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어느날, 내가 숲을 그리고 있었다
[INTERVIEW] 어느날, 내가 숲을 그리고 있었다
  • 고충환(미술평론가)
  • 승인 2021.10.01 0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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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택근무도 그렇지만,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집콕족’이 늘었다고 한다. 양가적이라고 생각되는데, 예술을 업으로 하는 창작 주체에게는 오히려 잘된 면도 없지 않다. 불가피한 선택이라고는 하나, 여하튼 작업에 매진할 수 있어서다. 그렇게 오늘도 작업에 여념이 없는 변연미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길이다. 장흥 유원지 가는 길에 있는 가나창작아틀리에다. 집단창작소 개념의 아틀리에에는 변 작가 말고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작가들이 많다. 한국현대미술의 창작산실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작가는 오랫동안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면서 작가로서 활동하다가, 2년 전부터 아틀리에에 입주해 있고, 현재는 프랑스 현지와 국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이동이 원활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올해에도 파리에 전시가 잡혀 있다. 풍경을 그리는 작가는 많지만, 작가처럼 숲을 그리는 작가는 많지 않다. 작가의 숲 그림은 자연이 주는 치유며 위로와 함께, 무엇보다도 남성적이고 에너지가 넘친다. 개념으로 각색되기 이전의 숲 자체며 원형적인 숲을 그린다고 해야 할까. 숲 본래의 야성과 야생을 그린다고 해야 할까. 이런 강렬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인정받아 작가의 그림은 그동안 각종 크고 작은 기획전시에 초대를 받았고, 올 9월말에는 미술전문 출판사 헥사곤에서 중견작가 시리즈 출간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창문으로 맞은편 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작가의 작업실에서 평소 작업에 대한 작가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

  고충환(이하 고) 현대미술에서 자연, 풍경이 갖는 의미는 예전 같지는 않은데, 자신의 그림 혹은 작업이 현대미술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변연미(이하 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예를 들면 인상파는 전통적 회화 기법을 버리고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자연을 색채로 묘사하거나 풍경 속에서 순간을 잡아내려는 노력을 했다면 현대미술에서는 자연을 재현하려는 목적이 아닌 자연이 인간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밝히려는데 더 큰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와 같은 맥락 속에서 저는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고, 그것은 미술대학 졸업 후 학교를 떠나 작업실에서 혼자 작업을 밀고 나가야 하는 막막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작업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그림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하다 보니 고독한 느낌이 들고, 질문을 품고 작업에 임하는 시간들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끊임 없는 질문이 에너지가 되어 나를 이끌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자꾸만 더 큰 본질에 도전하고 싶어졌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답을 못 찾았다는 거죠. 여전히 숲 그림 한 점을 그리고 나면 제가 자연에 대하여 마치 쓸만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는 느낌이랄까… (웃음). 아무튼 계속 그리게 됩니다. 선 긋기, 색칠하기부터 시작했어요. 머리로 생각하여 그리기보다는 몸에게 맡겼어요. 즉흥적인 감각이나 감성 쪽으로 나를 유도했구요. 그것이 나를 편하게 했거든요.

  지금의 작업 주제인 숲의 풍경으로 변화되어 오기까지 계기가 있긴 합니다. 1999년 12월 끝자락에 세기말적 불길함으로 파리에 불어 닥친 폭풍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로타르라는 그 폭풍은 제가 늘 산책하며 친숙하게만 느끼던 숲을 파괴했습니다. 수많은 나무들이 뿌리가 뽑혀 쓰러지고 부러진 숲 풍경은 마치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뒤의 황폐함과 처절함이 합쳐진 묵시록 같았어요. 저는 충격을 받고 자연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죠. 숲을 바라보고 묵상하며 인간이 자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크게 각성하게 되었고, 그 후로 제가 몸에 맡겨, 몸에 리듬을 찾으려고 캔버스에 그었던 선들은 나뭇가지로 잎으로 생명으로 변화하였죠. 이렇게 숲에 집중한 작업은 이제 어떤 절차도 없이 바로 온전히 내 몸을 통해서 지나가는 느낌입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숲이라는 대상을 인식하고 반응하게 된 것이죠. 과학적으로도, 생태학적으로도 고찰하지 않은 숲이죠. 춥다 뜨겁다 환하다 노랗다 어둡다 깊다 무섭다 편하다 놀라다 등등, 몸으로 왜 그렇게 느꼈는가를 평면에서 작업을 하며 이유들을 되짚어 찾아갑니다. 이런 외로된, 지극히 사적인 욕망을 실현하려는 숙고와 활동이 어떤 결과물을 얻어 현대미술이라는 장르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면 글쎄요… 아마도 “숲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숲이 되려고 애쓰다가 실패한 화가” 정도로 자리매김 된다면… (웃음)

