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한국 영화가 놓인 어떤 자리 그리고 장재현의 ‘사바하’가 도달해낸 것
[영화 월평] 한국 영화가 놓인 어떤 자리 그리고 장재현의 ‘사바하’가 도달해낸 것
  • 김시균(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 승인 2019.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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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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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년 째 영화 기자 일을 하고 있지만, 신작들을 일일이 챙겨보는 열의는 예전만하지 못한 것 같다. 우선은 나태와 게으름의 병이 도져서일 것이고, 분수에 맞지 않는 클래식 기자 일을 수개월 째 병행하게 된 사정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궁색한 변명 하나를 더 보태면 근래 개봉하는 일련의 한국 영화들, 특히나 상업 영화들에 대한 환멸도 적잖은 요인이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지금도 여전히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공산품 영화들은 양산되고 있고, 사유를 촉발하기보단 중단시키는 두 시간 내외 인스턴트·놀이공원성 신작들이 쇄도 중이다. 

  물론 우리가 영화관에 가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영화라는 매체로 인간과 세계를 사유하는 행위 못잖게 달콤한 환락의 시간에 젖어드는 일 역시 세파의 피로를 달래어 준다는 점에서 얼마간 필요하다. 사는 게 무척이나 골치 아픈 일인데 극장에서까지 머리 아프긴 싫지 않은가. 그 점에서 영화 <극한 직업>(2019·감독 이병헌)의 노선은 명확했다. 누적 관객 1618만명(3월 11일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넘긴이 오락물을 보고 나온 관객은 '한바탕 웃고 별 생각없이 극장 밖을 나올 수 있어 좋았다'며 대체로 흡족해 했다. 작가성과 대중성 사이 어정쩡하게 놓여 있기보단 후자의 노선을 확실히 취한 결과다.

  하지만 관객이 이런 영화만을 기다리는 건 아니다. 박찬욱·봉준호·류승완 등의 감독들처럼 작가성과 대중성 양자를 선취해낸 영화 역시 열망하고 있다. 독해가 필요 없는 기표 덩어리인 <극한직업>(극의 소재인 수원왕갈비 통닭은 이 영화가 영양가는 없어도 맛은 보장하는 요리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기표다)과 달리 서브텍스트들을 읽고 해석하며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지적이면서도 재미까지 보장된 한상 차림을 갈급한다. 이것은 관객으로서는 본능적인 욕망이다. 이 땅의 숱한 감독들 또한 자연히이 같은 욕망에 부응하며 인정받길 바란다.

  요 몇 개월 새 대중에게 외면 받은 몇몇 대중영화는 그 욕망에 충실했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한 경우다. 과시적 이미지를 전시했지만 각본이 허술해 속빈 강정이 된 <마약왕>(2018), 밝고 경쾌한 전반부와 어둡고 비극적인 중후반부를 유기적으로 봉합해내지 못한 <스윙키즈>(2018·이 영화 각본을 미리 본 어느 흥행 감독으로부터 직접 듣길, 강형철 감독에게 중반부 이후 전개의 단절감을 지적했으나 강 감독 스스로 애초 각본대로 갈 것을 강하게 고수했다고 한다), 산만한 캐릭터 구성과 <베테랑>(2015)을 의식한 듯한 선악 구도를 이도 저도 아니게 변주하다 좌초한 <뺑반>(2019) 등이 그렇다.

  한 중견 평자는 이 같은 대중영화 실패 사례를 분석하면서, 한국 감독들이 “완전한 작가로 평가받고싶어 하는 마음"”으로 “각본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젖은 현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 보니 “보통 사람들의 영화로부터 관심이 멀어져, 무겁고 진지하면서 빛깔도 좋은 영화를 머릿속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각본은 꼭 대자본을 요구” 하는 법이기에 영화가 완성되는 시간은 지연된다. “30대 감독이 영화 두어편 찍으면 40대가 되고, 다시 두어편찍다 한두편 제작이 뒤집히면 금방 50대가 된다. 당신들은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미켈란젤로가 아니다”(‘<극한직업>의 엄청난 흥행, <뺑반> <기묘한 가족>이 택한 다른 길’, 씨네21 No.1195, 이용철 영화평론가 글)는 뼈아픈 지적은 여러모로 곱씹을 대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문한 필자는 각본까지 쓰겠다는 이 나라 감독들의 고투를 지지하고 싶다. 생태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각본을 쓰고 연출도 하며 온전한 '나'의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이들의 은밀한 야심을 응원한다. 숱한 시행착오가 빚어질지언정 그 눈물겨운 노력 끝에 피어날 한 송이 꽃을 갈망해서다.

  그 점에서 <검은 사제들>(2015)에 이은 장재현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사바하>(2019)는 드물게도 반가운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그만의 작가적 욕망이 대중의 수요와도 얼마간 교통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누적 관객 234만명(3월 11일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모은 <사바하>는 흥행 면에서 540만 명이 본 <검은 사제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부가 판권 수익까지 더하면 손익분기점은 일찍이 넘겼으므로, 그런대로 선전한 편이다.

  <검은 사제들>은 소수 매니아층의 전유물이던 구마驅魔 소재를 대중화했다고 호평받았다. 하지만 그럴 듯한 오락물 수준에선 더 나아가지 못했다. 신학생 최부제(강동원)와 김신부(김윤석)가 악령 씐 소녀를 구한다는 얼개는 <엑소시스트>(1975)와 그 아류작들의 계보를 잇는 것이고, 서사의 종착지를 향해 급전진한다는 느낌은 내내 떨치기 어렵다. 몇몇 쇼트가 머금은 강렬한 기운 만큼은 이따금 주목할 만했으나, 거기까지였다.

