 땅과 삶의 협주
[K-문화평론] 한중문학에 나타난 땅과 삶의 협주
  • 김종회(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 승인 2018.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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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와 『대지』와 『붉은 수수밭』이 함께 말하는 것

  1. 머리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 바다와 강 등 물이 있는 곳을 제외한 부분을 ‘땅’이라 한다. 누군가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처럼 지역을 의미하기도 하고, 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토를 규정하기도 한다. 좀 더 의미망을 확장하여 살펴보면 ‘토지(土地)’와 ‘대지(大地)’ 등의 개념이 있다. 토지는 땅 가운데서도 경지(耕地) 및 주택으로 사용하는 지면으로, 생산을 위한 경작이나 재산권 소유의 뜻을 가진다. 대지는 대자연의 넓고 큰 땅 또는 좋은 묏자리를 이를 때 쓰는 말로, 보다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어휘 형식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땅 위에서 생명을 받고 땅 위에서 살다가 죽는다. 그러기에 서구문화의 근원에 해당하는 그리스 신화 들머리에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가 등장한다.
  동서고금의 많은 시인·작가들이 땅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그 경과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어쩌면 인류문화사 전반을 검색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 박경리 선생의 10주기를 기념하여, 그의 작품 『토지』의 확장된 무대를 찾아와서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대회는 그 의의의 범주가 자못 넓고 깊은 편이다. 한국의 토지학회와 중국의 길림대학교가 연대한 까닭으로, 『토지』와 더불어 중국의 땅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한 작품을 함께 검토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의도다. 그리하여 선택한 작품이 펄벅의 『대지』와 모옌의 『붉은 수수밭』이다. 세 작품의 포괄적 지향점을 도출하려는 시도인 만큼, 우선 정치한 학술적 접근의 시각은 내려놓기로 한다. 
  
  2. 박경리의 『토지』,
  토지에 바탕을 둔 한과 생명의 문제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역사성·사상성·문학성을 고루 갖춘 대작이다. 한국문학의 전통에서는 보기 드문 ‘문·사·철(文·史·哲)’의 세 요소를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언어의 집이다. 『토지』가 가진 장대한 분량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민족어와 민족정신의 집대성이라 할만한, 외형과 내면 모두에 걸친 집요한 작가정신과 그것을 발현한 이야기화의 역량이 문제다. 『토지』는 그런 점에서 한국인의 사상과 문학이 남긴 큰 나무다. 1955년 전후문학의 시대에 출발하여 50년을 문인으로 살면서, 작품을 통해 걸출한 봉우리를 이룬 작가이기에 한국문학은 박경리를 높이 평가한다. 그는 소설이라는 담론의 형식으로써 자신의 신산하고 극적인 체험을 넘어 길이 표본이 될 희망의 그루터기들을 세상에 남겼다.
  시대적 삶에 따른 소설적 이야기의 확장을 위해 『토지』의 공간적 무대는 이야기의 전개와 더불어 국외로 확대된다. 평사리라는 비교적 정적인 공간에서 시작된 이 소설의 이야기가 북만주 간도로 무대가 바뀌면서 격변의 시대 속으로 진입한다. 1, 2부의 주요 인물들이 농민들이었고, 제목이 또한 ‘토지’ 라는 측면에서 농민소설로의 면모가 부각되었다. 농지(農地)와 농자(農者)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그 가운데 잠복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사적 특성과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작가의 세계관일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토지라는 삶의 근원에 연대된 인간의 가치, 그 땅의 산물과 사람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이 작품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토지에 바탕을 둔 한(恨)과 생명의 문제다.

