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인간과 사랑에 빠지다
[드라마 월평] 인간과 사랑에 빠지다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1.11.30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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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다양한 얼굴 '신'
Ⓒ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로 이어지는 성경에 적힌 인류의 역사를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묘한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만약 그 시작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우리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 하나님, 그러니까 신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그런 불온한 생각을 혼자만의 상상으로 끝내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장재현 감독이다. 그가 만든 영화는 한국을 무대로 장재현 감독이 새로 쓴 한 편의 ‘경전’이다.

  장편 데뷔작 <검은 사제들>(2015)은 그가 품은 종교적 세계관에 입문하는 일종의 트레일러 역할을 담당한다. 누적 관객 수 540만 명을 기록한 이 영화는 퇴마의식을 통해 십 대 소녀의 몸에 깃든 악령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 카톨릭 신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그 악령은 “거짓말의 아버지, 최초의 살인자”로 아주 악명이 높아 그의 출현에 대해 극중 사제들은 “우리나라에서 그럴 경우는 희박한데”라며 놀라워한다.

  이는 <사바하>(2019) 속 동방교 김제석의 등장으로 연결된다. 김제석은 조계종 총무스님은 물론이고 티벳 대승에게도 “진짜”라고 인정받은 “신이 된 (한국)사람”이다. 장재현 감독은 종교 전쟁에서 늘 변방에 머물던 한국에 세계적인 신과 악령을 소환해냄으로써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을 신성한 영적 전쟁의 무대로 승격시킨다. 아, 대한민국.

Ⓒ '하백의 신부 2017'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 '하백의 신부 2017'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한국 드라마와 환웅의 후예들
  한국 영화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뽐내며 존재감을 자랑하던 세계적인 신들은 드라마로 건너오면서 인간의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는 ‘귀요미’들로 파격 변신한다. 그들은 알았을까. 자신이 이토록 인간 여자를 향한 무한 애정결핍에 시달리게 될 줄.

  어쩌면 그들의 운명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신이 주연을 맡은 최초의 한국 판타지 ‘단군신화’에서 하늘의 신 ‘환인’은 아들 ‘환웅’을 지상에 내려보낸다. 이때 환웅은 하늘에서 함께 내려온 삼천여 명의 동족(?)은 제쳐두고 곰에서 여자 인간이 된 웅녀와 가정을 꾸린다. 그리곤 떡두꺼비 같은, 아니 곰 같은 아들 ‘단군’을 낳는다.

  인간 여자를 사랑한 환웅의 후예들은 한국 드라마에서 유독 많이 발견된다. 2017년에 방영된 <하백의 신부 2017>은 인간 세상에 내려온 물의 신(神) ‘하백’과 인간 여자 ‘윤소아’의 로맨스를 다룬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상상하던 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백이 등장한다. 물의 신 ‘하백’하면 제일 먼저 한국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능력 좋은 외할아버지다. 주몽이 자신을 죽이려는 태자들을 피해 도망칠 때, 물고기와 자라를 동원해 강에 다리를 놔주던, 존재감이 남다르던 그분.

  이토록 장엄한 아우라를 풍기던 ‘물의 신’ 하백은 <하백의 신부 2017>에서 황제 즉위에 필요한 신석 옥새를 모으기 위해 인간계로 내려온다. 하지만 사고로 공식 게이트에서 벗어나 이상한 곳에 떨어지게 되면서 신력을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여자 인간 윤소아에게 얹혀사는 처지로 전락하는데,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갈 것을 자꾸만 자기가 물의 신 하백이네, 신계의 차기 황제네, 하는 바람에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신력만 회복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한다. 아뿔싸. 윤소아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네. 하백은 힘겹게 되찾은 신력을 윤소아를 위해 모두 소진하고 스스로 사멸의 길을 선택한다. 신계의 황제는커녕 생존조차 위협받는 처지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목숨 걸고 사랑한 윤소아와 극적으로 해피엔딩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휴.

Ⓒ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인간계에서 고생한 하백의 이야기가 하늘에 널리 퍼진 것일까. 최근 한국 드라마에 출몰하는 신들이 아주 겸손해졌다. <당신의 운명을 쓰고 있습니다>(2021)의 ‘신’ 신호윤은 우리가 알고 있던 전지전능한 신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의 운명을 쓰는 일을 담당하는 그는 사랑을 글로 배운, 연애에 미숙한 신이다. 그가 담당하는 인간 정바름의 연애가 자꾸 실패하는데, 그건 모두 인간의 운명을 창작하는 신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아, 상처뿐인 내 연애는 어떻게 책임질 건데.)

