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라이프] 08 신인류의 스토리텔링
[MZ 라이프] 08 신인류의 스토리텔링
  • 함은세(본지 객원 기자)
  • 승인 2021.11.25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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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케이팝이 있다

  지난 9월 13일, 코로나로 인해 2년 간 개최되지 못했던 패션계 최대 행사 ‘멧 갈라(MET gala)’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열리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일주일 전까지 맨해튼에서 머무르다 업스테이트(뉴욕 주 북부)로 돌아온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TV를 통해 행사 진행을 지켜보았다. 전통적으로 그 해를 장식한 최고의 셀럽들이 모이는 멧 갈라답게 참석자들의 면면도 화려했는데, 그중에서도 나의 눈을 사로잡은 건 그룹 2NE1 출신의 가수 CL과 블랙핑크 멤버 로제였다. 특히 로제의 경우 본인이 글로벌 뮤즈로 활동 중인 명품 브랜드 생로랑의 수석 디자이너와 함께 입장하며 큰 화제가 됐다.


  이처럼 이제 ‘신한류’, 그중에서도 ‘케이팝(K-POP)’ 물결은 갑작스러운 센세이션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내 주위 외국인 친구들만 봐도 대부분 나보다 더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고, 심지어는 내가 모르는 그룹과 노래들까지 훤히 꿰뚫고 있다. 도저히 그들이 한국과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아 내가 도리어 “왜… 좋아하는 거야…?” 하고 물어볼 정도이니 말 다 했지 뭐.


  물론 이런 “#붐은온다”* 열풍의 한가운데에는 방탄소년단이 있다. 삶의 대부분을 아이돌 오타쿠 자아를 장착한 채 살아가던 시절, 엠카** 무대에서 스모키 메이크업을 짙게 하고 교복 넥타이를 풀어 헤치던 그들의 데뷔 초를 지켜봤기에 콜드플레이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현재의 모습 앞에서는 그저 어리둥절하며 순식간에 흘러간 시간을 체감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방탄소년단의 성공 신화를 이야기하며 이유라이프를 한 가지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 요인을 선택할 수 있다. ‘화양연화’, ‘데미안’, 그리고 ‘I NEED YOU’. 이 세 가지를 합쳐서 일컫는 하나의 단어. 정답은 ‘세계관’ 되시겠다.

 

  어서와, 우리 세계관은 처음이지?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했던 건 모든 오타쿠들의 아버지인 이수만의 SM 엔터테인먼트다.(“내 혈관에는 ‘SMP’가 흘러…”)***이수만의 ‘세계관’ 사랑은 바야흐로 ‘H.O.T.’ 데뷔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이미 그때 <전사의 후예>라는 곡을 통해 H.O.T.를 십대들의 영웅으로 이미지화시켰다. 하지만 이런 ‘세계관’ 전성시대를 만들어낸 건 단연 2010년대 중후반을 흔들어놨던 ‘EXO(엑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무려 멤버 개개인에게 각자의 초능력이 존재하는 전무후무한 컨셉을 시도함과 동시에 매 컴백마다 선보이는 테마들이 전부 초능력과 우주 생명체(…)를 바탕으로 한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연결되는 파격적인 시도를 선보인 것이다. 그러나 SM 세계관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건 ‘NCT(엔시티)’를 통해서다. 무한영입 무한확장이라는 그룹 자체 포메이션도 놀라운 부분이지만, NCT의 경우 엄청나게 많은 멤버 수와 그룹 내에서 나누어지는 유닛들을 관통하는 세계관을 설계해(꿈으로 연결되는… 뭐 그런 거) 팬들로 하여금 셜록 홈즈에 빙의하여 온갖 해석본을 내놓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수만 취향 집합체(디스토피아, AI와 메타버스, 악의 무리에 맞서는 능력자들… 등.)’인 ‘æspa(에스파)’가 데뷔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구축에 성공한 “SM 컬쳐 유니버스”는 이제 SM 소속 그룹 전체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지은 후 ‘광야’라는 새로운 메타버스 필드를 무대로 하는 대형 스토리텔링 프로젝트를 개시한 상태다.

 

ⓒ방탄소년단 "I NEED U" 컨셉 포토
ⓒ방탄소년단 "I NEED U" 컨셉 포토

  이렇게 SM의 수장 이수만의 오랜 꿈(아이돌 오타쿠들은 그를 ‘찐타쿠-진짜 오타쿠’라고 부른다…)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세계관’이라는 개념은 아이돌 산업 전체 트렌드를 완전히 뒤바꿨다. 이전에는 소비자들에게 즉각적으로 보여지는 비주얼라이징에만 신경을 썼다면, ‘세계관’ 열풍 이후에는 긴 호흡에 집중하며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통해 팬덤을 단순히 ‘산업의 소비자’가 아닌 ‘스토리의 일원’으로 자각하게 만드는 세밀한 심리적 작업에 큰 투자를 하는 회사들이 많아진 것이다. 실제로 SM 엔터테인먼트의 경우 자사의 ‘통합 세계관’인 “SM 컬쳐 유니버스”를 구성하고 기획할 전담 직원을 따로 채용하고 있을 정도다.