  3. 펄 벅의 『대지』,
  혼돈 시기에 대지 위에 선 민중의 삶
  펄 벅은 미국의 소설가로, 사회·인권운동가이자 아시아 지역 전문학자로도 활동했다. 특히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의 나라들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통해 동양인의 정신을 서구에 소개했다. 그런가하면 아시아 각국을 방문하면서 여성과 아동의 인권 보호를 위한 자선사업도 펼쳤다. 193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하소설 『대지』는, 혼란한 시기의 근대 중국을 배경으로 빈농 왕룽 일가 3대의 삶을 그렸다. 이 소설은 ‘인종을 뛰어넘어 인류 상호 간의 일체감을 불러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여성 작가로서는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이었으나, 정작 미국에서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대지』는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왕룽이 점점 부를 축적해 가는 모습을 통해 근대 중국의 격변기를 그린 소설인데, 이야기의 초점은 왕룽 보다 오히려 그 아내 오란에게 맞추어져 있다 할 것이다. 오란은 아이를 낳고 집안일을 전담하며 육체적인 노동도 마다하지 않는 민초(民草)로서의 생명력을 보여주지만, 정작 남편으로부터는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 일가가 부자들이 숨겨놓은 보물을 발견하고 ‘대지’를 소유하는 지주가 된 것도 사실은 오란의 공이었으나, 오란은 여전히 가축과 같은 존재로 취급된다. 이 소설은 대지 위에 선 민중적 삶의 유형과 더불어 기구한 한 여자의 일생을 함께 펼쳐 보임으로써 땅과 삶의 존재양식을 웅숭깊게 그렸다.

  4. 모옌의 『붉은 수수밭』
  역사의 격랑 헤쳐온 민초의 생명력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모옌(莫言)의 첫 장편 소설이자 대표작인 『붉은 수수밭』은 일본의 압제와 봉건 제도에 저항한 중국 민중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80년대 중국 문단의 이정표란 평가를 받은 중편 「붉은 수수」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을 한데 묶은 연작 형식으로 되어있다. 소설 속의 시간대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이며, 산둥성(山東省) 가오미(高密) 지방을 배경으로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는 ‘민중 영웅’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끌어안고 있다. 작가가 궁구(窮究)하여 세심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건보다는 척박한 삶의 터전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의 모습이다.
  소설 자체에서도 그러하지만 이것이 영화로 만들어진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의 동명 영화에서도, 그 배경의 풍광은 장엄하게 펼쳐진 ‘붉은 수수밭’이다. 이는 중국 민중의 삶터요 원시적 생명의 근원인 ‘땅’을 상징한다. 땅의 포용과 부양이 없이는 인간의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 특히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덜한 기층 민중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소설의 거의 모든 가족 구성원들은 ‘영웅’이자 ‘속물’의 다층적 행위를 나타낸다. 아마도 작가는 이 인물들의 중층적 성격을 드려내기 보다는,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그와 같은 굴절된 인간의 삶을 견인했다고 발화하려 했을 터이다.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더 무거운 명제였던 시대사의 형상이 그 속에 잠복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5. 마무리
  지금까지 살펴본 세 작품은 모두 중국을 소설의 무대로 설정하고 있거나 중국 민중의 삶을 다룬 것이었다. 동시에 토지, 대지, 밭 등 땅을 이야기의 바탕에 두고 그로부터 민초들의 원시적인 생명력을 도출해 보여주는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토지』는 장대한 서술 분량 중 일부의 무대를 중국 대륙으로 했으며, 『대지』와 『붉은 수수밭』은 각기 미국 작가와 중국 작가의 작품이나 무대가 온전히 중국 내륙이었다. 이 작품들은 기층계급인 민중의 생활상, 특히 여성들의 힘겨운 삶을 대지의 포용력과 견주어 전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과 ‘땅’이 함께 지니는 소중한 가치를 말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오랜 역사과정을 가진 힘의 원천임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토지』의 서희나 『대지』의 오란, 『붉은 수수밭』의 여성인물들은 각기의 목소리로 각기 시대의 ‘여자의 일생’을 대변한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샤롯트 브론테의 『제인 에어』, 토마스 하디의 『테스』 등 이 계열의 명작 리스트에 여기서 살펴본 세 작품을 부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여성에 대한 인식의 발현을 넘어, 우리가 생애 전반에서 마주하는 ‘타자’의 문제를 새롭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와 같은 시각의 방향과 범주를 작동한다면, 이 소설들은 삶의 터전인 땅에 의한 이해를 한결 풍성하게 추수할 수 있을 것이다. 땅과 그 생산, 사람과 산물에 대한 통찰은, 어렵고 힘겨운 환경 가운데서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남아 있는 ‘희망’의 존재를 감각하는 저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김종회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 평론집으로 『문학과 예술혼』 『디아스포라를 넘어서』 『문학에서 세상을 만나다』 『문학의 거울과 저울』 등, 저서로 『한국소설의 낙원의식 연구』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 등과 『글에서 삶을 배우다』 등의 산문집이 있다. 김환태평론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등 수상. 현재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및 한국비평문학회 회장.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쿨투라》 2018년 9월호(통권 5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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