  시대의 담론으로 생태, 환경, 나아가 기후 같은 개념이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자연이나 풍경 또는 숲 개념과는 어떻게 다른지, 아니면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시대 담론으로서의 자연에 대해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자연에 관해서는 입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저 묵묵히 몸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상실하고 저 자신이 자연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 속에 있거든요. 숲을 그리는 것은 맞는데… 녹색만 봐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연 혹은 숲과 관련해 인상적으로 본 전시가 있는지, 자신이 참여한 전시도 좋고, 본인이 의미있게 본 관련 기획 같은 것이 있는지…

   기억에 남는 전시는 2019년도 하반기에 프랑스 파리 foundation cartier에서 있었던 전시입니다 〈우리는 나무(nous les arbres)〉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장기간 열렸던 전시였어요. 자연의 중요함에 대한 환기가 필요한 시기에 잘 맞는 전시였다고 봅니다. 식물학자, 회화, 조각가 등 많은 분야의 사람들이 참여한 전시인데, 전시 주제에 관해 상징적으로 던져진 “순전히 인간적인 것은 없으며 인간의 모든 것에는 식물이 있고, 모든 경험의 근원에는 나무가 있다”라는 철학자 에마누엘레 코치아(Emanuele Coccia)의 말이 제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네요.

  그리고 제가 참여했던 2019년 수원시립미술관 아트 스페이스 광교 〈뜻밖의 초록을 만나다〉 전시는 도심 속 현대인의 삶에서 우연히 초록을 만나 자연을 인식하게 된다는 의미가 함축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시인이 짧은 시간 속에서라도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도시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이유와 중요성을 다양하게 기록하고 주장하고 제시하는 전시였습니다.

   좀 뻔한 질문이지만,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싶은지…

   글쎄요 해 보지 않은 생각인데… 작품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 작업을 한 작가? (웃음)

   그림에 숲이 많은데, 숲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죠...

   그러니까… 2000년 경부터 황폐한 숲의 풍경이 조금씩 나타났던 것 같아요. 그 후로 계속 변모되어가는 숲을 그리고 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제 화폭이 이토록 녹색으로 가득하게 될 줄은 그땐 몰랐었죠.

   숲을 그리게 된 동기나 이유 같은 게 있는지…

   생각해보면 숲을 그려야겠다는 계획이나 욕구는 없었어요.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로타르라는 폭풍이 지나간 뒤 놀라움과 충격으로 숲에 다가갔는데 “숲을 기록해야겠다” 라든지, 파괴된 숲을 보며 “내가 작업으로 숲을 다시 살려내야겠다” 라든지의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황폐한 숲을 보면서 내 몸이 감응했다고 해야 하나… 너무 미화했나요? (웃음) 아무튼 제가 즐겨 그리던 순수한 운동의 선들이 충격을 받으면서 숲속의 나무들로 변신했다고 해야겠네요. 그러니까 어느 날 보니까 제가 숲을 그리고 있었다는 말이죠.

