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다양성의 시대, 사회를 연결하는 미래학교: 김진경 국가교육회의 의장
[INTERVIEW] 다양성의 시대, 사회를 연결하는 미래학교: 김진경 국가교육회의 의장
  • 함돈균(문학평론가, 미지행 대표)
  • 승인 2021.09.0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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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쿨투라(이하 쿨) 9월호 테마가 ‘뉴노멀 학교’인데, 주로 ‘미래학교’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뤄 보고자 합니다. 학교 교육 시스템이 요즘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대기업 사원들이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기보다는 구글에서 그 분야 최고 현장 전문가에게 필요한 교육을 배운다든가,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이슈에 대해 현장에서의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융합적 인재 양성을 지향하는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의 설립 시도, 혹은 미네르바 대학, SM Institute와 같은 온라인 중심의 교육 시스템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을 습득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학교 수업이 학생 중심의 수업, 학생이 필요로 하는 글로벌화된 수업의 형태로 바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죠. 그런데 아직 국공립학교의 교육 시스템은 바뀌어가는 학생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예요.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학교를 설립하고 정식 교육 기관으로 허가를 받는 게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SMI 같은 경우에는 그걸 외국에서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미래교육에 관한 전문가이신 두 분을 모시고 바뀌어가는 미래 교육, 뉴노멀 학교에 대해 들어보고자 합니다.

  함돈균(이하 함) 미래학교라고 할 수 있는 미지행의 디자인과 설립을 시도하면서 ‘정식’ 인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게 되었어요.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제도적 인가 이전에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새로운 학교가 ‘학교’로 인정되는 문제 여부입니다. 한국에서는 정말 새로운 실험이 ‘보편적’인 형태로 실현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획일적 사고, 문화가 지배하는 보통교육 환경에서 훈련 받았고, 특히 입시라는 사회적 컨텍스트가 워낙 강력해서 이 바깥에서 이뤄지는 모델을 ‘정상’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인지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역으로 말해서 정식 인가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뉴노멀 학교’의 취지와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미래에서 배움은 전통적 제도로서 인가받았던 학교 체제 너머, 사회 전체에 퍼져있기 때문이죠. 오늘 저는 인터뷰어로 나왔지만 김진경 선생님을 모시고 그런 이야기를 공유해 보고싶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뉴노멀 학교 운영은 함 선생님도 하실 말씀이 많겠죠? 인문학자이면서도 새로운 교육운동가로 직접 미래 학교를 디자인하고 설립을 시도하고 계시니. 교육부, 교육청에서도 지금 뉴노멀 학교에 관한 멘토로서 강의와 제안적 발제를 계속 해오고 계신 걸로 압니다. 그리고 오늘 초대한 김진경 선생님은 교사로 재직하셨고, 또 해직되셨고, 그 후 평생 교육운동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오셨으니까 인터뷰이로 적격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잘 아시겠지만, 김진경 선생님 교육 에세이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를 비롯하여 프랑스에서 주는 앵코륍티블을 수상한 동화 시리즈 『고양이 학교』를 출간하시는 등 교육에 관한 책들을 많이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청와대 교육문화 비서를 거쳐 지금은 국가교육회의 의장을 맡고 계시죠. 일평생 교육현장에서 헌신하고 계신 김진경 선생님과 미래교육 전문가인 함돈균 선생님, 두 분이 나눌 이야기들이 바로 우리 미래 학교의 반석이 되지 않을지요?

  그래서 저도 김진경 의장님이 정부에서 교육 정책에 관련한 일을 지금 하고 계시지만, 오늘 인터뷰에서는 정부 정책입안자로서보다는 작가이자 평생 교육운동가로서 활동하신 김진경 선생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요. 글을 쓰시면서도 제도 바깥에서 조직을 만들고 그것을 제도화하는 데에 선구적인 역할을 평생 일관성 있게 해오신 존경하는 선생님이시잖아요. 그래서 호칭도 김진경 선생님으로 하겠습니다.

