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나요? : 드라마의 다양한 얼굴 '끝사랑'
[드라마 월평]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나요? : 드라마의 다양한 얼굴 '끝사랑'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1.10.01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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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자만추’ 지지자였다.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소개팅이나 맞선에서 이상형이 어떤 남자예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손끝이 오그라들었다. 상투적인 건 둘째치고 왜 저런 걸 묻는 걸까. 그 질문을 하는 상대까지 변변찮고 볼품없어 보였다. 그런데 드라마 〈너는 나의 봄〉을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상형을 묻는 건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것이고, 이 질문의 끝엔 내가 당신을, 그러니까 나의 맞은편에 앉은 또 하나의 ‘나’를 사랑할 수 있냐는 물음이 남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나요. 

  영혼 없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던 지난날들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는 만큼 보인다. 미처 내가 눈치채지 못한 남자의 마음이 안타까운 동시에 그걸 뒤늦게 눈치챈 나 자신도 안쓰럽게 여겨졌다. 나도 이제 이별과 상처에 방어적인 나이가 되었구나.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작아진 것일까.

  첫사랑과 끝사랑

  드라마에 나오는 로맨스는 둘로 나뉜다. 첫째는 십대 시절 첫사랑부터 이어져 온 순결한 사랑. 한류의 원조 〈가을동화〉가 대표적인 예다. 〈도깨비〉와 〈별에서 온 그대〉처럼 여러 번 생을 거듭하는 동안 한결같이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도 첫사랑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같은 계열이다.

  두 번째는 첫사랑과 같은 순수한 시절을 다 보내고나서 찾아오는 끝사랑이다. 사랑과 이별의 온갖 희로애락을 다 경험하고 나서 맞이하는 마지막 사랑. 〈너는 나의 봄〉이 바로 이 끝사랑에 속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다 경험하고 나서야 맞이하는 새로운 사랑, 새로운 봄. 사계절의 시작을 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조금 더 연애를 해봐야 한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나서 비로소 오는 것이 봄이란 애틋한 녀석이다. 추위를 느껴본 자만이 따뜻한 온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첫사랑 드라마가 1020세대를 위한 로맨스 판타지라면 끝사랑 드라마는 ‘알 것 다 아는’ 어른들의 리얼 로맨스다. 어른들을 위한 사랑이라고 하면 대체로 정통멜로, 격정 멜로를 상상하는데, 〈너는 나의 봄〉은 등장인물들과 함께 울고 싶어지는 기묘한 매력을 가진 드라마다. 역시 최고의 사랑은 상대의 아픔을 보듬는 동정과 연민이 아닐까.

Ⓒ'너는 나의 봄'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tvN

  친애하는 소울메이트

  크리스마스에 산타에게 선물을 받고 싶어 화분에 양말을 걸어놓으면 선물 대신 침을 뱉는 아버지. 일곱 살의 어린 강다정은 『검은 고양이』 동화책을 읽으며 힘든 시절을 버텨낸다. 그녀가 원한 건 자기를 구원해줄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같이 울어줄 검은 고양이다. 하지만 가정 폭력 트라우마 탓에 그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문제 많은 남자 만나길 반복한다. 이름하여 ‘쓰레기 자석’. 〈너는 나의 봄〉의 다정(서현진)은 매일 술에 취해 어머니를 때리고 집 안 물건들을 부수는 폭력적인 아버지가 만들어낸 유년 시절의 악몽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간다.

Ⓒ'너는 나의 봄'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tvN

  “누군가를 마음에 들인다는 건 그 마음에 상처받기 좋은 구석이 생기는 거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두려운 거예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다정에게 한 남자가 운명처럼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주영도(김동욱). 정신과 의사인 영도는 그녀의 방을 잠깐 봤음에도 그녀의 가슴 아픈 가족 이야기를 단번에 간파해내고 그녀가 어떻게 ‘쓰레기 자석’이 되었는지 정확히 분석한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겁 많은, 발 없는 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다정. 그녀는 영도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채며 그를 저지한다. 사랑보다 어려운 것이 이해와 공감이라고 했던가. 영도를 노려보는 다정. 그녀의 눈빛이 건네는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당신은 날 이해할 수 있나요.

