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뜻밖의 봄눈, 『줄리아나 도쿄』
[문학 월평] 뜻밖의 봄눈, 『줄리아나 도쿄』
  • 조대한(문학평론가)
  • 승인 2019.04.0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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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 혹은 계절로 말문을 여는 것은 식상하지만 늘 그렇듯 안전한 방식인 듯싶다. 봄. 외자로 된 음절처럼 너무 짧게 사라져버리는 시간이라 차라리 간절기라는 말이 어울리는 요즈음은, 보내주지 않으려는 계절과 도망가려는 계절 사이의 알력 다툼이 유독 심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가끔 꽃봉오리 위로 눈꽃이 내리는 삼사월의 봄눈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줄리아나도쿄』라는 소설은 표지 디자인에서 드러나듯 새하얀 눈으로 가득 찬 작품이다. 다만 홋카이도의 오타루 외에, 소설의 주요 무대가 되는 오키나와, 부산, 도쿄 등은 실제로 눈 내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 지역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뜻밖의 눈은 더욱 반갑고 특별하게 다가온다. 봄눈처럼 마주친 이 소설이 그랬고, 소설 속 ‘유키노’라는 인물이 그러했다.

  점점의 문화적 표상들과 많은 인물들이 눈송이처럼 교차하는 이 작품에 대해 여러 가지 것들을 언급할 수 있겠으나, 기왕 서두를 연 것처럼 뜻밖이라는 단어의 이미지를 조금 더 가져가 보자. 유키노라는 인물은 이름에서 유추 가능하듯 ‘눈의 요정’과도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실제 눈의 고장이라 불릴 만한 오타루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유키노는 타인에게도 눈처럼 반가이 다가가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 뜻밖의 접근은 누군가에게는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소설 속 ‘한수’와의 만남이 그렇다. 

  인력거를 끄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유키노는 비 내리는 운하 옆에서 우산도 없이 허겁지겁 아이스크림을 먹는 한수를 보곤, 그를 인력거에 태워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유키노의 제안에 답한 한수의 첫 대답은 이렇다. “절 오해하진 마세요.” 이는 여러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발언이겠지만, 이 작품에서 오해라는 단어는 꽤나 폭력적으로 사용된다. 발신자의 진의 혹은 선의를 수신자가 그릇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그 단어는 모든 상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의 탓으로 돌린다. 그래서 한수는 오해하는 사람들로부터 본인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칼을 들고 다니고, 자신의 말을 오해하는 유키노를 거듭 폭행한다.

  그러나 봄눈처럼 다가온 유키노를 오해가 아닌 ‘호의’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특히 ‘한주’가 그렇다. 유키노는 한주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넨다. “한주 씨, 한주 씨는 눈의 요정을 알아요?” 아마도 이는 자신의 이름과 눈이 많이 내리는 오타루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을 활용하여, 유키노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건네는 인사치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인사가 우연하게도 한주의 마음의 벽을 허물게 되었고, 둘은 서로의 필요를 나누는 소중한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돌이켜보면 유키노는 탄생하는 순간부터 뜻밖의 선물과 같은 존재였다. 유키노를 만나게 될 무렵 그의 어머니는 도쿄의 한 클럽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며 살고 있었다. 클럽의 음악이 아닌 헤드폰의 클래식을 들으며 일을 했고, 손님들이 실수로 흘리고 간가방이나 화장품들을 동료들과 경쟁하며 내다 팔았다. 어느 날 유키노의 어머니는 화장실 문 안쪽에서 버려진 가방과 옷 대신에 아기를 주웠고, 그렇게 유키노가 와주었던 날 그녀는 처음으로 ‘줄리아나 도쿄’ 클럽의 단상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녀는 말한다. “그날이 바로 내가 주인공이 된 날이랍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줄리아나 도쿄는 90년대 초 일본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린 클럽이었다. 이제는 버블 경제 황혼기의 상징이 되어버린 장소이지만, 당시 그곳은 높은 단상 위로 올라선 여성들이 마음껏 존재감을 뽐내며 춤을 출 수 있었던 흔치 않은 공간이었다고 한다. 하나의 ‘단壇’ 위로 올라서는 일, 평소 엄두를 내지 못하던 어떤 문턱을 넘어서는 일은 개인의 용기와 노력의 산물이겠지만, 때로 그 용기는 누군가로부터 우연히 건네진 호의 또는 만남 덕분에 생겨나기도 하는 듯싶다.

  어머니에게 그러했듯 한주에게도 유키노는 용기였다. 도쿄로 건너오기 전 한주는 한국에서 문학을 전공하던 대학원생이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폭행과 자살 시도의 부작용으로 인해 모국어를 담당하던 뇌의 일부를 잃어버렸고, 자신이 공부해왔던 언어를 상실하였다. 랑시에르는 인간의 말과 동물의 목소리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빌려와 동물들의 목소리는 단순히 쾌감과 고통을 표시indique할 뿐이지만, 인간의 말은 공동체 속에 무언가를 명시manifeste한다고 이야기했다. 이 관점을 빌린다면, 한주의 목소리는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인간의 말이라기보다는 동물의 신음에 불과했던 것 같다. 더 이상 공부를 하지 말라며 늘 “부정적인 어휘”를 사용하는 그를 향해, 당시의 한주는 막상 "아니," 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트라우마에 갇혀 모국어를 잃어버린 한주가 다시 ‘말’을 하기로 용기를 낸 것은 유키노 때문이었다. 한수를 살해한 후 자수한 유키노를 위해, 한주는 경찰에 출두하여 증언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회의도 들지만, 선물처럼 다가와 주었던 유키노를 위해 한주는 용기를 내어 어떤 문턱을 넘어서려 한다.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참고인 증언을 준비하던 한주는 그에 도움이 될 학술대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얻고, 그곳에 참석한다. 학술적 공동체의 언어는 과거 대학원생이었던 그녀가 모국어와 함께 잃어버렸던 말이었다. 도쿄에 흔치 않은 눈이 내리던 날, 학회로 찾아간 그녀는 질문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조용히 손을 든다. 소속과 이름을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한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학회장은 술렁인다. 당신이 어떤 공동체에 기입되어 있는지를 묻는 집요한 질문에 한주는 자신의 이름은 한주, 소속은 없다고 대답한다. 줄리아나 도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던 연구자는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한주라는 이름의 그녀가 단상 위에 올라서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줄리아나 도쿄의 단상 위에 섰던 이들은 모두 어디로갔을까. 소설이 밝히고 있듯 그 단상은 남성들의 폭력적 시선과 사회의 억압적 검열 아래 해체된 것이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것은 유키노처럼 뜻밖의 선물로 다가온 누군가의 호의를 용기로 전환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망설임 때문에 다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렇게 오해로 얼룩진 감상은 이 소설을 거의 말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유키노와 어머니, 한수와 한주 외에도 이상과 윤이상, 정추와 김추, 소금사탕과 김밥, 오키나와와 도쿄를 넘나들며 그리는 아름다운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소설이다. 역시 식상하게 계절로 마무리해야겠다.다시 반갑고 따스한 봄이다. 더운 여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난 겨울을 그리워하겠지만, 이 계절이 지나가기 전에 녹아 흘려보내기엔 아까운 봄눈 같은 소설 한 편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조대한
문학평론가. 2018년 《현대문학》 평론 부문 등단.

 

* 《쿨투라》 2019년 4월호(통권 5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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