   처음 그리기 시작한 숲이 뱅센느 숲인 걸로 알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뱅센느 숲과 관련한 인연, 의미 같은 것이 있는지…

   그것은 아주 명쾌하고 단순해요. 뱅센느 숲 근처에 살았던 거죠, 행운이죠. 그렇게 큰 숲이 집 근처에 있었으니…. 작업실에서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아서 답답할 때나, 남편과 다투고 난 뒤나, 이국 생활에 프랑스 말이 모자라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나, 아무렇지도 않을 때라도 뱅센느 숲은 말없이 저를 받아주었죠. 수많은 숲길과 여러 개의 호수, 그리고 산책하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지금도 기억에 있어요.

   주제를 보면, 〈검은 숲〉에서 〈다시 숲〉으로 변화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검은 숲〉과 〈다시 숲〉이 어떻게 다른지…

   〈검은 숲〉 그림은 색이 갖게 되는 충만함보다는 헤아릴 길 없는 공간(깊이)을 나타내는데 몰두하였구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숲〉은 다소 중의적인데요, 요컨데 제가 숲 그림에 너무나 오래 붙들려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다른 그림을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숲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는데 그때 또 〈다시 숲〉 그림을 그려야겠다라는 의미의 〈다시 숲〉이 있구요, 황폐한 죽음의 숲이 녹색 숲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에서 〈다시 숲〉의 의미가 있죠. 제의로 가득한 황폐한 〈검은 숲〉을 그릴 때보다 〈다시 숲〉을 그리는 지금이 그림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화가들이 대개가 위로나 치유 같은, 요샛말로 ‘힐링’의 계기 때문에 숲을 그리는데, 숲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의미나 숲을 그리는 이유 같은 것, 같은 의미지만 사람들이 본인의 숲 그림을 어떻게 또는 무엇을 봐달라는지와 관련한 주문 같은 것이 있다면…

   숲에 대한 기억이 시작된 곳이 뱅센느 숲이었기때문에 숲은 제게 어떤 위로 같은 것이었죠. 조건 없는 포옹이랄까. 핫팩이 차가운 손을 데워주듯이, 지쳐서 식어버린 제 가슴을 숲이 데워줬으니 숲은 제게 위로의 의미가 컸고, 늘 작업 생각에 몰두하여 산책하였으니 숲에서 언제나 영감을 얻었죠. 숲을 그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 유감이지만, (웃음) 여전히 제가 탐하는 운동하는 선들을 거느린 숲을 그리는 일이 생명과 존재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기를 바랄 수 있으니까 좋죠. 이것을 숲을 그리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그림 앞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주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그림에 커피가루를 재료로 사용하는데, 마티엘과 같은 기술적인 효과 때문이겠지만, 그 외에 다른 의미나 이유가 있는지요, 이를테면 정화 같은 것…

   질문에 답이 있네요. 특별히 재료가 갖는 의미는 없어요. 우연히 발견한 재료이지만, 처음엔 커피의 색감을 그대로 썼습니다. 대지의 색을 닮았거든요. 그런데 숲이 녹색으로 채워져 가면서 커피 찌꺼기는 숲 공간의 밀도를 표현하는데 적절한 재료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테크닉적인 문제이지요. 그림에서 커피 향이 날 거라고는 기대하지 마세요. (웃음)

   시점과 관련되는 것으로, 아래에서 위로 숲을 올려다보는 시점이 많은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 같은 것이 있는지…

   항상 제자리에서 움직임이 없는 나무이기에, 다양한 나무의 표정을 읽어내려고 제가 움직이며 더 멀리서 또는 더 가까이에서 관찰을 하게 됩니다. 올려다본 나무는 왠지 더 긴장되고 그리는 자신이 더 강해지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지나치게 즐기지는 않아요. 다시 키 높이에 맞는 시각으로 돌아오죠. 안정되고 느긋하며 깊이 있고, 풍요로운 포용이 있는 시각이죠. 숲에서 나무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얘기하니 소동파의 시가 생각납니다. 저의 생각과 상통한 구절이 있어서요.