   두 분 선생님이 딱딱한 토론보다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교육에 관한 정책적인 부분보다는, 앞서 함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오늘 이 자리가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 교육을 책임질 뉴노멀 학교에 대한 부드럽고 진솔한 대화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새로운 교육’이라고 하는 영역

  김진경 선생님을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교육에 대한 일을 오래 해오셨고, 또 작가이기도 하십니다. 선생님께서 교육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그 실천들을 하나의 ‘운동’으로 구체화해나가시던 초기에 저는 어린 학생이었는데, 선생님의 교육 운동이 하나씩 실현되던 그 과정에서 최초의 교사 조직이 만들어지는 등 여러 성과가 있었고, 저는 선생님께서 만들어주신 그 토대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즈음에 대한 제 기억들을 떠올리며 선생님과 오늘 주제인 교육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어요. 사실 선생님도 그렇지만, 저도 교육에 관한 이런저런 일들을 해오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30대 시절의 대부분을 글 쓰고 평론하는 삶을 살았는데, 또 한편으로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자로서 강의하는 사람의 입장으로도 살았으니까요. 지금은 물론 대학 교육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삶이지만요. 지금은 제가 가지고 있는 인문적인 지식을 시민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인문학적 ‘지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제가 인문학을 하면서 갖게 된 어떤 관점들이 있고, 그것을 통해 지금의 교육 시스템이나 배움의 방식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 대한 관심 때문에 ‘운동’으로 나갔던 것 같고요. 그래서 인문 교육을 바탕으로 한 NGO(시민행성) 같은 것들도 만들어보고, 또 그런 생각들이 ‘미래학교’라는 아이디어로 더 구체화되어서 동료들과 함게 ‘미지행’이라는 대학을 디자인하고 그 설립을 시도해보기도 했습니다. 물적 토대가 없었던 데다가, 팬데믹이 바로 다음 해에 지구촌을 급습하면서 이 프로젝트는 유보되었지만, 포기된 것은 아닙니다. 한 3년 전쯤에 이 활동이 여러 언론에서 다뤄지며 크게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죠. 그때 많이 들었던 질문이, “이게 ‘미네르바 대학’하고 비슷한 거냐”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또 두 권 정도의 교육 대담집을 냈었어요. 미래 교육에 대해 스탠포드대학교의 폴킴, 아시아개발은행의 책임자들과 미국에 건너가 나눴던 대화들을 정리한 그런 책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교육청, 서울문화재단 같은 공공기관에서 제가 했었던 일이나 생각들, 아이디어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그런 일들에 대한 멘토 역할을 좀 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연구디자인센터에서 산업과 인문적 관점을 통합시키려는 디자인교육을 시행하려고 해서 제가 멘토 인문학자로서 자문과 교육기획에 참여하기도 하고요. 작년에는 파주에 있는 ‘파티(PaTI)’라는 대안대학, 파티에서는 ‘독립대학’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데요, 씩씩하고 당돌한 디자인학교에서 선생을 했었습니다. 지금은 SK의 플라톤아카데미의 펀딩으로 설립 추진되고 있는 전환적 삶을 위한 교육연구프로젝트-센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대학선생을 하고 전형적인 인문학자, 글쟁이로 살다가 어느새 저도 모르게 밖으로 나와서 참 많은 여정을 거쳤던 거 같네요. 일관되게 그것은 ‘새로운 교육’이라고 하는 영역이었습니다.

  김진경(이하 김) 저는 주로 전통적 ‘학교’를 중심으로 그 제도와 조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함 선생님은 역시 다음 세대라서 저보다 더 실험적이고 다채로운 영역에서 어려운 시도를 해오셨던 것 같습니다. 세상이 다원적인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기도 한 거죠. 그러고 보면 시대가 분명히 바뀐 거 같은데 공교육제도는 참 보수적이라고 아직도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듯합니다.

  왜일까요. 교육과 관련한 다른 전문가 분들이 많지만, 제가 김진경 선생님을 뵙고 싶었던 이유도 그겁니다. 이 대답은 상식적인 교육학자나 교육관료 이야기를 통해서는 답이 안 나올 거 같아요. 제도와 비제도 양쪽에서 치열한 ‘운동’을 해 온 사람만이 인사이트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정말 지금 정부에서 기대를 했었지만 실망한 영역이 교육정책의 비전과 실제의 변화였어요. 특히 문재인정부의 초대 교육부장관에 김상곤 전 경기교육감이 임명될 때 기대가 상당했지만, 결국에는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있다가 내려오시더라고요. 게다가 지금은 문명의 몰락에 가까운 대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제도는 해방 이후의 입시상황에서 본질적으로 한 발도 전진을 하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이고요. 교육의 큰 전환과 관련하여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육문제의 시대적 변화와 구조