  방탄소년단과 소속사 빅히트 엔터테인먼트(현 하이브 그룹)는 그 트렌드를 적절하고 똑똑하게 이용한 케이스다. 방탄소년단의 활동 전환점으로 인식되는 <I NEED U>가 타이틀곡인 2015년 발매 앨범 《화양연화》는 고전 문학 작품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멤버들에게 “각자의 아픔을 간직한 소년들”이라는 큰 틀을 기반으로 개별적 서사를 부여한 뒤 그들이 만나고 연결되는 콘셉트를 앨범 전체를 통해 풀어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기반으로 하는 콘셉트는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방탄소년단 세계관을 엮어내는 중심 줄기가 되었는데, 디테일한 스토리를 유추하고 해석해내는 것은 역시 팬들의 몫이었고, 심지어는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높아져 그들의 세계관을 주제로 한 철학 서적(…)들까지 출간되었다. 이런 영리하고 매력적인 스토리텔링 마케팅으로 ‘인문학’ 특유의 ‘클래시컬함’을 가미시킨 방탄소년단은 결과적으로 타 문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게 인식되는 아이돌 산업에 관한 편견을 걷어내고 일종의 ‘무게감’을 선보여 전세계적인 어필에 성공한다. 난해함으로 인해 진입 장벽이 존재하는 SM의 세계관에 비해 조금 더 베이직하고 널리 알려진 고전 문학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도 가산점을 얻는 계기였다. 이렇듯 방탄소년단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팬을 ‘제3자’로 두는 마케팅은 성공할 수 없으며, 그룹과 팬덤을 하나로 결집시킬 ‘가교’ 같은 서사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SM 컬쳐 유니버스 ‘광야’ 에스파 컨셉 이미지
ⓒSM 컬쳐 유니버스 ‘광야’ 에스파 컨셉 이미지

  결국 ‘이야기’가 이긴다

  얼마 전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화제였던 ‘SM 컬쳐 유니버스 기획 디자이너’ 채용 공고를 보며 “역시 ‘이야기’가 이긴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너무 많은 문화의 홍수에 잠식되기 직전인 소비자들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것. 일 년에 데뷔하는 그룹이 몇백 개에 달하는 한국의 아이돌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는 것. 상향 평준화된 외모와 실력으로 인해 아무리 큰돈을 투자해도 그것에 비례하는 이익을 거두는 게 어려워졌기 때문에, 결국 ‘이야기’의 존재 유무는 흥망성세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는 추세다.

 

ⓒNCT 세계관 심볼 이미지
ⓒNCT 세계관 심볼 이미지

  비단 아이돌 산업뿐만이 아니다. 꺼내어 보일 스토리가 있는지에 따라 다양한 것들이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주목받는다. 대학들은 학생들의 자기소개서에서 실패와 고난을 견디고 이뤄낸 성공담을 기대하고, 회사들은 면접 시 응시자가 얼마나 노력하여 무언가를 거머쥐었는지 듣기를 원하지만, 그마저도 전부 삶 안에서 느낀 진솔한 감정들보다는 여전히 기승전결 그 자체에 더 포커스를 맞추는 경향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시시하고 부담스러울 만큼 사적인 게 아니라는 인식이 생긴 건 이전과 비교하면 ‘발전’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다른 분야에 비했을 때 보여지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아이돌 산업 내부에 스토리텔링’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건 곧 한국 문화 산업 전체에 ‘알맹이’의 중요성을(설령 그게 “잘 팔리기” 때문일지라도) 인지하는 흐름이 형성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온갖 컨셉추얼한 요소들이 뒤섞여 정신이 없는 아이돌 세계관 전성시대에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가도, 이내 “나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픽 웃으며 혼잣말을 뱉는다. “그래도 역시 ‘이야기’가 있는 세상이 조금 더 낫지.” 하고 말이다.

함은세
고등학교 자퇴한 걸 자랑하고 다니는 02년생. ‘인생 재미있게 살기 프로젝트’ 라는 명목 하에 삶을 모험하며 세상을 읽는 눈을 키우는 중이다.


* #붐은온다 : 오타쿠들의 성지인 한국 트위터에서 유명한 밈으로, “쿨투라 붐(boom)은 온다”와 같이 본인이 좋아하는 아이돌 등이 더 잘 될 거라는 뉘앙스로 사용한다. ‘#’은 해시태그의 의미이고, 해시태그를 사용할 때는 띄어쓰기를 할 수 없기에 문장을 통째로 붙여 쓰는 문화가 형성됐다.

** 엠카 : CJ E&M 산하 음악 전문 채널인 엠넷(Mnet)의 음악방송 <엠카운트다운(M countdown)>의 줄임말. 지상파는 아니지만, 아이돌 산업에서 엠넷이라는 방송사가 갖는 파워가 크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음악방송으로 꼽힌다. 메인 음악방송 중 가장 이른 요일인 매주 목요일에 방송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수들이 컴백 최초 공개를 엠카에서 한다.

*** “내 혈관에는 SMP가 흘러” : SM 엔터테인먼트 팬들 사이에서 형성된 밈. 여기서 SMP는 ‘SM Music Performance’의 줄임말로, SM 이사이자 작곡가 겸 작사가인 유영진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난해한 가사와 격렬한 퍼포먼스, 그리고 다양한 소스를 이용한 리믹스 음악이 메인이다. 이때 알파벳 ‘P’의 발음이 한국어에선 ‘피’와 같기 때문에, ‘피 대신 SMP’라는 자체적 밈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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