  橫看成嶺側性峰(옆에서 보면 고개, 곁에서 보면 산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에 따라 모습이 제각각)
  不識廬山眞面目(여산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只緣身在此山中(바로 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다)
  - 소동파, 「題西林壁」

byun05_다시 숲_2019_acrylic, coffee grounds on canvas_162x130cm

   보통 숲이나 풍경 그림과는 다르게 화폭이 압도적인 크기가 많은 것이 인상적이더군요. 왜 이렇게 큰 화폭에다가 그리시는지요.

   사람들이 저더러 재미있다고 해요. 몸집은 조그만 사람이 그림은 제일 크게 그린다고. (웃음) 그럴지도 몰라요. 저는 작은 화폭에는 만족을 못 하는 성격인 것은 분명해요. 제 온몸을 받아주는 커다란 캔버스 위에서 노동을 해야 직성이 풀리니까요. 앞으로도 점점 더 크게 그리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요? 대지만큼 넓은 화폭을 원합니다.

   멀리서 그림을 보면 사실성이 강한 숲이고 풍경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의외로 사실적이지만은 않다는 느낌을 주는데, 형상과 추상, 재현과 추상 간 관계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 주시죠.

   예, 고 선생님도 그렇게 느껴지시나 봐요. 제 그림이 멀리서 보면 사진처럼 사실적인데 가까이서 보면 묘사의 흔적에 밀도가 있지는 않거든요. 다시 말해서 가까이서 본 그림은 덜 사실적인데 적당히 떨어져서 보면 왜, 아주 사실적으로 보이느냐 말이에요. 아마도 운동감에 충실한 묘사를 욕구한 결과겠지요. 사실에 충실하기보다는 구조와 운동감에 충실하려는 욕구 말이에요. 디테일 보다는 현장으로서 공간을 사실적으로 옮겨야 숲이 지니고 있는 에너지를 화폭에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는, 시각이 경험한 것에 따라 그리는 거죠. 화폭을 숲이 지닌 에너지가 일렁이며 살아있게 해보겠다는 욕망이 제게 있습니다.

  그리고 재현과 추상을 구분할 순 있겠지만 그 구분은 무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상에 대한 비전이 없는 재현처럼 무의미한 것이 없을 테고, 충실한 재현의 의지를 실현한 적이 없는 추상은 이미 추상이 아니지요. 너무 멋지게 말이 되는 것을 보니 유명한 누군가가 이미 했던 말 같기도 하고. (웃음)

  고 대화 즐거웠습니다. 전시회를 준비하고 계시다던데 언제쯤 어디서 열리는지요, 출품할 작품은 잘 하고 계시는지요.

  변 2021년 10월 26일부터 한 달 가까이 부산에 있는 〈523쿤스트독〉에서 개인전이 있고요, 70평 공간에 꽤 많은 그림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12월에는 〈전남도립미술관〉 개관전에 참가합니다. 제 그림이 앞선 시대의 대가들과 같이 걸리게 되어서 기대와 부담이 함께하는 전시라고 해야겠네요. 봄부터 무더웠던 올해 여름 내내 작업실에서 지내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아직도 대작 몇 점은 더 그려야 해요.

   전시회 기대가 큽니다. 전시회를 마치면 파리로 돌아가시나요?

   12월 말쯤 파리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서울 생활이 길어지니까 파리가 그립네요, 파리에 가면 또 서울이 그리워지겠죠. 다시 서울에 와야죠. (웃음) 오늘 고 선생님과의 대화는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또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변연미
1988년 추계예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1994년 이후 파리에서 작업. 활동 중.

고충환
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석사과정 졸업.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이 당선되었으며, 성곡미술관 기획공모전 〈재현의 재현전〉, 월간미술대상 학술평론 부문 등을 수상(장려상)하였다. 저서로 『무서운 깊이와 아름다운 표면』 『비평으로 본 한국미술』(공저) 등이 있다.

 

* 《쿨투라》 2021년 10월호(통권 8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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