  교육 문제도 시대의 일부이다 보니 시대마다 문제가 되는 상황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른 것 같아요. 시대적으로 크게 보면 변화의 중요한 타이밍에 변화를 놓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적으로 시대적 감수성이나 관점이 크게 달라졌던 분기점이 90년대 초거든요. X세대가 등장할 때. 그때 근본적인 정책 전환을 했어야 되는데, 할 수 없었던 거죠. 그때부터 학교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그게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는 그런 상황이라고 보이거든요. 무슨 말씀이냐 하면 학교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인 학생이 90년대 초 불과 4~5년 사이 애들이 엄청나게 변했어요. 전국적 교육혁신운동이 일어났던 88~9년 교실에 있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 있게 됐거든요. 90년대 이전의 교육 문제 상황과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요. 제가 76년에 처음 교사 일을 시작했는데, 한성고등학교였어요. 그때가 박정희정권 시절이었죠. 기본적인 문제가 아이들하고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정권하고의 문제였죠. 교사 운동이 시작된 게 그런 문제로부터 시작됐는데, 그 문제는 사실 90년대에 끝난 거예요. 이제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는데, 교육운동을 전개하던 전교조가 그걸 못 쫓아가는 거죠.

  89년에 전교조 교사 1,500명 가량이 해직됐잖아요. 애들을 무척 좋아하고, 애들하고 소통하려고 애쓰는 선생님들이었으니까요. 근데 해직 후 5년 만인 94년에 그 선생님들이 복직했죠. 굉장히 행복해할 줄 알았어요. 근데 그 교사들이 다 우울증에 걸리고, 정신과 치료 받고 그랬어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89년도에 가르쳤던 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있었다는 거야. 그래도 예전에 아이들하고 소통했던 경험이 많으니까,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소통을 해 보려고 했죠. 그런데 소통이 안 되는 거야. 굉장히 근본적인 변화가 온 거죠. 그래서 이제 애들이 어떻게 변하는 건지, 왜 변한 건지, 한 5년 동안 추적하는데 그때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더군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최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결론만 말하면 이런 거예요. 우리 산업화세대 의식구조의 가장 큰 특성은 정신의 가치는 아주 높이 평가하고 몸의 가치는 아주 낮게 평가한다는 겁니다. 이것에 의해서 모든 가치관이 형성돼. 그러니까 우리 세대는 이혼 안 하거든. 결혼이라는 사회적 약속은 높은 정신적 가치여서 꼭 지켜야 하니까 부부간에 몸의 요구가 잘 안 맞아도 참고 사는 겁니다. 통제하고. 89년에 교실에 앉아 있던 아이들은 우리랑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죠. 그러니까 70명이 교실에 앉아 있어도, 말로 소통할 수가 있었어. 근데 90년대 교육 문제의 원인을 추적해 보니까, 4~5년 사이에 아이들의 의식 구조가 우리랑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런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밸런스를 찾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머리 중심 교육은 사실상 전인적이지 않죠. 정서적 중요성, 세계와의 연결을 느끼는 공감능력도 없고, 무엇보다 자기 내면과의 대화조차 하지를 못해요. 외부의 목표, 그것도 사회가 정해준 목표를 군사작전처럼 개인도 수행하는 능력이 교육 내부에 깊이 박혀있었던 게 아닌가싶습니다. 이건 좌우,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공기처럼 사회를 떠도는 망떨리테(감성구조) 같은 게 아니었던가 싶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제가 고등학생 시절인데, 뒤돌아보면 표면화된 정치적 억압보다 근본적으로 정말 의식 깊숙한 곳에서 그런 변화가 요동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건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있어서도 무언가 큰 변화의 흐름이 시작되었던 거였을 거예요.

