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새 길, 새 문명에 대한 김지하 시인의 질문: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
[신간 리뷰] 새 길, 새 문명에 대한 김지하 시인의 질문: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
  • 손정순(시인, 본지 편집인)
  • 승인 2018.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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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김지하 시인이 올해로 문단활동 50년을 맞았다. 그는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매체에 발표하지않은 미발표 신작 시집 『흰 그늘』과 신작 산문집 『우주생명학』(작가)을 출간하였다.

  김지하의 시는 우리 현대시사에 현존하는 독특한 전범에 해당한다. 문학적이고 미학적인 다양한 층위들로 혼효(混淆)되어 있는 그의 사상 또한 그를 단순히 시인으로만 평가할 수 없게 만든다. 이는 지난한 시대사가 김지하의 문학성에 강요해온 결과이거나, 혹은 환난으로 얼룩진 현대사의 상처가 우리시에 새긴 특이한 혈흔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김지하는 데뷔 이래 지배 세력에 대한 직·간접적인 저항과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도 생명운동 등으로 폭넓은 생각을 펼치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문학의 역정에 앞서가는 이러한 실천력이 김지하를 아직도 우리에게 시인이기보다는 사상가이면서도 사회운동가이자 혁명가로 느껴지게 만들지만 이점이야말로 한편으로는 김지하 시의 다면적인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아야 할 요인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에 출간한 김지하 시인의 새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은 그의 시세계와 사상을 집약, 총정리 하는 소중한 저서임에 틀림 없다.

 

  김지하의 신작 시집 『흰 그늘』

  우리 현대문학은 김지하 시인 이래 그의 성취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그의 민족민중문학론과 문화론의 영향과 파장이 그 당대는 물론 지금에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하 서정시에서 의미화 되는 그늘이 『황토』의 비극적 역사의식과 저항의지로부터 싹트고 있었다면, 『애린』에 와서는 ‘그늘’의 심화와 생명사상이 발화하는 변모를 이룬다. 그리고 『중심의 괴로움』에 오면 ‘그늘’의 존재론적 인식이 비로소 윤곽을 드러내게 되고 『화개』 『시김새』에 이르면 ‘그늘’의 형이상학적 승화와 함께 그것을 뛰어넘은 ‘흰 그늘’의 미학을 제시한다. 이는 우리의 미학으로 서구 중심의 미학을 뛰어넘겠다는, 이 시인의 야심만만한 시적 도전이라 여겨진다. 이처럼 김지하의 시세계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김지하의 삶과 문학 전반에 바탕하고 있는 ‘그늘’의 상징성이 보여주는 변증법적 모순의 발전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번에 출간한 신작 시집 『흰 그늘』 또한 ‘그늘’이 승화된 그 연장선상으로 읽을 수 있다.

  김지하의 시는 시인의 개인사를 투명하고 정직하게 투시하고 있다. ‘길은 내 운명이다’라고 말하는 그의 서정시 속에는 다양한 영향력을 종합한 설득력 있고 명증한, 논증된 진리가 엿보이지 않는다.

내가 앉아 있는 나직한 고갯길은 빛과 어둠의 중간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불빛 그 끝에는 거대한 밤
바다가 가로놓여 있고 어두운 일로(一路) 저 너머는
사람이 북적대는 반도의 내륙, 또 그 너머는 아득한 대륙이다.
…(중략)…
빛과 어둠의 양극이 엇섞이는 한 어린 얼굴이 떠오른다.
문화와 야만, 야수와 신성(神性)의 두 얼굴을 가진 원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하늘에 별이 가득한 밤의 검은 어둠 사이로 난 외줄기 흰 길, 나의 인생은 이 이미지, 이 흰 길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길은 내 운명이다.
- 김지하, 『모로 누운 돌부처』 중에서

  김지하는 내심의 흐름 속에 자기의 운명을 맡긴다. 서정시의 틀 안에 비치는 김지하의 그림자는 언제나 흔들리며 절대적으로 고독하다. 그림자는 무의식의 이미지이다. 자아는 자신이 어떤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자아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그늘에 속하는 인격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의식으로서는 결코 대면할 수 없는 성격, 곧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어떤 모습에 해당한다.

  총 4부로 나뉘어져 71편을 수록한 이번 시집은 김지하에게도 억눌린 무의식의 세계가 그의 서정시 속에 흰 그늘을 드리우며 불타오르고 있다.

아내가 마고麻姑가 되어서/단군檀君이 되어서/지배자가 되어서//
새 세상이다/아/흰 그늘이다/이 집 이름이 다물多勿이었다.//아아/내 방 이름이 불함不咸이었다.//
새벽에/문득/아내가 밖에서 소리친다.//
흥업興業은 울금/울금은 강황/강황은 복승/복승은 개벽//깨어보니/없다
- 「나의 마고麻姑」 부분

  무의식(잠) 속에서 아내가 마고가, 단군이, 지배자가 되어 나타난다. 빛과 어둠이 어우러지는 이중성의 그늘 속에 새롭게 생성하는 눈부신 흰 빛, 즉 아내(여성)에게서 흰 그늘이, 감지되는 것이다. 다름 아닌 사람의 초월성만이 오히려 역사의 밑바닥에서, 배후에서, 또는 그 틈에서 역사를 조절하고 그것을 추동, 견인, 비판, 수정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스스로 신령한 역사로 살아 생동하게 한다. 민중적 삶의 우주적인 내면성이야말로 무궁무궁 초월적으로 역사를 생성하도록 실현하는 주인이요, 주동력인 것이다. 