  후에 <검은 사제들> 관계자에게서 이 영화 후일담을 개인적으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요지는 장 감독이 이 영화 완성본에 대해 상당히 불만족했다는 얘기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편집권이 감독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장 감독이 찍어놓은 무수한 촬영본을 제작사(집)가 대부분 편집한지라 연출자 특유의 스타일과 리듬이 고루 녹아들지 못했다. 이 영화에서 장 감독 나름의 인장印章을 감지하기 어려웠다면 아마도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그로선 온전한 '나의 첫 영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사바하>에 대해 소략하게나마 짚어볼 차례다. 앞선 맥락들을 고려한다면 <사바하>는 진정한 장 감독의 첫 장편이라 해도 무방하다. 앞선 관계자 말을 덧붙일 경우, 그가 오롯이 각본에서 연출, 편집권 일체를 전임한 영화다(이 영화 제작사는 류승완·강혜정 부부가 대표로 있는 외유내강이다). 자기가원하는 대로 쓰고, 원하는 대로 찍고, 원하는 대로 편집한 결과 장 감독만의 연출 스타일과 메시지, 리듬 등이 그대로 담겼다.

  <사바하>는 오컬트 소재를 맥거핀으로 삼고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를 옷으로 두른 애도의 영화다. 오컬트를 맥거핀으로 삼았다는 건, 오프닝 신에서부터 불길한 정념을 조성해낸 ‘그것’(이재인)의 존재와 연관돼 있다. 한 사람 ‘그녀’였을 뿐인 ‘그것’은비非인간처럼 취급당한다.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그는 동생 금화(이재인)와 달리 저택 창고에 유폐돼 있다. 불길한 모습으로 태어난 탓이다. 말하자면 그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호모 사케르다. 보통의 인간과 달리 생긴 그를 보는 보통 인간들 시선은 그러므로 배제되고 추방된 자를 바라보는 세상의 왜곡된 시선과 다를 바 없다. 그의 근처로 다가오는 이들에게서 뱀과 같은 어둠의 형상이 나타나는건 이 같은 편견이 빚은 착시일지 모른다(그 추방된 존재가 종래엔 파국을 막는 구원자임이 드러나는 순간의 역설은 얼마나 짙은 페이소스를 불어넣는가).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외투는 종교문제 연구소 박목사(이정재)와 사천왕 중 한 명인 나한(박정민)에게서 비롯한다. 두 인물은 저마다의 이유로 미스터리의 진원지를 파헤치고 있다. 한 쪽은 사슴 동산이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의 비밀을 들추어 돈을 벌려 하고, 한 쪽은 스승 김제석의 명에 따라 ‘그것’을 잡아죽이려 한다. 하지만 저마다의 길을 노정하면서 마침내 마주하는 건, 무고하게 죽은 1999년생 소녀들의 죽음들이다. 폼 나게 BMW를 타고 다니던 자본주의적 인물 박 목사가 어떻게든 이 사태를 막으려들고, 스승의 말을 따르던 나한이 결국 자신이 죄없는 소녀들을 죽였음을 깨닫고 자멸하는 건 그래서다. 그중 부친을 이미 살해한 바 있는 나한은 결국 스승(유지태·정동환)이라는 두 번째 부친마저 불태워 죽이며 몰락한다. 나한은 오대수(<올드보이>(2003))에 이은 21세기 오이디푸스다.

  이 한 편의 비극적 영화가 애도의 영화이기도 한 건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조심스레 응시하는 텍스트로도 읽힐 수 있어서다. 무고한 소녀들이 죽어가고있음에도 이를 외면하려 한 황반장(정재영) 등 경찰집단의 안일함은 구조에 지지부진하던 해경 등 정부기관들의 무능을 은연중 되새기게 한다. 불멸을 위해 나한과 사슴동산을 등에 업고 소녀들을 살해해온 김제석 집단은 유병언과 사이비종교세력 구원파를 직접적으로 암시한다(5년 전 사회부 기자로서 수개월 세월호 참사 현장에 가 있었던 필자로서는 박목사의 전화 호소로 경찰서 벽면에 나붙은 실종 소녀들의 응시하는 황반장(정진영)의 시점 쇼트가 매우 참혹했다. 실종 사진이 영정 사진이 돼버린 소녀들에게서 학생증 사진이 영정 사진이 돼버린 단원고학생들의 얼굴이 오버랩된 것이다.)

  요컨대 <검은 사제들>이 장르 오락물로서 벽을 넘지 못했다면, <사바하>는 그 이상 나아간 성숙한 영화다. 잊혀져가는 세상의 고통을 가슴 깊이 껴안음으로써 그 아픔을 다시금 함께 앓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강렬한 기운이 깃든 장 감독의 쇼트들이 적재적소 잇대어진 결과 <사바하>는 올 상반기 한국대중영화의 값진 성취 중 하나로 부상한다. 사천왕이 새겨진 벽면의 탱화를 회전하며 앙각으로 훑던 무시무시한 쇼트들부터 나한의 악몽을 담아낸 어둠의 쇼트들, 나한과 ‘그것’이 마침내 대면하는 극 후반리버스-역리버스 쇼트 등은 장재현의 세 번째 영화를 더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김시균
매일경제 문화부에서 영화와 클래식 기사를 쓰고 있다. 영화가 우리 삶을 구원하리라 굳게 믿는다.

 

 

* 《쿨투라》 2019년 4월호(통권 5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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