  인간이 쓴 고약한 악플을 읽은 것일까. 신호윤은 완벽한 로맨스를 위해 인간 작가가 쓴 작품을 몰래 베껴 쓴다. 그런데 하필 그 글이 시청률 30%의 인기 막장 드라마를 집필한 스타 작가 고체경의 것. 인간의 운명을 쓰는 신과 등장인물의 운명을 쓰는 드라마 작가의 불꽃 튀는 대결. 승리는 당연히 고체경의 몫이다. 막장드라마의 파격전개를 어찌 고상한 신 따위가 이길 것인가.

  그렇게 신은 조용히 인간의 보조작가로 전락한다. 명색이 내가 창조주인데, 하고 하소연을 할 법도 한데, 고체경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는 자발적으로 드라마의 ‘서브’로 물러난다. 한 번 쓴 인간의 운명을 신은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바꿀 수 있다. 고체경이 죽는다는 걸 알게 된 신호윤은 인간 정바름을 찾아가 부탁한다. 제발 그녀를 살려주오.

  사랑하는 인간 여자를 위해 신으로서의 위엄과 존엄을 모두 던져버린 신. 얼마나 로맨틱한가. 하지만 인간의 운명을 쓰는 신의 존재를 알게 된 인간은 세상의 모든 신을 향해 거침없이 한 방을 날린다. 정바름이 직접 쓴 그의 삶에는 그 어떤 운명의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바름의 운명은 오롯이 정바름 스스로의 것이다. 아. 아. 멘붕에 빠진 신호윤의 귓가에 맴돌 것만 같은 그 노래.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아, 전영록.

ⓒ'하백의 신부 2017'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하백의 신부 2017'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사랑해줘서 고마워
  시한부 선고를 받고 힘겹게 살아가는 인간으로부터 동정과 연민을 받는 신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2021)의 신 ‘멸망’이다. 100일밖에 살날이 남지 않은 인간에게 “별은 1초에 79억 개씩 사라져. 너가 별보다 나은 게 있어? 말해봐. 니가 왜 살아야 하는데.”라고 다그치는 신. 그렇게 인간을 깡그리 무시하던 그 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찮은 인간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게 되는데…

  범죄자의 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던 인간 ‘동경’의 무모한 몸짓에 그는 집요하게 묻는다. “나 그냥 살렸다며. 그냥이 무슨 의미냐고?” 사랑에 굶주린 어린애처럼 애정을 구걸하는 신에게, 신을 원하고 원망할 뿐 사랑하는 인간은 보지 못했다며 칭얼거리는 신에게, 인간 ‘동경’은 ‘김사람’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관심과 온기를 나눠준다. ‘나를 이렇게 대한 여자는 니가 처음이야’의 달콤 버전이랄까. 신 ‘멸망’은 “너가 처음이야, 전부 다”란 오글거리는 대사를 시전하며 그녀에게 깊이 빠져든다.

  사라지는 모든 것의 이유가 되는 존재이기에 멸망한 세계를 하염없이 바라봐야만 하는, 비극적 운명을 혼자 감내하는 슬프고 쓸쓸한 신 ‘멸망’. 그리고, 그런 그를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인간 ‘동경’. 결국 멸망은 “사랑해. 그러니까 대신 죽어줄게.”라는 애틋한 사랑 고백을 남기고 죽을 운명의 동경 대신 스스로 사멸의 길을 택한다. “사랑해줘서 고마워.”

  다행스럽게도 그는 마지막 회에 인간으로 신분이 전환되어 동경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묻는다.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도 괜찮을까. 한때 신이었던,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이었던 신 ‘멸망’은 사랑에 빠진 인간 귀요미가 되어 동경을 졸졸 따라다닌다. 인간 여자가 이렇게 좋단 말인가. 이쯤 되면 구미호보다 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게 신이 아닐까 싶다. 인간처럼 먹고 잘 수 있다며 감격스러워하는 ‘멸망’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괜히 심란해진다. (아, 내 기도는 누가 들어줄 건데.)

김민정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으로 문학과 문화를 분주히 오가며 나만의 장르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드라마 인문교양서 『당신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가요』 『당신의 밤을 위한 드라마 사용법』 에세이 『언니가 있다는 건 좀 부러운 걸』 소설집 『홍보용 소설』 이 사람 시리즈 『한현민의 블랙 스웨그』 등이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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