  그녀의 일곱 살

  〈너는 나의 봄〉의 서른네 살 강다정은 정서적 나이 ‘일곱 살’에 머물러 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베푼, 아니 그럴 거라고 기대했던 존재로부터의 배신. 드라마는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그녀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힘겨운 과정을 그려낸다. 이때 주목할 것은 그녀가 만들어가는 사랑의 형식이 에로스가 아닌 플라토닉 러브란 점이다.

  그녀가 마주한 끝사랑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거나 보기만 해도 설렘 가득한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다. 극 중 강다정은 여러 건의 연애와 더불어 주영도 이전에 썸을 타던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별로 부각되지 않는다. 상대방인 주영도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혼한 전 부인과 계속 왕래하고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연애 상담을 해주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강다정과의 연애에 갈등 요소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만나기 전에 어떤 사랑과 이별을 경험했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강다정은 강다정이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일곱 살이다.

  드라마는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상처받은 기억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나를 향한 절대적 사랑과 헌신을 기대하게 만든 사람.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첫사랑이었을 아버지. 드라마는 첫사랑의 원형인 아버지와 신뢰 관계 형성에 실패한 그녀가 남몰래 숨겨둔 아픈 과거에 오랫동안 시선을 머물게 한다. 그녀 안에 사는 일곱 살 어린아이가 세상 그 누구보다 애틋하다는 듯이.

Ⓒ'너는 나의 봄'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tvN
Ⓒ'너는 나의 봄'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tvN

  너는 나의 정신과 의사

  대기업 부회장, 톱스타, 로펌 변호사, 스타트업 대표… 그동안 로맨스물 주인공을 맡았던 남자들의 직업이다. 그들 가운데 〈너는 나의 봄〉의 주영도는 유독 튀는 존재감을 발휘한다. 정신과 의사. 친근감 넘치는 내과, 외과, 성형외과를 제쳐두고 그는 왜 정신과 의사인 것일까. 한국 드라마에서 정신질환은 주요 소재로 사용된 적조차 거의 없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강다정이 원한 건 백마 탄 왕자가 아니다. 같이 울어줄 검은 고양이다.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사는 일곱 살 어린아이를 따뜻하게 품어줄 사람. 함께 이야기하고 그녀가 느끼는 슬픔과 두려움에 공감해줄 사람. 주영도라 쓰고 정신과 의사라고 읽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그렇다. 주영도는 반드시 정신과 의사여야만 했다.

  극 중 주영도는 정신과 의사로서 강다정을 포함해 다른 환자들의 다친 영혼을 따뜻하게 보듬는다. 그 과정에서 명대사가 자주 탄생하는데 그에게 상담받는 환자들뿐 아니라 드라마 밖에 있는 나까지도 괜스레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불특정 다수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랄까. 주영도는 특유의 느린 말투로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사는 어린아이를 불러내 다정하게 손을 내민다. 혼자 울고 있는 그 아이를 나는 이해할 수 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요. 그렇게 주영도는 세상 모든 사람의 끝사랑을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만인의 연인으로 등극한다. 아, 주영도! 그런데 알고 보면 그의 마음속에도 ‘첫사랑’ 엄마에게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형의 죽음 이후 엄마에게 외면받은 그의 작은 동심.

  정신과 의사는 마음이 아프면 어떻게 해요.

  드라마는 마지막 회에서 모두의 고민을 들어주던 정신과 의사 주영도를 일곱 살 어린아이의 이름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따뜻하게 품는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봄〉은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이들을 보듬는 ‘힐링 로맨스’가 된다. ‘끝사랑’이 된다. 그렇게 세상의 봄을 재촉하는 상춘곡(賞春曲)이 된다. 봄이여, 오라. 어서 오라.

  아, 나의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김민정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으로 문학과 문화를 분주히 오가며 나만의 장르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드라마 인문교양서 『당신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가요』 『당신의 밤을 위한 드라마 사용법』 에세이 『언니가 있다는 건 좀 부러운 걸』 소설집 『홍보용 소설』 이 사람 시리즈 『한현민의 블랙 스웨그』 등이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 《쿨투라》 2021년 10월호(통권 8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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