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ICON] 이정재 꽃이 피었습니다: 2021 ICON 드라마 부문
[2021 ICON] 이정재 꽃이 피었습니다: 2021 ICON 드라마 부문
  • 신정아(문화콘텐츠 비평가)
  • 승인 2021.12.01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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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2021년 9월 17일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출시 보름만에 넷플릭스가 송출되는 전 세계 83개국에서 1위를 달성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글로벌 OTT 콘텐츠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 따르면 〈오징어 게임〉은 11월 2일 기준으로 41일 연속 넷플릭스 톱10 TV 프로그램 부문 1위를 기록하며 글로벌 신드롬을 갱신하고 있다. 〈오징어 게임〉은 456억의 상금을 놓고 벌어지는 잔혹한 서바이벌 게임을 다룬 작품이다. 주요 서사는 딱지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등 동심 가득한 한국의 전통 게임과 목숨을 건 도박 경기를 결합시켜 탄생한 한국판 〈트루먼 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을 정통 데스게임 장르로 분류하는 것은 난해한데, 그 이유는 기이하리만치 리얼하게 재현된 놀이터, 달고나 체험, 어스름 저녁의 골목길 등에서 소환되는 누군가의 얼굴과 목소리들이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은 목숨을 담보로 돈을 구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경기에 참여하지만, 정작 추억의 공간에서 마주한 경쟁자들은 누군가의 남편, 아내, 아들, 딸, 누나로 살아온 너무나 평범한 불행의 주인공들이다. 북에 두고 온 엄마를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범죄에 가담한 탈북민, 임금체불과 상습적 폭력에 시달리다가 사장을 폭행한 후 도망친 외국인 노동자, 시한부를 선고받은 노인, 60억의 빚을 지고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 경기에 참가한 엘리트 증권맨, 자신을 성폭행하고 엄마를 죽인 아버지를 살해하고 전과자가 된 딸. 이 쓸쓸한 인생 조합 중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이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주인공 성기훈이다. 이정재가 연기한 〈오징어 게임〉 속 성기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한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한 후 치킨집, 분식집을 차렸다가 실패한 가장이다.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채 빚으로 신체 포기 각서에 서명까지 했지만, 노모가 시장에서 힘겹게 번 돈을 경마장에서 탕진하는 대책 없는 인물이다.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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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극 중 기훈의 캐릭터가 마냥 극악하고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비록 가진 건 없지만 약한 사람을 배려하는 최소한의 인간성은 놓지 않은 인물이다.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신과 부딪쳐 넘어진 새벽(정호연 분)의 커피잔을 주워서 빨대를 꽂아주며 사과를 하고, 게임 참가자 중 최고령인 일남(오영수 분)이 바지에 소변을 본 후 창피함에 눈물을 흘리자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어 그의 허리에 둘러주는가 하면, 최후의 결투에서 승기를 잡은 기훈은 동네 후배 상우(박해수 분)에게 다 포기하고 집에 가자며 손을 내민다. 그런가 하면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새벽에게 “원래 사람은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니야. 안 그러면 기댈 데가 없으니까 믿는 거지”라고 말하는 기훈을 보면서, 분명히 이 상황이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경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착한 결말에 대한 실낱같은 바람을 품게 되는 것은 스토리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이정재의 ‘바닥 감성’ 덕분이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가 동료를 잃고, 사업에 실패한 후 부인과 이혼하고, 사채업자에게 신체까지 넘겨야 하는 냉혹한 현실에서도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살고자 몸부림치는 기훈의 리얼한 표정과 눈물, 절규들은 〈오징어 게임〉을 K-신파라고 부르는 이유로 언급되기도 한다. 잔혹한 경기장의 물기 없는 바닥에서 끊임없이 펄떡이며 생존한 기훈 덕분에 데뷔 28년 차 이정재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대세 배우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정재는 1993년 SBS 〈공룡선생〉으로 데뷔했다. 그에게 독보적인 캐릭터와 인기를 가져다준 첫 작품은 1995년 SBS 〈모래시계〉였다. 극 중에서 이정재는 말 없는 보디가드 백재희 역할을 맡아 짝사랑하는 여주인공 윤혜린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잃는 순정남으로 등장했다. 이정재의 연기가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것은 영화 〈도둑들〉과 〈신세계〉가 연달아 흥행하면서부터다. 이후 10년간 주로 권력형 인간 또는 권력의 하수인 등을 연기하면서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섬뜩한 악역을 맡았던 〈관상〉, 〈암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에서는 살기 등등한 권력욕, 무자비한 킬러 등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반면 전도연과 열연한 〈하녀〉에서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비열한 자본가, 〈사바하〉에서는 사이비 종교를 파헤치는 짠내 나는 목사로 등장한다. 천만 영화 〈신과 함께〉에서는 근엄하고, 생동감 넘치는 염라대왕으로 변신에 성공하면서 ‘캐릭터 컬렉터’, ‘캐릭터 장인’ 등의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이정재의 첫 넷플릭스 진출작인 〈오징어 게임〉 은 그에게 선물같은 작품이 됐다. 우선 지금까지 악하고 센 역할을 주로 맡았던 이미지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눈에 힘을 뺀’ ‘힘없고 약한’ 캐릭터를 추가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권력과 야망, 욕망과 폭력 등으로 써 내려온 강한 배우로서의 필모그래피에 새로운 감성과 서사가 추가된 것이다. 두 번째는 데뷔 후 처음으로 NSS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스타그램 개설 2주 만에 400만 팔로워를 훌쩍 넘긴 이정재는소 소한 일상과 자신의 첫 연출작인 〈헌트〉 현장 사진 등으로 팬들과 친밀한 소통을 시작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이라는 전통 미디어 안에서 견고한 이미지를 구축해온 배우 이정재. 〈오징어 게임〉으로 탄생한 이정재의 부캐 성기훈은 그를 평범한 이웃의 모습으로, 친근한 삼촌의 얼굴로 대중과 만나게 해준 고마운 인연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지질하며, 가난하고, 대책없는 성기훈이 품었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우정의 향기가 대세 배우 이정재를 어디까지 데려가 줄지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신정아
문화콘텐츠 비평가. 방송작가. 한국외대 세계문화예술경영 특임교수.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기획위원장, 전주국제단편영화제 심사위원.

 

* 《쿨투라》 2021년 12월호(통권 9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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