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ICON] 불황에도 꿋꿋이 관객을 만났던 영화들처럼: 2021 영화의 아이콘, ‘변요한
[2021 ICON] 불황에도 꿋꿋이 관객을 만났던 영화들처럼: 2021 영화의 아이콘, ‘변요한
  • 윤성은(영화평론가)
  • 승인 2021.12.01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씨네월드
ⓒ(주)씨네월드

  코로나 바이러스의 기세가 한풀도 꺾이지 않고 있던 지난 3월 말이었다. 대다수의 한국영화는 물론 외국영화들도 개봉일 확정을 망설이고 있을 때,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2019)가 조용히 극장가에 걸렸다. 2019년에 프로덕션을 끝냈으니 이 또한 인내심으로 기다리고 기다려서 잡은 날짜였을 것이다. 가볍지 않은 주제를 때로 유머러스하게, 때로 진지하게 풀어낸 연출에서 이준익 감독의 내공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평단 및 실관람객들의 반응은 좋았으나 상업적으로는 참패였다. 영화 속 ‘주자는 참 힘이 세구나’라는 씁쓸한 대사는 ‘코로나는 참 힘이 세구나’로 각색되어 영화판을 맴돌았다.

  다행히도 작품성만큼은 인정받아 이준익 감독은 백상예술대상, 부일영화상 등 각종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수십 편의 한국영화가 거리두기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이 영화의 개봉이 보여준 용기와 뚝심이 만들어낸 성과이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배우들은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설경구와 변요한, 두 사람의 매끄러운 연기와 둘 사이의 화학작용이다.

  그중에서도 변요한은 자산어보 서문에 등장한 흑산도 청년 ‘창대’역을 맡아 대선배와 대등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자산어보를 직접 글로 써내려간 것은 ‘정약전(설경구)’이되 그 뒤에는 창대의 지식과 경험이 있듯, 〈자산어보〉에서 심리적, 물리적 변화를 보여주고 결말을 맺는 인물은 작품 전면에 등장하는 정약전이 아니라 창대다. 흑산도의 가난한 어부로 살아가면서도 성리학 공부에 열심인 창대는 처음에 약전이 유배된 죄인이라는 이유로 가까이 지내는 것조차 꺼려하지만, 결국 서로의 지식을 교환하자는 ‘거래’에 응하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그러나 창대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은 약전이 아니라 성리학 실천에 대한 그의 포부를 비웃고 짓밟는 부패한 세상과 현실이다. 뭍으로 나가 양반의 지위와 권력을 꿰찰수록 창대는 거칠어지고 어두워진다.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수 없다는 것을 뼛속까지 체감하게 된 것이다.

  흑백 화면 속에서도 변요한은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희열과 분노를, 혼란과 무기력을 정확히 표현해낸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시절부터 수십 편의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에 출연하며 다져진 기본기는 드라마 〈미생〉을 기점으로 대중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한다. 변요한의 연기에 대한 제작진들의 신뢰 또한 이후의 필모그래피에서 잘 드러난다. 〈미스터 선샤인〉과 같은 대작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고애신(김태리)’의 정혼자로,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홍지영, 2016), 〈하루〉(조선호, 2017) 등의 영화에서는 허구적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한 남자로 분해 열연했다. 〈자산어보〉는 그의 원숙한 연기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제 그의 대표작이라 일컬을 만하다.

ⓒ'보이스' 스틸컷
ⓒCJ ENM

  가을에는 〈보이스〉(김곡·김선, 2021)로 다시 관객들을 만났는데, 〈보이스〉는 작년에 이어 조용했던 올해 추석 극장가에 개봉한 두 편의 한국영화 중 한 편이었다. 김윤석, 김명민, 설경구 등 내로라하는 중견 배우들과 공동 주연을 맡았던 전작들과 달리 〈보이스〉는 변요한의 원 톱 주연 영화다. 김무열이 인상적인 악역으로 출연하기는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변요한이 연기한 ‘서준’ 하나다. 전직 형사, 서준은 건설현장 관리직을 맡고 있다. 아파트로의 이사와 승진 등 좋은 일들을 앞두고 있던 그는 아내에게 걸려온 보이스 피싱 전화 한 통으로 아파트 중도금을 잃는 사고를 당한다. 이번 사건이 자신을 비롯한 직원들의 피해까지 무려 30억에 이르는 사기극이라는 것을 알게 된 서준은 범죄 조직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중국으로 간다. 변요한은 영화 결말부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나 홀로 첩보전을 벌이는 서준의 심리적 압박감 및 액션 신 등을 무난하게 소화해냈다. 다만, 변요한의 진중한 연기만으로는 완전히 극복되지 못할 만큼 서준이 모든 면에서 뛰어난 비현실적 영웅 캐릭터라는 점은 아쉽다.

  관객 기근의 시대에도 꿋꿋이 관객들을 만났던 그의 출연작들처럼, 변요한의 성실한 행보는 감염병에 굴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는 지난달 10일에 개봉한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하스미 에이이치로, 2020)라는 일본 영화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베스트셀러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변요한은 일급 스파이 ‘데이비드 킴’ 역할로 분했는데 그가 외국영화에 출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우리 영화사 최다 관객수 기록을 유지하고 있는 〈명량〉(김한민, 2014)의 후속편, 〈한산: 용의 출현〉(김한민, 2021)의 촬영도 이미 작년 여름에 마친 상태다. 변요한은 일본 장군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을 맡았는데 전작에서 조진웅이 연기했던 이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를 변요한은 어떻게 소화해냈을지 궁금하다. 〈한산: 용의 출현〉은 지금까지 그의 출연작 중에서 가장 제작비 규모가 큰 작품이다. 글로벌 프로젝트부터 블록버스터까지, 개울물이 강이 되고 바다로 나가듯 조용하지만 빠른 속도로 배우로서의 지평을 넓혀 가고 있는 변요한. 2021년 영화의 아이콘을 넘어 먼 훗날 우리 영화의 아이콘 중 한 명으로 자리잡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윤성은
영화학 박사. 201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이후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공연과 리뷰》 PAF 평론상 수상

 

* 《쿨투라》 2021년 12월호(통권 90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