  맞습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나 보면, 이건 객관적으로 사회 변화를 반영한 거라고 볼 수가 있죠. 우리 세대가 정신과 이성을 높게 평가하고 ‘몸’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이런 생각의 구조는, 농경사회나 산업사회를 겪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지 인간의 몸을 통제하기 쉽고 노동자 부려먹기 쉽거든. 그런데 지금 아이들이 살아가는 시대는 지능사회잖아. 인간의 몸을 통제할 필요성이 적어졌어요. 그리고 소비사회잖아요. 이거는 그냥 객관적인 변화예요. 돌이킬 수도 없고. 그런데 이렇게 아이들의 의식구조가 변하면 학교 시스템하고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학교 교육이라는 건 훈육 교육이라고 그러지요. 산업화세대 의식구조를 그대로 제도화해 놓은 거죠. 근데 학교 교육 시스템이라든가 자녀 교육의 권한을 국가에 위임했어요. 이 위임된 교육권을 교장과 교사가 행사를 해요. 교육의 권한을 위임했다는 거는 교육 시스템에서 머리, 정신의 지위를 국가에게 준 거라고 봐야 하는 거죠. 국가, 교장, 교사가 머리에 해당해요. 학생은 몸이에요. 우리 산업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정신에서 늘 통제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 그러니까 이 정신에 의한 몸의 통제 시스템, 이게 학교거든. 그래서 우리 세대는 학교 교육에 상당히 잘 적응했죠. 우리 의식과 똑같으니까. 그런데 이게 반대 방향으로 바뀌면 아이와 학교 시스템이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이성은 모든 가치를 하나로 동일화하려 하지만 몸의 요구는 동일화할 수 없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죠. 그때부터 학교가 근본적인 전환을 했어야 되는데, 그게 전환이 되나. 안 되고 30년을 왔으니까.

  학교가 안 변하는 그 이유가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세요.

  강물의 깊이를 전혀 모르면서 건너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강물은 엄청 깊은 거예요. 지금 우리가 극복하자고 하는 거는 그간의 산업사회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서 50년 이상 전력을 기울여서 만들어낸 거예요. 근데 이것을 시스템 오작동이나 실수로 얕게 봐서는 새로운 계획을 할 수가 없죠. 제대로 깊게 봐야지 뭔가를 조금씩 정확하게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교육 개혁을 하겠다는 분들이 사회라는 구조를 얕잡아보는 면이 있어요. ‘정상’에서 일탈한 것이 지금 잘못된 사회라고 생각하는 건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런 모습이 된 역사적 구조적 필연이 있거든요.

  아주 중요한 말씀이네요. 모순이 있지만 사회를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의 한 모습으로 보고 이를 인정하는 데에서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씀인 거죠. 이 인정이 따르지 않으면, 현행 체제에 속한 모든 걸 나쁜 것, 악한 것으로 보는 부정이 일어나니, 이게 또 개혁의 ‘대상’과 ‘주체’의 분리가 일어나고 갈등이 일어나니, ‘배터 라이프(더 나은 삶)’를 위한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광범위한 연대와 협력이 일어나기가 힘들고 갈등 상황을 수습하다가 세월이 흘러가곤 하죠. 게다가 관찰을 해보면 진보적 목소리로 나타난 대안교육운동조차도 보수적 사회의 일부로 편입되기까지 하는데요.

  다원적 가치의 세계로 이동하는 감각구조의 변화
  다양성 시대에 대응하는 게 미래교육의 방향

  그렇습니다. 교육제도라는 지금에 와서는 변하기 어려운 게, 산업화시대의 필연의 산물이고, 거기서는 교사조차도 시스템의 일부로 기득권을 갖고 있기도 해요. 그러니까 변화하는 학교 교육 시스템에서 자기 기득권이 딱 부딪히면 그 조직도 생각이 전혀 달라지거든요. 참 어렵습니다. 대안학교도 한계가 뭐냐 하면, 그게 중산층의 내부적 운동으로만 전개된다는 거죠. 그들은 현행 교육 시스템이 무너져도 자신들이 가진 다른 것에 의존할 수 있는 이들이에요. 그런 ‘부분적 대안’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아이들의 의식 구조가 산업화시대의 학교 시스템과 안 맞는다는 게 핵심이예요. 특히 의무 교육에서는 지식 전수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목표는 정체성 형성이거든요. 옷과 옷을 입는 사람의 성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협화음을 갖게 되었는데, 서로가 부정하고 있는 형국이지요. 교육시장을 유지하고 거기거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교육시스템은 그러나 거의 변할 수가 없어요. 그 시스템에 가담하고 있는 모두가 기득권자거든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뭐 교육 시스템 전반을 어떻게 해봐야 되는데, 그게 참 고민이죠. 동화도 그래서 쓰게 된 거에요. 추적을 해보니 역사적으로 인간의 의식 구조에서 ‘몸’의 위상이 가장 높았던 때가 신화시대거든. 몸의 의식구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신화성을 띄고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판타지가 굉장히 핵심적인 코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래서 신화 공부를 했죠. 이게 그런 몸 의지가 높은 사유가 도대체 뭐야. 그런데 2000년에 복직해서 쭉 지켜보니까 애들이 진짜 감당이 안 되는데, 아이들이 몰래 보는 책을 보면 다 판타지더라고요. 근데 너무 엉터리인 거야. 그래서 내가 한 번 제대로 된 코드를 가지고 애들하고 얘기해보자. 그래서 『고양이 학교』를 쓴 거지.

