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선 시인의 시로 만난 별들] 배우 송강호
[장재선 시인의 시로 만난 별들] 배우 송강호
  • 장재선
  • 승인 2019.06.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써브라임아티스트에이전시
ⓒ써브라임아티스트에이전시

넘버 3서 넘버 1으로

장재선

그를 만날 때마다
뒷맛이 개운했다.
그는 안성기 선배와 다르게
영화 속에서 성기를 드러낼 정도로
연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자신이 뭐라고
드러내는 법은 없었다.
넘버 3로 커서
넘버 1 그룹에 가서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걸
본 적은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에
한때 시꺼먼 먹칠을 했다는 불한당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아닐 불不, 땀 한 汗, 무리 당 黨,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가
땀을 흘려 연기의 땅을 일군 이에게
딱지를 붙였던 일은
얼마나 쌈마이스러운가.
그렇거나 저렇거나
그는 그저 땀 흘리는 데
제 몸짓을 바치니,
그걸 보는 눈이
여전히 개운하다.

 

  영화 <박쥐> 개봉 때 송강호를 만났다. 그가 <쉬리>를 통해 톱 클래스의 배우로 발돋움한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여느 배우라면 건방짐이 하늘을 찌를 만했다. 그러나 그는 겸손과 진중이 오래가는 무기라는 걸 아는 배우였다. 모든 질문에 성의껏 답했고, 말미에는 인상적인 답을 내놨다.

  “영화 불황기일수록 대중과 안전하게 만나려고 하기보다는 항상 도전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진정한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를 지닌 이가 관객 동원에 있어서 주연급 배우들 중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영화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여느 스타들처럼 그에 대해서도 술좌석에서의 기벽 등 이런저런 뒷이야기들이 있다. 그런 일을 가까이서 지켜 본 이들은 그가 카메라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연기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가 대중문화 판에 있는 이로서 대중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경남 김해 태생인 송강호는 중학교 시절부터 배우의 꿈을 키웠다고한다. 연기 공부를 위해 부산 경성대 방송연예과에 들어갔고, 군 복무 이후 부산 지역 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연우무대 지방공연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돼 이듬해 연우무대에 입단했다. 이후 <동승>, <비언소> 등의 연극에서 조연으로 출연했으나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1996년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판으로 들어왔다. 1997년에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고, 같은 해 송능한 감독의 <넘버 3>에서 조필 역으로 나와 특유의 말 더듬는 어투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98년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에서 아들 영민 역으로 출연해 코믹한 연기를 선보이며 평단의 인정을 받게 됐다.

  20세기 말에 그는 연기력에 대한 찬사와 함께 흥행 배우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99년작 <쉬리>, 2000년작 <공동경비구역 JSA>에 출연했는데, 각각 관객 582만 명과 583만 명을 동원하며 당시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나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사이에 나왔던 영화 <반칙왕>을 송강호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 극중 대호는 저조한 실적 탓에 상사에게 걸핏하면 헤드락을 당하는 소심한 은행원이지만 레슬링을 하는 링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 고사력을 다해 뒤집기를 하려고 애쓰는 인물. 송강호는 익살과 페이소스가 함께 우러나는 연기로 대호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웃으면 슬픈 시대의 얼굴’이라는, 그의 대표적 이미지가 이때 만들어졌다.

  그는 어느 새 믿고 보는 배우가 됐고, 출연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작품성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살인의 추억> (2003),<괴물>(2006),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의형제>(2010), <설국열차>(2013), <관상>(2013), <변호인>(2013), <사도>(2014), <밀정>(2016) 등이 그의 필모그래피에 들어갔다.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인물인 그가 박근혜 정부에서 이른바 ‘블랙리스트’ 앞부분에 있었다고 해서 논란이 됐다. <변호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역을 했던 것 때문에 박 정부 핵심들이 그를 기피 인물로 찍었고, 영화 투자사들이 그의 기용을 한동안 꺼렸다는 것이다. 

  블랙리스트 논란은 박 정부 몰락의 한 사유였다. 문화예술인들 성향 명단을 만들어 특정인에 대한 지원을 배제했다는 혐의로 관련 공직자들이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됐다. 정치 권력이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밀실에서 자신의 잣대로 문화예술인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에 그런 분위기만으로도 문화예술인들은 자기검열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문예는 정치권력의 하위에 자리하며 저급한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송강호는 2017년 여름에 개봉한 영화 <택시 운전사>를 통해 관객 1천 만 명 돌파 기록을 또 세웠다. <괴물>, <변호인>에 이어 세 번째였다. <택시 운전사>는 송강호에 의한, 송강호를 위한, 송강호의 영화라고 할 만큼 그의 연기력이 빛났다. 그런데 그는 이 영화 출연을 선택할 때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배우로서 편향된 이미지를 가지게 될까 봐 자기검열을 하게 되더라.”고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 대해 “이 작품에 흐르는 정신은 민주화나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라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송강호는 2018년 작 <마약왕>으로 다면적 인물을 연기하며 폭발적 에너지를 과시함으로써 감탄을 자아냈다. 2019년엔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 <기생충>의 주연으로 명실공히 한국 대표 배우임을 입증했다. 앞으로도 송강호가 출연한 영화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갈 수 있지만, 어떤 진영도 그를 정치 싸움 전선에 세우지는 말았으면 한다. 그게 우리가 함께 호흡해 온 귀한 배우를 아끼는 길이다.

 

 

* 《쿨투라》 2019년 6월호(통권 60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