  김지하는 이미 스무 살에 시 속에 ‘흰 우주에로 뻗어나가는 무궁무궁한 운명의 길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땅끝’에서 반환점을 돌고, 용당리에서 그 비극성을 예감한다. 그리하여 황톳길의 죽임 앞에서 도저한 패배 속으로의 참여를 긍정한 ‘그늘’ 즉, 율려(律呂)적인 운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이제 등단 50년을 맞는 김지하 시인은 원주 대안리 흥업 다물多勿집에서 아내를 모시며, 눈부신 흰 생명의 길, 신령한 율려의 길, ‘그늘’의 길을 흔들리며 걸어가고 있다.

  마지막 시집이다./교정하지 않는다./마지막 다섯줄 ‘아내에게 모심’/한편으로 끝이다./이제 내겐 어릴 적 한恨/‘그림’과 산 밖에 없다./끝.
- 「자서」

 

  김지하의 신작 산문집 『우주생명학』

  김지하는 젊은 날부터 근대적 삶의 억압성과 부정성을 포착, 맹목적인 근대추종이나 낭만적인 근대부정을 넘어서려고 애썼다. 국적 없는 문화적 혼란과갈등 속에서 민족·민중문학을 향한 그의 지극한 관심은 시대에 응전해 온 선구적인 삶의 모습이라 할수 있다. 곧 근대성을 우리 역사의 공동체적 경험과 자산 안으로 통일할 것을 의식적으로 모색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왔다.

  그의 미학사상은 깊고 넓은 사상적 층위를 지니고 있어서 그 전모를 파악, 요약해 내기가 수월하지 않다. 이번에 펴낸 김지하 시인의 산문집 『우주생명학』은 그의 철학과 사상을 축약하고 확장하는 면모를 볼 수 있다.

  총 4부로 나뉘어진 이번 산문집 『우주생명학』의 1부 <궁궁弓弓 유리 화엄 대개벽>은 ‘궁궁 유리 화엄대개벽’과 ‘시김새’를, 2부 <우주생명학 1>은 ‘서다림逝多林’과 ‘<서다림逝多林>으로부터’를 3부 <우주생명학 2>는 ‘풍류역風流易’을, 4부 <우주 생명학 3>은 ‘화엄경과 통일의 길’을 다루고 있다.

  그는 병신丙申, 2016년 12월 31일 아침 원주, 대안리 흥업 다물多勿집에서 원고를 끝내며 쓴 자서에서 “나는 최근 누군가를 나도 모르게 더듬어 찾고 있었다./누굴까?/잃어버린 선생 수운水雲이시다./그런데 겨울 어느 날 선생님이 오셨다./그래서 이 책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김인환(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은 일찍이 김지하의 담시를 “그 자체가 구체적인 사회관계를 생생하게 구축하는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평가했다. 그는 “시인의 내면과 외면을 구별하여 시인이 자기바깥에서 일어나는 사회운동에 대해 말한다는 식의 이분법으로는 누구도 김지하의 담시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이는 “그의 담시에는 김지하의 자리보다 김지하 아닌 다른 주체들의 자리가 더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김지하 시의 형식 및 미적 가치는 물론 그 시의 사상과 미래지향적 성격과 가능성에 대한 좀더 면밀한 탐구가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논의는 그 동안가치론적 당위성의 강조에 비해 그 실천론적인 표현형식 원리를 온전히 정립하지 못했던 민족 민중문학의 바람직한 방향성에 대한 규명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동학사상을 거점으로 한 전통적인 민족민중사상의 광맥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미학사상과 생명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가 미미하다. ‘생명사상’으로 대표되는 그의 문학적이고 미학적인 시학의 근거는 본받을 만한 동서양의 귀중한 정신적자양을 흡수하면서도, 언제나 그 중심을 우리의 사유체계와 삶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더욱 의미가 있다.

  김지하 시인은 이번 산문집에서 미국 노암 촘스키가 인정했듯이 한국은 지난 60여 년 동안에 어렵게도 그 엄혹한 분단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였으며, “이제 새로운 국가목표가 제시되고, 근본적인 요구인 ‘남녀·음양·빈부’ 등의 본질적 해방과 평등이 성취되는 <통일>과 <동서사상 화합>과 세계 인류의 새 길을 이끌어 갈 ‘참 메시지 민족의 길’을 창조해야 하고 우주와 생명의 큰 변화 속에서 참다운 <선후천융합개벽先後天融合開闢>을 이루어야만 한다.”라고 밝힌다.

  그는 “그것이 <궁궁弓弓 유리 화엄 대개벽>”이며, <궁궁弓弓>은 동학의 진정한 세계상이요, <유리>는 정역正易의 앞으로 올 춘분春分·추분秋分 중심의 4천년 유리세계와 <세계 여권운동>의 상징적 목표인 <유리천정>의 그 ‘유리’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 나라의 전통적 비의秘義는 ‘흰 그늘’이고 <고통 속에서 피어오르는 빛>”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다물多物>이고 그래서 <불함不咸>”인 것이다.

  김지하 시인 스스로가 2년여의 시간을 통과하며 그의 시학과 미학사상을 피력하며 펴낸 이번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은 한 개인의 문학사적 위치와 작품의 성과를 묻기에 앞서, 온갖 모순과 혼돈으로 점철된 21세기 속에서 우리의 동질성과 주체성을 어떻게 세워갈 것인가 하는 새 길, 새 문명에 대한 질문과도 맞닿아 있기에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라 믿는다.

 


 

손정순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동해와 만나는 여섯 번째 길』, 저서로 『흰 그늘의 미학 김지하 서정시』 『목월 시의 현대성』 등이 있음.

 

* 《쿨투라》 2018년 9월호(통권 5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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