  선생님의 문제의식은 이성 중심, 일원론적 사고 구조에서 몸, 정서, 다원적 가치의 세계로 이동하는 감각구조가 변화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어떤 교육 컬처로의 전환이라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겠네요. 한국에서는 교육 개혁하면 현실적으로는 입시 체제 변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행정’ 제도 개선보다도 더 강력한 감수성의 구조 변동을 보고 거기에 대응하는 게 미래교육의 방향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런 점에서 이번에 통과된 ‘국가교육위원회’가 상당한 의미가 있는 거라고 봐야 할까요. 아직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이 위원회는 행정부에 상대적으로 독립적 위상을 가지면서, 현행 교육 체제의 유지와 관리 역할에 집중된 교육부에 장기적 관점에서 정책 의견과 권고 등을 하는 기관으로 알고 있는데요. 핵심은 ‘장기적 관점’의 수립이라는 데에 있는 것 같아요. 김진경 선생님께서 국가교육회의 의장을 하시면서 가장 노력을 했던 결과물도 결과적으로는 국가교육위원회를 법령으로 설치하는 것으로 귀결된 게 아닌가요.

  맞아요. 국가교육위원회가 미래의 장기적 관점을 본다는 것은 당장의 사회적 교육 불만에 조금 초탈한 관점을 가진다는 겁니다. 바깥에서 볼 때는 새 정부가 들어서면 마치 이렇게 마차를 딱 세운 다음에 방향을 딱 잡아서 이쪽 방향으로 돌린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는 그게 안 됩니다. 사회라는 건 계속 맹렬하게 달리고 있는 거에요. 새 정부는 거기에 올라탄 마부예요. 사회라는 마차의 전체 역량 95프로는 계속 달리는 데 집중되어 있어요. 방향을 틀거나, 돌릴 수 있는 역량은 5프로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소위 개혁세력이 이해하지 못하면, 5% 밖에 안 되는 개혁 역량을 가지고 변화시키려고 기존 사회 구성원들과 체제에 대항하다고 정권 내내 사회 갈등 소모에 다 들어가고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을 날리게 돼요.

  말씀대로 199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 민주주의’라는 게 사실 아무것도 못하는 갈등민주주의가 되어 버렸죠. 변화를 추동하겠다고 선거를 치룰 때마다 정치의 장은 축제가 아니라 내전이 되어 버렸고요.

  그렇습니다. 교육운동을 하면서 80년대부터 지금까지를 지켜보면 보수와 진보의 대결만 있는 게 아니라, 시민사회 내부에서도 그렇고 사람들마다 너무나 복잡한 이해관계들이 걸려 있고, 이제는 하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도 아니어서 하나의 명분도 소용이 없어서 합의가 되지 않는 사회에 진입해 버렸습니다. 합의에 대한 훈련도 해보지 못했고요.

  그러다 보니 정권이 기대를 받고 시작해도 무척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고, 사회는 관성대로 달려가는 데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고,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하는 일을 반복하죠. 김상곤 장관도 초기에 첫 취임 때부터 막 대입 갖고 난리가 나 버리니까, 거기에 모든 역량이 다 들어갔어요. 갈등 관리 하다가 끝나요. 그래서 초기에 굉장히 정밀한 프로세스, 갈등이 일어날 것까지 다 들여다보면서 이걸 정밀하게 계획 세우고, 시민사회도 이렇게 거기에 동의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로 변화는 하기가 어려워요. 굉장히 어렵죠. 국가교육위원회는 이런 직접적 소모적 갈등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좀 더 장기적인 비전을 갖기를 원한 거죠.

  운영 방식에 특이점이 있어 보이던데요.

