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에세이] '해 바뀜'에 거는 세상을 향한 판타지
[사회문화 에세이] '해 바뀜'에 거는 세상을 향한 판타지
  • 설규주 (경인교대 교수)
  • 승인 2019.01.3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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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년 전, 19로 시작하는 마지막 해인 1999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20이라는 숫자로 시작하는 새해를 기다리며 뭔가 신비로운 기대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사실 2000년은 21세기의 첫해가 아니라 20세기의 마지막해이다. 그런데 당시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2000년을 실질적인 21세기로 여기는 분위기가 대부분이었다.

 어렸을 때는 21세기라는 말을 들어도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80년대 에 묘사되어 있던 21세기는 언제나 멀고먼 ‘미래’였고 그래서 나에겐 ‘판타지’였다. 21세기를 떠올리는 데 과학적인 예측 따위는 필요 없었고 그냥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그만이었다. 21세기가 되기만 하면 왠지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우주에라도 쉽게 날아갈 것 같았고 아픈 사람 싸우는 사람없이 다들 잘 먹고 잘 살 것 같았다.

 마침내 사실상의 21세기로 간주된 2000년 1월 1일 그날이 왔다. 그렇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밀레니엄 버그’ 대란이 있을 거라고 잠시 호들갑을 떨기도 했지만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미 1960년대에도 달에 사람을 보냈다는데 ‘무려’ 2000년 이 시작되었는데도 그런 일은 다시 없었다. 여전히 국내는 물론 지구촌 곳곳에서 질병이나 기아, 재해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았고 갈등과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사실 뭔가 크게 달라질 거라는 기대 자체가 허황된 건 아니었을까. 1999년 12월 31일 23시 59분 59초와 2000년 1월 1일 0시 0초가 뭐가 그리 다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째깍째깍 흘러가는 1초 1초와 뭐가 다를까. 시간이라는 걸 애초에 물리적으로 쪼갤 수 없는데 우리가 그렇게 해 온 것일 뿐.

 물리적 시간의 속도와 간격은 언제나 똑같고 지금의 1초나 연도가 막 바뀌는 시점의 1초나 다를 게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르게 느낀다. 정말 달라서 그렇게 느낀다기보다는 다르다고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다를 게 없는데도 다르다는 바로 그 점이 참 묘하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집에서는 연말연초에 집안의 달력을 새로 바꿀 것이다. 요즘 스마트폰의 다이어리 기능 때문에 꽤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새해가 되면 새로 준비한 다이어리를 제대로 써보겠다고 다짐하며 새해 주요 일정을 기록해 놓을 것이다. 100% 달성하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새해에 이것만은… 이번엔 진짜 꼭…’ 이라는 소망이나 결심을 적어두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한 소망이나 결심은 신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각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일년치 신문 중 아마도 가장 두꺼울 새해 첫 신문에는 다양한 곳에 몸담고 있는 평범한 시민들의 새해 소망이 실린다. 그 새해 소망은 개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정치, 경제, 교육, 복지 등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월급이 많이 올랐으면 좋겠다, 집값이 좀 안정되었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이 이제 그만 싸웠으면 좋겠다, 영유아 보육 관련 법이 개정되었으면 좋겠다, 노인 복지 정책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등등…

 새해 첫 신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바뀌어도 거기에 소개되는 소망은 매번 크게 다르진 않다. 그리고 결국 지금 어렵고 힘든 현실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나의 삶도 우리 사회의 수준도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쪽으로 수렴된다. 그런데 이 같은 목소리에는 새해에 ‘실제로’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질 거라는 기대가 어느 정도나 담겨 있을까. 정말 기대를 하기는 할까. 21세기가 되면 뭐가 확 바뀌지 않을까 하는 맘으로 기대했듯이 ‘해 바뀜’으로 인해 생긴 일종의 판타지를 나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공상空想, 몽상夢想 등으로 번역되는 판타지는 분명 허구다. 그렇지만 판타지의 본질은 그저 상상에 불과한 허황된 것이라는 데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현실에 구속되지 않는, 그래서 형식이나 내용에 제한 없이 자유롭게 생각을 펼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판타지에서는 ‘비현실성’보다는 ‘자유로운 펼침’이 더 우선이다. 그래서 판타지는 언제나 좋은 쪽을 향해 있고 그 색깔은 늘 밝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허공과 꿈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굳이 어둡고 무서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판타지에 악몽惡夢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19년 전 2000년대를 맞이하기 전에 느꼈던 그 설렘이 조금은 더 이해된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 어린이들의 필독서 <소년중앙>에서 장밋빛 판타지로 묘사되었던 21세기의 모습도 자연스레 이해된다. 판타지 속에서 못할 게 뭐가 있는가.

 해가 바뀌는 시점마다 판타지는 거듭된다. 새해 소망에 나쁜 일을 담는 사람은 없다. 2019년 초에도 어김없이 밝디 밝은 판타지 수십억 개가 만들어져 있다. 그 중에는 우리 사회를 향한 묵직하고 엄중한 판타지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기를, 깨끗하고 공정한 정치가 구현되기를, 부당한 이유로 차별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목소리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소망을 품은 목소리들이 특별히 사私보다는 공公을 중시하는 이른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수고하는 수많은 시민들은 이제 알고 있다. 사적인 소망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라도 공적인 영역이 좀 멀쩡해야 한다는 것을… 어쩌면 이번에도 또 하나의 판타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매년 초가 되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꾸역꾸역 내어놓는 건, 그 ‘나아진 세상’이라는 것을 언제까지나 판타지의 영역에만 둘 수는 없다는 시민들의 끈질긴 열망 때문은 아닐까…

 

 

* 《쿨투라》 2019년 1월호(통권 5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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