  가장 중요한 방식은 서구 모델을 벤치마킹하지 않고 우리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따져본다는 것이고, 교육 현장에 대한 구체적 이해가 없는 이론중심 전문가, 특히 대학의 교수들이 위원회의 방향을 좌지우지 않게 한다는 거죠. 진보정권, 보수정권 할 것 없이 우리 사회는 서구모델 좇아가기에 바쁜 지식수입상들, 대학교수 중심의 전문가주의가 국가제도를 장악하고 있어요. 이게 다 망친 거죠. 그래서, 야 저거 못 막으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제가 의장을 계속 하면서 그동안 있었던 국가기구와 완전히 다른 틀을 만들었어요. 그 법안 전체 보면 알아요.

  위원들 구성이 좀 다르더라고요.

  네. 당연직으로 들어가는 정부의 위원들 빼고는 청년도 있고, 학생도 있고, 학부모도 있어요. 그리고 상설 자문기구로 국민참여위원회를 두도록 했죠. 이런 구성을 법제도화 하는 일은 거의 혁명적인 변화예요. 교육의 실제 당사자들이지만 전문가주의가 장악한 국가제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죠. 제가 이걸 구성하느라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위원회 구성은 법안에서는 어쨌든 전문가 중심이 아니고, 이제 변화하는 현실을 자꾸 이렇게 국민적인 뜻으로 좀 들어올 수 있는 꼴을 만들었어요. 처음부터 방향을 그런 식으로 해줘야, 크게 보면 산업사회에 이런 학교 시스템은 굉장히 중앙 집권적으로, 학문 중심으로, 굉장히 폐쇄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데. 현실은 너무 빨리 변했고, 가장 앞선 지식과 경험을 가진 곳이 더 이상 학교일 수만은 없게 되었죠. 기업과 사회가 더 앞선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졌죠. 그리고 언제까지 서구 모델 따라가기를 할 겁니까? 이젠 우리 현실과 경험에서 더 많이 배워야죠. 그래서 이렇게 전문가하고 이렇게 이게 국민 현장 상호 소통하면서 이렇게 상호 발전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되는 거 아니냐 했죠. 그리고 여기는 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기구죠. 인권위원회와 유사하게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곳처럼 말입니다.

  국가교육위원회를 통해 실현하고 싶은 미래교육과 비전, 다양한 삶의 경험을 교육체계가 수용할 때 가능

  형식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런 형식을 갖췄다는 게 굉장히 진일보를 한 거라고 봅니다. 나누고 싶은 말씀은 많지만 저희 인터뷰가 이제 분량상 정리를 해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는데요. 국가교육위원회를 통해 실현하고 싶은 미래교육과 관련한 비전을 간단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산업사회 교육 체제는 동일화의 논리고, 그래서 차별의 체계를 만들어내고, 기득권 인시를 자꾸 만들어내죠. 진정한 의미의 다양성. 이걸 추구할 수 있는 그런 교육을. 그게 기본적인 방향이죠.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곳처럼 말입니다.

  정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교육모델에 관한 디자인과 생각을 해오다가 보니, 다양성을 담으려면 현행 학교시스템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사회를 학교 내부로 끌어옴으로써 학교를 사회와 연결시키고 개방시켜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다양성은 다양한 삶의 경험을 교육체계가 수용할 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도 전통적 교육체계 내부에서만 변화를 시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고요. 또 학교와 교육청 자체의 역량만으로는 다양성을 확대할 수가 없어요. 교육과정의 일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할당제를 만들고, 지역사회가 연계되고, 그렇게 평생교육체제가 자연스럽게 확립되어 가는 방향을 생각해 봅니다. 교육은 이제 사회 전체의 역량이 연결되고 협력해야 하는 장이거든요. 학생의 학력경쟁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교육력 경쟁이 되게 하는 것이 미래교육의 방향이 되어야 할 거 같아요.

  제가 ‘미지행’이라는 학교를 디자인하면서 학교 디자인은 이제 ‘러닝 소사이어티’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얘기하곤 했는데요. 비슷한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기왕 일생을 여러 방식을 통해 혼신의 노력을 해 오신 일들이 작은 결실이라도 맺기를 바라며, 선생님과의 대화가 다른 방식으로도 추후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쿨투라》 2021년 9월호(통권 8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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